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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186)화 (186/300)

달의 황홀경

186화

“폐하! 황명을 속히 거두어 주십시오!”

“비 승상의 말씀이 맞습니다. 만일 일만 대군을 보내라 하신다면 당장이라도 그리 하겠습니다.”

차란이 문을 박차듯 들어오자마자 자리에 무릎을 꿇는 것과 동시에 잇달아 들어온 금위대장이 그 옆으로 같은 자세를 취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문을 닫던 궁녀들이 화들짝 놀라는 바람에 문이 덜컹거렸다.

경대 앞에 서 있던 우찬은 궁녀의 도움 없이 혼자 머리를 묶느라 두 사람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대꾸했다.

“일만까지는 필요 없다. 기동력이 좋은 호위군 몇 명만으로도 충분해. 돌아오는 길은 국경 수비군과 함께 올 테니 미리 전서구나 보내 놓아라.”

“호위군 몇 명이라니요!”

말문이 막혀 할 말을 잃은 금위대장을 대신하여 차란이 기세 좋게 대들었다.

“금위대장 말대로 일만 대군을 끌고 가셔도 불안한 곳을 고작 호위군 몇 명이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댁들 실력 같은 건 난 모르겠고, 일당백도 정도껏 과장을 해야지.”

이제 태금궁 안에서는 모습을 감출 생각조차 하지 않는 호위군들이 눈빛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자 차란이 목소리를 낮춰 사납게 윽박질렀다. 유일하게 복면을 벗은 흑영이 대놓고 인상을 찌푸리자 차란은 답답한 마음을 엄한 곳에 화풀이하며 왜 가만히 있느냐며, 폐하를 말리라 꽉 다문 잇새로 중얼거렸다.

“병사가 많으면 이동이 더뎌진다.”

“하지만 더 안전합니다.”

“연이설의 안전을 논하는 게 아니라면 말할 필요도 없다.”

“이설 님께서는 지금 창화군의 보호하에 무척 안전하게 계신다 소식 받지 않으셨습니까.”

“언제 오랑캐들이 쳐들어와도 이상하지 않을 곳에서 말이지.”

“북방이라고는 하나 사방이 금군으로 둘러싸인 요충지를 무슨 이유로 공격한단 말씀입니까?”

어지간해서는 황명에 토를 달지 않는 금위대장 역시 근심 가득한 얼굴로 우찬의 마음을 돌리려 애썼다. 간절함이 묻어나는 두 얼굴을 번갈아 쳐다본 우찬은 반응 없이 몸을 돌렸다. 여러 장으로 나눠 펼쳐진 지도를 들여다보는 얼굴이 사뭇 진지했다.

오후 늦게 황궁으로 전서구가 날아들었다. 아무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작은 새의 다리에 묶여 있던 짧은 서신은 너덧 명을 거치고 나서야 우찬의 손에 들어갔다.

부탁하신 것을 찾았다. 상태가 무척 좋으니 기쁜 마음으로 가져가시라는 간결한 문장은 그 뜻을 유추해 볼 필요도 없었다. 말린 종이를 묶어 고정시킨 은사면 충분했다.

우찬은 그 직후 군략 지휘를 모두 금위대장에게 일임한 뒤 도국으로 가는 일에 눈을 돌렸다. 그래 봤자 이설이 있는 곳까지 갈 수 있는 최단 거리를 확인하는 게 전부였다. 당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빨리 이설을 만날 수 있느냐였다.

“지금쯤이면 폐하의 공표가 만천하에 알려졌을 텐데 이제 와 이설 님을 헤치려 거기까지 쫓아갈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기우입니다.”

차란이나 금위대장은 우찬이 직접 도국 최 북방까지 가는 것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기는 중이었다. 내일 아침 해가 밝는 대로 떠나겠다는 말에 청천벽력같은 소리라도 들은 양 찾아와 시건방을 떨었다.

“승상의 말이 맞습니다. 도국의 북방은 너무 위험합니다, 폐하. 명하신다면 신이 당장이라도 떠나 마마를 모셔오겠으니,”

“그러니까 그 위험한 곳에 연이설이 혼자 있다 하지 않아.”

“금위대장의 말은, 폐하께 위험하다는 뜻입니다.”

토해 내는 한숨과 함께 말을 뱉어낸 차란은 기실 우찬이 제 말에 설득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이미 알아챈 모양이었다. 꿇었던 무릎을 펴고 일어나 우찬의 옆에 서서 지도를 봤다. 그리고는 지도 위 두 개의 지점을 손으로 짚었다.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현재 여기 연국의 이 지점부터 도국 바로 직전 여기까지. 모두 이민족 연합군의 집결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연합군이 노리는 단 하나가 폐하의 목숨인데, 여길 제 발로 찾아가시겠다니요.”

“그러니 눈에 띄지 않게 다녀올 생각인데 훼방을 놓는 건 네 놈들이 아니냐?”

“페하께서 직접 가시면 안 된다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답답함에 가슴을 두드리는 차란 만큼 겉으로 표현은 못 하지만 이미 곪을 대로 곪은 얼굴로 금위대장이 고개를 푹 숙였다. 며칠째 한숨도 자지 못하고 황궁 내 수상쩍은 사람들을 솎아 내는 데에 별의별 힘든 일을 다 겪었지만 우찬을 설득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었다.

우찬은 대수롭지 않게 차란의 손을 치워 냈다. 지도 위 이설이 사라진 지점에 동그라미 하나. 그리고 이설이 발견 된 곳에 다시 동그라미 하나. 지도상으로 봤을 때는 한 뼘 정도밖에 되지 않는 짧은 거리지만 걸어서 이동한다면 며칠을 꼬박 걸었어야 했을 것이다.

게다가 찬 바람이 매섭게 부는 산길이다. 아무리 이설이 연국에서 나고 자라 북방 날씨가 지리에 익숙했다 하더라도 혈혈단신으로 쫓기는 신세를 생각이나 해 봤을까.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를 안고 밤낮으로 죽기 살기로 도망쳤을 이설을 생각하기만 해도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다 손이 상하십니다.”

앞으로 나서는 흑영이 우찬의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모르는 새에 손에 힘이 들어간 바람에 지도 한쪽이 구겨지고 말았다. 차란이 흑영을 흘겨보며 ‘말리라는 건 안 말리고 왜 허튼소리를.’ 하며 말끝을 흐렸다.

우찬은 지도를 구겨 뜨린 손을 내려다보았다. 며칠 사이 피가 마를 날이 없던 손은 굳은살이 한층 더 깊게 배겼다. 그 위로 손목에 대충 감긴 검은 띠 끝자락이 아래로 늘어졌다. 가만히 자신의 손목을 쳐다보던 우찬은 소매를 털어 내리며 검은 띠를 감췄다.

“귀비는 아직 동보문 앞에 있느냐.”

손목을 보며 자연히 떠오르는 이의 행방을 묻자 약속이나 한 듯 모두의 얼굴에 불쾌한 표정이 스치듯 지나쳤다.

“해가 진 뒤 바로 궁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지금은 별궁에 계십니다.”

해가 뜬 내내 귀비를 따라다녔던 호위군이 바로 대답하자 차란이 놀라 물었다.

“여기, 태금궁의 별궁 말입니까?”

“그편이 감시하기 더 편하니까.”

“반대로 감시를 당하기도 편한 것 아닙니까?”

“할 수 있다면 그렇겠지.”

덤덤한 말로 대꾸하는 우찬은 실상 차란의 말이 그다지 와닿지도 않았다. 귀비는 말이 좋아 태금궁 별궁에 기거 중인 거지 감금이나 다름없었다. 별궁은 지금 안팎으로 병사들이 깔려 쥐새끼 한 마리도 드나들지 못하는 곳이 된 지 오래였다. 의심받고 있는 처지를 모를 귀비도 아니고, 섣부른 짓을 할 수도 없으니 별궁을 내어 준 값은 그걸로 톡톡히 치른 셈이었다.

“귀비 덕분에 이설을 쫓던 오랑캐들이 뿔뿔이 흩어져 남하하고 있다 하니 이 정도 호사는 누리게 해 줘야지.”

“신은 아직도 이게 괜찮은 방법이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뒀으면 북의 모든 이민족이 연이설 하나를 잡겠다고 모여들 참이었어. 고작 내 명줄 하나 끊겠다고 말이지.”

“그렇다고 갑자가 귀비 책봉이라니 너무,”

“연이설이 도망칠 길을 마련해 준 것뿐이다.”

“……이 소식을 이설 님께서 들으시면 또 얼마나 서운하실는지.”

의도했던 게 분명하다 싶을 정도로 적당히 들릴 수 있을 만큼만 목소리를 낮춘 차란이 과장된 한숨으로 우찬의 주의를 끌었다. 내내 보고만 있던 흑영이 옆으로 다가와 옆구리를 후려쳤을 정도였지만 차란은 아랑곳하지 않고 한 차례 더 아쉬운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귀비께서 오늘 종일 폐하의 이름을 만천하에 보인 성과가 있었다 하니 다행은 다행입니다.”

우찬은 이례적으로 봉호도 없이 귀비에게 첩지를 내렸을 뿐만 아니라 손목에 제 이름을 감추지 말라 단단히 명하였다. 그 덕에 귀비는 왼쪽 손목에 새겨진 황제의 이름을 자랑스레 내보이며 황궁을 거닐었다.

그것도 모자라 연회 중 황궁 문 앞에서 백성들에게 떡이며 당과며 먹을거리를 나눠 주는 행사에 귀비를 내세워 그 모습을 드러내게 했다.

사람들은 귀비보다도 귀비 손목에 인장처럼 찍혀 있는 황제의 이름에 더 관심이 많았다. ‘금우찬’ 이름 석 자를 곱씹으며 사람들은 모두 이설은 진짜 정인이 아니었으며 황제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한낱 사내였다는 사실을 서서히 수긍하게 되었다.

소문은 무척 빠르게 퍼져 나갈 것이다. 이미 금황제의 진짜 정인이 귀비로 책봉이 되었다는 사실이 대륙 전역에 퍼졌다. 여기에 우찬의 진짜 이름까지 얹어졌으니 더 이상 이설을 죽여야 금황제의 명줄을 잘라 버릴 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소문은 돌지 못할 것이다.

“그 귀한 이름을 저잣거리 어린아이들도 다 부르고 다니게 됐으니…….”

“그깟 이름이 연이설의 목숨보다 귀하단 말이냐?”

차란이 바로 그건 아니라며 꼬리를 내렸다. 쓸모없는 말싸움에 지겨워진 우찬이 성가시니 이만 다들 물러가라 명하려고 할 때 장지문 너머 사부작거리는 발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눈을 번뜩이는 호위군들이 우찬의 앞을 막아섰다.

“폐하. 귀비 마마께서 긴히 뵙고자 찾아오셨습니다. 안으로 모실까요?”

곧 윤 내관이 기별을 넣었다. 딴생각에 빠져 있던 우찬은 ‘귀비 마마’라는 말에 눈을 찡그렸다.

“들라 해라.”

우찬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흑영을 포함한 호위군 전원이 탁자 위에 지도를 가지고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졌다. 텅 빈 탁자에 우찬만 슬쩍 걸터앉았다.

잠시 후 활짝 열린 문 사이로 잔뜩 치장한 귀비가 사뿐사뿐 걸어 들어왔다.

“무암궁의 귀비 연이설이 폐하를 찾아뵈옵나이다. 홍복을 누리소서.”

급히 배운 티가 역력한 자태로 귀비가 어색하게 예를 갖춰 인사 올렸다. 옆에 궁녀가 잡아 주지 않으면 앞뒤 좌우 어디로든 엎어졌을 만큼 갖은 치장이 지나치게 많고 무거워 보였다.

귀비는 여유 있게 우찬의 침소를 둘러보다 차란과 금위대장을 발견하고는 생긋 미소 지었다.

“두 분께서도 함께 계신 줄 몰랐습니다. 혹 신첩이 방해를 한 것은 아닌지요?”

“끝나가던 참이다. ……둘은 이만 나가 보아라.”

차란이 건방지게 구는 것도 정해진 몇 명 안에서만이었다. 귀비까지 있는 마당에 평소 하던 대로 불복하겠다는 티를 내지는 못했다. 여러 대신들 앞에서나 보이는 무뚝뚝한 얼굴로 인사를 한 뒤 금위대장과 서둘러 나갔다.

두 사람의 뒷모습을 유심히 쳐다보던 귀비가 우찬에게 몸을 돌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승상께서는 아직도 신첩이 폐하의 정인으로 탐탁지 않은가 봅니다.”

“그래?”

“귀비 책봉 후부터는 신첩에게 그리 쌀쌀맞을 수가 없습니다.”

투정이라도 부리듯 귀비가 말끝을 새침하게 올리며 말했다. 그때까지도 손에 배긴 굳은살을 만지는 둥 귀비에게 별 눈길도 주지 않던 우찬이 고개를 쓱 들어 올렸다.

“장사치 손에 자라 그런가 차란이 딴 건 몰라도 물건을 잘 봐. 겉보기에는 번지르르해도 쓸모가 없으면 눈길도 안 주거든.”

“신첩이 쓸모가 없어 승상께서 눈길도 주지 않는다는 말씀이십니까?”

역시 보통내기가 아닌 귀비가 여전히 미소 지은 얼굴로 물었다. 우찬은 한때 저 여유와 배짱을 높게 쳐주었던 적도 있었음을 기억해 내고는 그 사실에 실로 역겨움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차란이 잘 보는 건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지. 차란은 그냥 그대가 싫은가 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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