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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185)화 (185/300)

달의 황홀경

185화

눈을 감은 사이 지독한 꿈을 꾸었다. 무슨 내용인지, 어떤 장면이 있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정신을 차리고 보니 기분이 굉장히 나빠서, 아주 끔찍하고 불길한 꿈을 꾸었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뻑뻑한 눈꺼풀을 어렵사리 들어 올려 눈을 떴다가 주홍빛 뿌옇게 번진 등불이 시려 눈을 감았다. 팔이고 다리고 사지가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워 지난 밤 잠들기 전 무슨 일이 있었더라, 생각을 해 보다 갑자기 온몸에 한기가 뻗쳤다.

이설은 등불에 눈이 밝은 것도 모르고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동시에 허리가 튕기듯 위로 올라왔다. 그러자 옆에서 우당탕 시끄러운 인기척이 났다.

“아이 깜짝이야! ……일어, 나셨어요?”

“뭐, 뭡니까?”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의원을 모셔오겠습니다.”

보아하니 방을 정리 중이었던 젊은 여인이 벌떡 일어난 이설을 보고 놀라 들고 있던 물건들을 모두 떨어뜨렸다. 유심히 이설을 보던 여인은 이설의 질문에는 대답도 않고 냉큼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설은 황당함에 말문이 막혀 사라진 여인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쳐다보다 곧 주변을 둘러봤다. 넓고 깨끗한 방은 당장 죽일 사람을 가둬 두기에는 너무 호화로웠다. 방을 가득 채운 장식품은 모두 이국적이고 창문과 문의 모양은 낯선 양식이다. 이민족의 본거지에 붙잡혀 온 것일까? 근데 왜 아직 살아 있는 거지?

향이라도 피웠는지 머리가 멍해져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탁자 위에 붉은 향초가 소리 없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정신을 몽롱하게 재우는 원흉을 꺼트리려 이설은 두 발을 바닥에 내렸다.

“루 소의 마마!”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깜짝 놀란 이설은 바닥에 닿았던 발을 제자리로 돌려 몸을 웅크렸다. 멀리 문이 열린 곳에서 사람 형체가 아른거리며 다가왔다.

“깨어나셨습니까? 무척 걱정하였습니다.”

“누구, ……거기 누구십니까?”

탁해진 목소리가 불안감으로 번졌다. 일단 낯익은 사내 목소리이기는 한데 얼굴이 보이지 않아 마음을 쉽사리 놓을 수가 없었다.

곧 낯선 사내가 가까이 다가오며 등불이 얼굴을 비췄다. 이설이 웅크린 몸에 힘을 빼며 아, 하고 감탄사를 흘렸다.

“창화군입니다. 벌써 제 얼굴을 잊으신 겁니까, 마마.”

등불에 환하게 밝혀진 얼굴은 기억했던 것보다 살이 좀 더 빠지고 피부색이 밝아졌지만 또렷한 이목구비는 낯익은 그대로다. 허허, 하고 소리 내어 웃으며 앞에 선 창화군을 보고 이설이 반가워 소리쳤다.

“창화군!”

“어어, 아직 상처가 다 낫지 않으셨으니 몸을 움직이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창화군은 덥석 손부터 잡는 이설을 말리며 이설이 등을 기대고 앉을 수 있게 베개를 겹쳐 쌓아 주었다. 푹신한 비단 베개에 몸을 기대면서도 이설은 연신 반가운 미소를 지우지 못하고 창화군을 바라봤다. 궁금한 게 너무 많아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얼굴이었다.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제가 왜 여기……, 아니, 것보다 창화군께서 왜 여기 계시는 건지, 그리고 분명 조금 전 자객들에게 화살을 맞았던 것 같은데…….”

창화군에게 횡설수설 얘기를 하는 것과 동시에 정신을 잃기 전 경험했던 끔찍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어깨에 화살을 맞은 기억도 났다. 혼란스러운 눈으로 더듬더듬 오른쪽 어깨를 만져 보는데, 창화군이 손을 잡아 내려 주었다.

“어깨는 일단 치료는 해 두었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일쯤이면 다시 많이 아프시겠지만요.”

“……창화군 대체 여기가 어디입니까?”

“혼란스러운 표정 짓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고요. 제가 다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때마침 아까 뛰어나갔던 젊은 여인과 노부인 둘이 함께 들어왔다. 들고 들어오는 물건들을 보니 노부인은 의원쯤 되는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린 이설에게 어디가 아프지는 않은지 불편한 곳은 없는지 묻고는 다행히 크게 부상을 입은 곳은 없으니 일단 심신의 안정을 취하라 일러 주며 노부인은 공손히 물러났다.

창화군은 젊은 여인이 놓고 간 차를 따라 이설과 나눠 가지며 침상 앞에 의자를 두고 앉았다.

“양화성 앞에서 마마께 화살을 쏜 것은 저희 도국 병사들이었습니다. 순찰 중 마마를 보고 이민족의 잔당이라 착각한 모양입니다. 요즘 양화성을 통해 국경을 넘는 이민족들이 많은지라……. 송구합니다. 저희 병사들의 오해로 마마께서 큰일을 치르실 뻔하였습니다.”

“아니, 아닙니다. 충분히 그렇게 오해할 만하였습니다. 그 근방의 국경이 요즘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제가…….”

“불행 중 다행히 정신을 잃으신 마마의 얼굴을 알아본 병사가 소문을 듣고 마마를 이쪽으로 모시고 왔습니다. 저 역시 북쪽 국경의 경비 강화를 위해 확인 차 여기 머무는 중이었고요.”

“소문이라면 제가 이민족의 습격을 받아 북방에서 사라졌다는 소문 말입니까?”

이설이 맹한 얼굴로 차를 홀짝이며 물었다. 창화군은 고개를 아래로 내려 시선을 깔았다가 애매하게 웃어 보이며 답했다.

“그것도 그렇지만 아마 병사들에게는 그보다 다른 것이 더 중요했을 겁니다.”

“다른 중요한 것이라뇨?”

“금의 황제께서 마마를 무사히 살려 데려오는 자가 누구든 어마어마한 포상을 내리겠다 공포하였습니다.”

“……”

“반대로 마마의 몸에 상처 하나라도 입히는 자는 삼대를 멸하고 그 사지를 찢어 벌하겠다 엄포하셨고요.”

이설은 찻잔을 입술에 댄 채 아, 하고 입을 벌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그 상황에 창화군이 웃으며 ‘대단한 연심입니다.’ 하고 말하기에 놀라 헛기침을 하다가 찻물이 아래로 쏟아졌다.

연신 죄송하다며 포단의 물을 닦은 이설이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훔쳐 내며 다시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우찬이 자신을 찾고 있었다. 적어도, 산 채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며칠간 쉴 틈 없이 고생했던 몸과 마음이 드디어 안식을 얻었다. 더 이상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는 곳에서 따뜻한 보살핌을 받고 황궁에는 자신을 기다리는 우찬이 있었다.

“방금 전 금국에서 전서구가 도착했습니다. 날이 밝는 대로 폐하께서 직접 오신다고 합니다.”

“폐하께서 여기까지 직접 오신다 하셨다고요?”

찻잔을 들고 있었더라면 분명 손에서 놓쳤을 만큼 깜짝 놀란 이설이 커진 목소리로 물었다. 창화군은 이 반응을 예상했었다는 듯 웃으며 고개만 천천히 끄덕였다.

“이르면 모레 저녁쯤에는 도착하실 테니 그전까지 마마께서 얼른 회복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 입장이 무척 난처해지니까요.”

우스갯소리를 하며 실없이 웃는 창화군은 금국에 있을 때보다 얼굴색이 훨씬 좋아 보였다. 정신없는 와중에 안부를 물어 근황을 듣기는 했지만 사실 머릿속은 온통 우찬의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창화군은 이설이 습격 당시부터 혼자 양화성 부근까지 달아나기까지 궁금한 게 많은 눈치였는데도 밤이 깊었으니 좀 더 잠을 자 두는 게 좋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궁 다음으로 안전한 곳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라며, 멍한 얼굴의 이설이 겁을 먹은 줄로 안 건지 몇 번이나 안심을 시킨 뒤 뒤를 돌았다.

“아, 한 가지 더.”

막 등을 보이던 창화군이 다시 이설에게 돌아섰다.

“단 공자께서도 지금 막 이곳으로 오시는 중입니다.”

“단 공자라니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단소운 공자 말입니다. 여기서 지내고 계셨는데 하필 지금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좋은 소식을 두 가지나 전해 준 창화군은 이만 쉬시라 밤 인사를 한 뒤 자리를 비켜 주었다. 혼자 남은 이설은 그제야 절로 떠오르는 미소를 막지 않고 기분 좋은 숨을 내쉬었다.

우찬이 오고 있다. 자신을 보기 위해 저 먼 황궁에서부터 여기 북방의 변두리까지.

하지만 설레는 한편으로는 이 시국에 우찬이 궁을 비우고 이 먼 곳까지 찾아오는 게 맞는지 싶은 걱정도 앞섰다. 콕 집어 하나로 정의 내릴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한데 뒤섞이며 머리가 조금씩 아파 왔다. 창을 열고 찬 바람을 쐬어 볼까 하다가 몸이 무거워 그냥 자리에 누워 포단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이상하리만큼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이리저리 뒤척이며 몸을 움직여 보는데 방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곧바로 숨소리가 죽고 몸이 굳었다.

“진짜라니까? 머리카락이 은색이야 은색.”

“백발을 잘못 본 거 아니야? 내막골 할아범도 어떨 때 보면 은발처럼 보이잖아.”

“그거랑은 완전 다르다고. ……어? 안 보이네.”

목소리를 들어 보니 조금 전에 의원과 다녀갔던 여인이다. 다른 한 목소리는 사내의 것인데 당연하게도 낯선 이다. 주고받는 대화를 들어 보니 여인이 사내에게 이설의 머리카락이 신기하다며 호들갑을 떨었고, 남은 볼일을 보는 김에 사내에게 그 신기한 머리카락을 보여 주겠다 호언장담한 모양이다. 이설이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있자 실망한 사내가 투덜거렸다.

여인은 그냥 쳇, 하는 소리 한 번으로 다음에 꼭 보여 주겠다면서 제 일이나 도우라며 사내에게 짜증을 냈다.

“근데 저 사람 잠든 거 맞아?”

“향 피웠잖아. 누가 흔들어 깨우거나 자기 스스로 일어나지 않는 이상 안 깰 거야.”

“너는 얼굴 봤어?”

“봤지 그럼.”

“어때?”

“허옇고 말끔한 게 저러고 있는 데도 귀티가 줄줄 흐르더라. 누구랑은 되게 다르게.”

여인이 사내를 훑어보았나 보다. 왜 그런 눈으로 자기를 보냐며 사내가 툴툴거렸다.

일단 이설은 자신을 해치려고 온 자객들이 아니라는 점에 마음을 푹 놓고 긴장을 풀었다. 서로 투닥거리는 대화 소리를 들으니 기연이와 화홍이가 생각났다. 그리고 곧 남겨 두고 온 비은궁의 사람들이 모두 보고 싶어졌다.

“귀티가 줄줄 흐르는 왕족이면 뭐 해? 이제 곧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될 게 눈에 훤한데.”

비웃음이 한껏 묻어나는 사내의 말에 귀가 쫑긋 세워졌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궁금한 마음에 이설이 포단을 살짝 내려 귀를 밖으로 꺼냈다.

“사내로 태어나서 후궁까지 된 마당에 좀 억울하기는 하겠다.”

“어쩔 수 없지. 애초에 금황제 이름도 안 가지고 있었다잖아.”

제 얘기다. 고민할 이유도 없이 이건 분명히 자신의 얘기였다.

“그래도 그렇지 황제도 너무 한 거 아냐?”

“뭐가 너무해?”

“이제 와서 다른 사람이 진짜 정인이었다고 하면 저 사람 입장이 뭐가 돼?”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여인이 들고 있던 물건을 바닥에 쿵 내려놓으며 사내에게 따지듯 물었다. 동시에 이설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며 숨이 턱 막혔다.

이설의 심정을 알 리 없는 여인은 숨 쉴 틈도 없이 조잘조잘 잘도 떠들어 댔다.

“그것도 볼품없는 천박한 이민족 여인이라니. 아무리 정인이라도 말이야, 금의 황제 체면이 있지. 그런 여인이 정인인 게 가당키나 해? 나라면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저 마마님을 정인 삼겠다.”

“천명은 그런 게 아니라니까. 그 오랑캐 계집도 황제 이름이 있다잖아. 그럼 별수 있어?”

“으, 하여간 재수 없어. 천한 오랑캐 주제에 금의 귀비라니.”

여인의 분한 목소리에 사내는 기가 차는 듯 핀잔을 주었다.

두 사람은 곧 창이 잘 닫혔는지, 향초가 아직 잘 타고 있는지 등을 확인 후 방을 떠났다. 문을 닫는 그 순간까지도 조심성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어 문 닫히는 소리에 이설이 놀라 몸을 움찔했다.

적막이 흐른 지 한참이 지나서야 이설은 포단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아까 전까지 설렘으로 미소를 머금었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갈 곳을 잃은 시선이 좌우로 왔다 갔다 움직이다 다시 멍하니 풀어졌다.

일단 머리를 식힐 차가운 물이 필요했다. 아까 먹다 남은 차가 탁자 위에 있다는 걸 기억해내고 이설은 느릿하게 허리를 일으켜 세워 두 발을 바닥에 댔다. 그리고 그 상태로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나려던 순간 왼쪽 발목에 찌릿하게 올라오는 통증에 놀라 그대로 앉아 버렸다. 찬물 따위는 필요도 없을 만큼 정신이 번쩍 든 고통이었다.

“왜 이러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이설은 왼쪽 발을 침상 위로 접어 올렸다. 한창 부어 있던 발목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안쪽 발목에 볼록하게 튀어나온 뼈 부분의 살갗이 얼핏 봐도 불그스름했다. 숲에서 다니다 벌레에라도 물린 게 아닐까 싶어 이설은 등불이 밝게 비추는 곳으로 가서 다시 발목을 확인했다.

“어?”

붉게 자국 남은 것은 벌레에 물린 상처인 줄 알았다. 그런데 밝은 곳에서 보니 그런 게 아니다. 이설은 흰 발목에 붉게 새겨진 흔적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입술이 자연스레 흔적을 읽어 내려갔다. 그제야 이것이 글자이며 누군가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순간 밭은 숨이 터지는 것을 이설은 두 손으로 꽉 틀어막았다.

발목에 새겨진 세 글자의 붉은 이름은 ‘금우찬’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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