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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183)화 (183/300)

달의 황홀경

183화

“거보게, 양씨 또 놓쳤잖아! 빨리 화살 달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어?”

겁먹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살기 없이 투덜거리며 고함을 치는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내는 쇳소리 나는 걸걸한 말투로 자리에 서서 연신 짜증을 냈다.

“오랜만에 고기 좀 먹어 보나 했는데 이틀은 더 참아야겠네. 에잇 빌어먹, ……아이고 이게 뭣이야!”

갑자기 화들짝 놀란 사내가 뒤로 물러난 것과 동시에 이설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단번에 힘을 주고 상체를 세워 팔꿈치로 받친 뒤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하지만 나무 잔챙이들에 걸려 멀리 가지도 못했다. 일어나 전속력으로 달리고 싶었지만 가뜩이나 아픈 발목을 방금 사내가 밟아 그럴 힘이 없었다.

“이게 뭐야 사람이야?! 양씨! 양씨 이리 좀 와 봐! 아, 얼른 와 보라니까!”

“……하아, 하…….”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힘이 없어 다시 그대로 고꾸라졌다. 사내는 시체라도 본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라 가까이에 있는 일행을 소리쳐 불렀다. 이설은 살려 달라는 말이 입안에 맴돌기는 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름만 왕족인 약소국 출신 왕자지만 한낱 오랑캐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추태를 부릴 수는 없었다.

“뭔데 또 그렇게 호들갑이야. 하여간 점잖지를 못하고, ……저게 뭐야?”

나무 뒤에서 다른 사내 하나가 나왔다. 느긋한 걸음으로 여유롭게 걸어오던 사내 역시 이설을 보고 깜짝 놀라 자리에 우뚝 멈췄다.

“임씨 자네 지금 사람을 돌로 쳐서 저 지경을 만든 거야?”

“아 무슨 소리야! 이게 지 혼자 시체처럼 바닥에 엎어져 있더라니까. 내 참 기가 막혀서.”

“이봐. 자네 내 말 들리는가?”

행색이 요란한 중년의 사내 둘이다. 허리춤에 한 뼘 길이의 단도 하나 말고는 눈에 띄는 무기도 없어 보였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쪼그려 앉는 사내에게 살의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하고도 이설은 쉽게 경계를 풀지 못했다.

“사람 말을 못 알아듣나 본데?”

사내 임씨의 섣부른 판단에 이설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세차게 가로 저었다. 아직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고 두 사람의 정체를 가늠해 보려 애쓰는 이설의 노력을 무시한 말이었다.

이설은 더는 갈 수도 없으면서 자꾸만 뒤로 물러나려던 것을 그만 멈추고 앉은 채로 왼쪽 발목을 감싸 잡았다. 발목이 성치 않다는 걸 알고 본능적으로 보호하려고 한 행동이었다.

일단 뒤쫓아 온 추격자로 보이는 행색은 아니고 설령 정체를 숨기고 있다 할지라도 당장 도망갈 몸 상태도 아니기 때문에 저항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 차라리 말로 설득하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른다.

이설은 날 선 경계를 조금 거두었다.

“말귀는 알아듣나 보네. 그래서 말을 할 수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임씨! 거 좀 재촉하지 좀 말고. 사람 놀란 거 안 보여?”

“자네는 내가 놀란 건 보이지도 않아? 난 또 시체라도 되는 줄 알고 얼마나,”

“……놀라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이틀 만에 입 밖으로 낸 목소리는 평소보다 칼칼했다. 큼큼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는 사이 사내 양씨가 쪼그려 앉은 자세로 찔끔찔끔 걸음을 옮겨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임씨가 호들갑을 떨며 말렸다.

“아, 가까이 가지 말어! 무슨 역병이라도 걸려서 여기 버려진 건지 누가 알아? 저 꼴 좀 보라고.”

대놓고 역병 환자 취급이라니, 불쾌한 것보다 제 몰골이 더 궁금한 이설은 고개를 내려 옷을 훑어봤다. 며칠 사이 남루해진 차림새로는 역병 같은 게 아니라고 말하기도 민망했다.

“하여간 겁은 많아 가지고. ……근데 진짜 자네는 뭔가? 왜 이 산속에 혼자 이러고 있어?”

“아……, 저 그게, ……그게 그러니까…….”

“행색도 꾀죄죄하고, 다친 데도 있는 것 같고. 일행도 없지?”

미처 생각해 보지 않았던 질문에 마땅히 둘러댈 만한 대답이 없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답은 상황에 모두 적절치가 않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일부러 머리색을 염색하면서 제법 치밀하게 생각하는 스스로를 대견하다 여겼는데 오산이었다.

결국 말도 안 되는 대답이라는 걸 알면서도 사냥을 나왔다가 일행들과 헤어지게 되어 며칠 내내 산속을 헤매고 있었다는 대답을 머릿속에서 정리했다.

그렇게 막 입을 떼려던 순간 멀리 서있던 임씨가 손뼉을 맞부딪치며 걸어와 양씨 옆에 앉았다.

“이거 이거, 말 못 하는 거 보니 딱 알겠네. 노비지, 너?”

“예?”

“딱 보니까 연국에서 도망친 노비구만 뭘. 요즘 노비 해방 운동이니 뭐니 해서 도망치는 노비가 그렇게 많다더니 딱 그 짝이네. 아니 근데 연국 사람은 무슨 노비도 이렇게 귀티가 줄줄 흘러? 사내종 얼굴 이리 뽀얀 건 처음 보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이설은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눈동자만 좌우로 굴려 댔다. 며칠 새 몰골이 말이 아니게 되었기로서니 노비라니. 귀족이면 모를까 하물며 평민 정도로만 봐 줬어도 무난하게 넘어갔을 텐데. 노비라는 말에 괜히 발끈하게 되는 걸 보니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긍지 높은 왕족인가 싶었다.

하지만 억울한 마음은 마른침과 함께 눌러 삼킨 이설이 어색한 표정으로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미소와 침묵을 완전한 긍정으로 받아들인 두 사내가 이제야 알 만하다는 듯 마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연국 노비가 여기서 뭘 하고 있었는가?”

“양씨 왜 이렇게 눈치가 없어? 척 보면 척이지. 종살이 힘들어 도망 나온 거 아니여!”

“그래?”

“팔다리 가는 것 좀 보게. 아이고, 그렇지. 저깟 몸으로 남의 집 종살이하는 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니지 아니야.”

졸지에 도망친 노비 신세가 된 이설이 그런 게 아니라며 임씨의 말을 부정하려다 입을 합 닫았다. 썩 듣기 좋은 오해는 아니지만 당장 이보다 좋은 거짓말을 생각해 낼 수도 없었다.

“꼴 좀 보게. 여태 쫓기기라도 한 거야?”

“예 그게 좀, ……그렇게 됐습니다.”

거짓말은 최대한 간결하게 해야 티가 나지 않는다는 주 상궁의 조언에 따라 이설은 짧은 대답으로 긴 사정을 대신했다. 굳이 긴 하소연을 하지 않아도 마른 팔다리와 고생한 흔적이 역력한 안색에 몸 여기저기 자잘한 상처들이 이설의 고생 많던 노비 생활을 몸소 보여 주었을 테니 긴 말 할 필요도 없었다.

“근방에는 추노꾼이고 뭐고 인적 하나 없으니까 걱정 말아. 어린 게 고생했네, 고생했어.”

쯧쯧 혀를 차는 양씨가 손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붙잡혔는데, 당겨 일으켜 세우더니 팔을 자기 어깨에 걸쳐 부축했다. 놀란 이설이 밀어내려 했지만 그럴 힘도 남아 있지 않아 팔만 몇 번 허우적거리고 말았다.

양씨가 귀찮게 하지 말라 투덜거렸다. 이 정도면 어깨에 둘러업고 갈 수도 있겠는데 그리해 줄까 묻기에 한사코 사양했다.

“나랑 임씨는 도국으로 들어가는 길이야. 국경 넘으면 내려 줄 테니 거기서 새 출발 해.”

버릇처럼 괜찮으니 혼자 가겠다 사양하려던 말을 하려다 목구멍 바로 앞에서 쏙 들어갔다. 염치 챙기는 것도 상황을 봐 가며 해야지 어디 지금 제 꼴이 그럴 체면인가 싶다.

그저 감사하다는 말만 반복하던 이설이 제가 가던 길을 생각해 보다 물었다.

“도국이라면 혹시 저기 협곡을 넘어 들어가시는 길인 겁니까?”

“협곡을 넘어?”

앞서 걷던 임씨가 고개를 휙 돌리며 인상을 썼다.

“거긴 군사 지역이라 함부로 못 가. 그것도 금국 군사 주둔지라 정작 도국 사람들도 함부로 못 들어가는 곳이야.”

“그치만 저는 그쪽에 볼일이 있는데요.”

“평생 종살이만 해서 그런지 세상 물정을 모르네. 거기는 근처만 지나도 바로 포박 행이야. 끌려가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어.”

“이건 임씨 말이 맞아. 무슨 볼일인지는 몰라도 마음 접고 도국 들어가서 노비 신분 청산하고 새 출발 하는 게 최고야.”

“갈 곳 없으면 내가 저쪽에 기방 몇 군데 아는데 거기 자리 좀 알아봐 줘?”

역병 환자 아니냐며 학을 뗄 때는 언제고 임씨가 사람 좋게 웃으며 오지랖을 떨었다. 허드렛일 하는 자리를 구해 준다는 걸까? 이설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씀만 받겠다며 거절했다. 임씨가 아쉬운 듯 입술을 양옆으로 비죽이며 ‘곱상하니 돈 꽤나 벌 것 같은데’라고 하는 것을 들었지만 허드렛일에 제 곱상한 외모가 무슨 도움인지 몰라 혼자 어리둥절하다 말았다.

양씨의 부축을 받아 걸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발목의 통증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임씨 말로는 멀지 않은 곳에 마차와 수레를 두었다고 했는데 길을 찾지 못하는 바람에 근방을 한참이나 헤맸다.

두 사람은 도국과 편국을 오가며 장사를 하는 행상인이라고 했다. 이맘때쯤이면 편국의 목화솜으로 만든 면직과 포단들이 인기가 좋아 수레에 잔뜩 실어 도국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이설은 수레를 찾자마자 겹겹이 깔린 두툼한 포단 위에 몸을 눕혔다. 따뜻하고 안락하게 몸을 감싸 오는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쫓긴 지 이틀 만에야 흙바닥이 아닌 곳에 머리를 눕혀 보았다.

“불편하지는 않고?”

“아주 편하고 좋습니다. 부들부들하고, 무척 좋은 목화 포단이네요. 장원성에서 재배한 목화솜인가 봅니다.”

옆에 앉은 양씨가 이설 몸 위에 얇은 포단을 하나 더 덮어 주었다. 이 정도 질이면 장원성에서 난 목화밖에 없겠거니 싶어 아는 체를 한 이설은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는 양씨를 보고 아차 싶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포단을 쓸며 말을 덧붙였다.

“저희 주, 주인 어르신께서도 이런 포단을 하나 가지고 계셨는데 어찌나 탐이 나던지…….”

양씨가 그러면 그렇지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 출발해, 임씨!’ 하고 소리치자 곧 수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덜그덕거리며 낡은 마차가 말에 끌려가며 수레를 당겼다. 막상 수레가 움직이니 땅이 고르지 않아 계속 덜컹거리는 통에 생각만큼 노곤하게 잠에 빠져들지는 않았다. 이설이 허리를 일으켜 세워 앉았다.

“피곤해 보이는데 좀 자 두지 않고? 도국까지는 아직 하루 반나절은 더 가야 해.”

“그렇게 오래 걸립니까?”

“우리 같은 행상인이 넘어갈 수 있는 국경을 넘으려면 그렇지.”

그러니까 무슨 생각으로 맨몸으로 여기까지 도망쳐 온 것이냐며 타박하는 양씨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가만 기회를 보던 이설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거원성으로 들어가는 길은 근처도 지나치시지는 않습니까?”

이 부근부터 도국까지의 지리는 세세하게 알고 있지 않았다. 대충 이쯤이면 어디고, 이 방향으로 가면 어딘가가 나오겠구나 하는 정도의 감만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양씨의 말대로라면 제 걸음으로 사흘은 꼬박 걸어야 국경에 다다랐을 거라 생각하니 아찔했다. 그때쯤이면 추격자들 손에 죽는 것보다 아사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아까 임씨 말 못 들었어? 거기는 근처만 지나도 바로 포박이야. 운 나쁘면 화살부터 맞고 시작할 수도 있다고.”

“국경 경비라는 게 원래 그렇게 삼엄한가요?”

“요즘만큼 삼엄한 때가 없었지. 그간 이민족들이 잠잠했으니 뭐. ……하여간 거원성이든 양화성이든 그쪽으로는 국경 넘을 생각도 하지 말어.”

잠자코 양씨 얘기를 듣던 이설이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양화성이요?’ 하고 되묻는 얼굴에 전에 없던 생기가 조금 돌았다.

“양화성이 이 근처입니까?”

양씨는 갑자기 눈을 빛내는 이설을 유심히 바라보다 거리를 가늠하는 듯 생각에 잠겼다.

“이 근처는 아니고 음, 내일쯤이면 근처까지 갈 수 있으려나 싶은데. ……왜? 그쪽에 누구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

“양화성이라면 국경을 지나는 게 가능할까요?”

“가능이야 하지. 근데 어휴, 거기는 외지인들이 갈 만한 곳이 아니야.”

“이민족들의 지정 거주 지역이라고 들었습니다. 이민족이나 금군 말고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인가요?”

“들어갈 수는 있는데 아마 금방 쫓겨날 거야. 나도 몇 번 여우 털가죽을 팔겠다고 가 본 적이 있는데 사람들 참 매정해. 성문도 안 열어 주고 문전박대를 한다니까?”

하여간 오랑캐들 성질 더러운 건 알아줘야 한다며 양씨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돌부리에 걸린 수레가 덜커덩 튀어 오르자 양씨가 마차 좀 똑바로 몰라며 임씨에게 소리를 질렀다. 임씨가 지지 않고 험한 말로 받아치자 둘 사이가 요란스러워졌다. 이설은 아직 자신을 쫓는 누군가가 근처에서 이 소리를 듣고 찾아오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져서 다시 몸을 덮은 포단을 머리끝까지 덮어 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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