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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182)화 (182/300)

달의 황홀경

182화

7장. 달의 맹세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으면 파스락거리는 수풀 밟히는 소리가 들린다. 새벽녘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네발짐승의 소리일까 아니면 자신을 찾아 헤매는 암살자들의 소리일까.

이설은 어깨를 웅크려 앉아 나뭇가지로 가려 놓은 입구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토끼 굴처럼 작은 동굴은 사람 하나 앉아 있으면 천장까지 머리에 닿을 정도로 작았지만 그 덕에 쉽사리 눈에 띄지 않았다.

소리는 점점 멀어지다 어느새 사라졌다. 새벽바람이 나뭇잎을 흔들며 지나가는 소리도 한차례 매섭게 몰아친 뒤 곧 잠잠해졌다. 나뭇가지 사이로 서서히 햇빛이 밝아오는 게 보였다. 다시 아침이 오고 있었다.

“하아.”

길게 토해 내는 숨소리에 뽀얀 입김이 나왔다. 북쪽 산에 찾아온 초겨울을 털옷 하나 없이 버티기는 힘들었다. 석재영이 빌려준 겉옷은 정신없이 도망치던 중에 잃어버렸다. 말에서 구를 때 떨어뜨렸는지 좁은 나무 사이로 도망칠 때 나뭇가지에 걸려 두고 왔는지도 모르겠다.

몸을 숨기고 겨우 한숨 돌렸을 무렵에는 이미 해가 다 지고 난 뒤였는데, 그때부터는 추위로부터 도망치는 게 큰일이었다. 땅의 한기가 올라와 몸을 뒤덮으면 이가 저절로 딱딱 부딪힐 때까지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아침 해가 밝으면 그나마 견딜 만해졌다. 눈에 띄지 않게 도망치기 위해서는 날이 어두워졌을 때 움직이는 게 좋겠지만 추위를 버텨 낼 재간이 없고 산짐승이라도 맞닥뜨리게 된다면 그건 그거대로 큰일이었다. 겨울이 찾아온 북쪽 산에는 산짐승이 거의 없는 편이지만 모험을 할 수는 없었다.

이설은 그렇게 날이 밝은 잠깐을 틈타 동쪽으로 무작정 도망쳤다. 그제 낮쯤 습격을 받아 오늘 새벽에 이르기까지 숨 돌릴 틈조차 없었다. 어젯밤에는 몸을 숨길 만한 적당한 곳을 찾지 못해 쓰러진 나무 사이에 몸을 구겨 넣고 그 위를 나뭇잎들로 덮어 가렸다. 한밤의 추위에 얼어붙은 손가락 몇 개가 아직도 뻣뻣했다.

두 손을 모아 입가에 대고 입김을 불어 데운 뒤 마주 비볐다. 이틀 새 흙먼지로 볼품없이 더러워진 손을 보자 신세가 처량했다. 하지만 이설은 괜한 감상에 젖는 대신 나뭇가지를 걷어 동굴 바깥쪽으로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한참 동안이나 확인한 뒤 조심스럽게 밖으로 기어 나왔다.

지저귀는 산새 소리가 산 전체를 명랑하게 울렸다. 평소 그리 듣기 좋아하던 소리가 지금은 주변 소리를 듣는 데에 방해만 됐다. 이설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다 멀리서 물 흐르는 소리를 들었다. 어제 낮에 고여 있던 웅덩이의 윗물을 마시려고 입에 넣었다가 바로 뱉은 뒤로 계속 갈증 상태였다. 이설은 고민하지 않고 소리를 쫓아 걸었다.

멀지 않은 곳에 제법 큰 샘이 있었다. 바위틈에서 쉬지 않고 흘러내리는 맑은 물은 마셔도 탈이 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설은 우선 흐르는 물에 손을 깨끗이 씻었다. 물에 댄 그대로 손이 쨍하고 얼어붙을 것 같아 중간중간 손에 빼 입에 대고 입김을 불며 씻은 뒤 두 손 한가득 물을 받아 입술에 댔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이 닿자 온몸의 감각이 다시 깨어나는 듯했다.

마침 햇볕이 따뜻하게 내리쬐는 양지바른 곳이 있어 그곳에 자리를 잡아 앉았다. 차갑고 깨끗한 물 한 모금에 긴장이 탁 풀리며 이틀간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순식간에 유혈참극이 벌어지는 곳에서 이설은 다급히 도망쳤다. 서투른 기마 솜씨로 달리는 사이 호위군 여러 명이 옆에 붙었지만 곧 뒤따라오는 자객들을 막느라 뒤처졌다.

‘동쪽으로 가세요! 도국 국경에 있는 금군에게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마마!’

어디서 날아오는지 감도 잡히지 않는 화살에 옆구리를 맞은 호위 병사 한 명이 박힌 화살대를 부러뜨리며 소리쳤다.

‘어서 가십시오!’

몸으로 화살을 막아선 병사의 말에 이설은 그대로 뒤로 돌아보지 않고 말을 달렸다. 정신없이 달리다 비탈길에서 미끄러져 낙마했을 때 잠깐 정신을 잃었는데 눈을 뜨고 보니 이미 말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설은 옆에 나동그라진 신을 고쳐 신고 무작정 동쪽으로 달렸다.

연국은 완전히 벗어난 게 맞는 것 같다. 연국의 동쪽은 따로 국경으로 구분되지 않은 산악지대다. 여기를 지나 더 동쪽으로 들어가면 도국이었다.

이설은 숨을 고르고 가만히 상황을 생각해 봤다. 자신을 죽이려고 검을 뽑아 든 작자들의 정체와 자신을 죽이려는 이유를 밝혀내는 것. 당장 어떻게든 이곳을 벗어나 목숨을 부지하는 것. 두 가지 중 더 급한 것이 무엇일지.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할 정신은 없었다.

그래도 역시 목숨을 부지하는 것만큼 중한 일은 없지.

이설은 찬물에 손을 담갔다 뺀 뒤 양 볼에 댔다. 일단 살 방법을 궁리하는 게 급선무다. 그자들의 정체라고 해야 이민족일 확률이 높고 죽이려는 이유는 자신이 금 황제의 후궁이기 때문이거나 연국 출신 왕족이기 때문일 것이다. 구체적인 건 당장 생각해 보지 않아도 된다.

정신을 차리려 샘물에 세수를 하던 이설은 앞으로 쏟아지는 머리카락을 손에 쥐었다. 길이가 불편한 건 둘째 치고 너무 눈에 띈다. 이 깊은 산속에서 누굴 만날 리 있겠냐마는. 설사 마주친다고 하여도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서는 안 된다. 그리고 거짓말을 하기에 이 머리카락은 너무 불리했다.

다행히 머리카락을 검은색으로 물들일 수 있는 풀은 북쪽 산에서는 쉽게 구할 수 있다. 근방에서 어렵지 않게 원하는 풀을 찾아낸 이설은 머리카락을 물에 적신 뒤 이전에 우찬의 부상에 그래 주었던 것처럼 풀을 입으로 씹어 뱉은 뒤 머리에 발랐다. 길이가 만만치 않아 오래 걸렸지만 머리카락을 자를 만한 단도를 잃어버려 어쩔 수 없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 흐르는 물에 풀이 굳은 머리카락을 헹구고 물기를 짜서 햇빛 잘 드는 곳에서 겨우 한숨 돌렸다. 찬물이 닿은 머리가 꽁꽁 얼 것 같았지만 덕분에 개운해지는 느낌이었다.

“……지금쯤이면 폐하도 이 사실을 알고 계시겠지.”

머리를 말리며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이설이 혼잣말을 했다. 황궁 생각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떠오르는 얼굴은 하나였다.

혼자 도망을 치는 내내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다. 우찬이 구해 주러 오지 않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 지금이야 앉아 헛웃음을 지으며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자책해 보지만 겁에 질려 숨이 턱까지 막혔을 때는 어느 때보다 절박한 심정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그렇게 바랐던 건지도 모르겠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 속에서 다 괜찮을 거라며 허리를 끌어안아 주는 단단한 팔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습격을 받은 지 이틀째가 되었으니 황궁에도 소식이 들어갔을 것이다. 우찬은 그 순간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나를 걱정했을까, 아니면 예의 그 무심한 눈으로 혀를 한 번 차고 말았을까.

귀찮은 일을 만들었다며 자신을 원망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무렵 코끝이 찡해지는 걸 느꼈다. 이설은 그게 싫어서 아직 찬기가 남아 있는 손으로 목을 감싸고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뱉었다를 반복했다.

살아서 돌아가자. 살아서 돌아가자. 살아서 돌아가자.

주문처럼 되뇌는 말로 마음을 다잡은 뒤 잡생각을 털어 버렸다.

윤기 나던 은회색의 머리카락 끝이 얼룩덜룩한 흑발로 뒤덮인 것을 확인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이 조금 따뜻해지자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언젠가 기연이 가르쳐 준 대로 몸을 푸는 동작 몇 가지를 어설프게 따라 해 보다 문득 기연을 데려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기연이라도 위험해 처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유강과 단향 생각만 하면 마음이 착잡해졌다.

해의 위치를 살피며 동쪽으로 부지런히 걸었다. 사람들이 흐릿하게 남겨 놓은 오솔길이 걷기에는 훨씬 수월해 보였지만 혹시라도 누군가 마주칠까 걱정돼서 그 길에서 멀리 벗어나 걸었다. 사람 키만 하게 자란 수풀들이 앞을 막아 걷기 불편해도 덕분에 다른 사람 눈에 띄기 힘들 것이다.

한참을 걷다가 배가 고프면 여기저기 널린 작은 열매를 따 먹었다. 굶주린 배를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지만 달리 먹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부터 급격히 체력이 떨어진 게 내내 굶은 탓인 것 같기도 하고…….

이설은 쪼그려 앉아 손에 모은 산수유 열매를 하나씩 집어 먹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단향이 배를 좀 든든히 채우라 할 때 말을 들을걸. 시고 떫은 맛밖에 나지 않는 열매는 더 먹기가 힘들었다. 결국 땅을 파서 버린 뒤 그 위를 흙으로 메꿨다. 혹시라도 추적하는 사람들 눈에 띌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다시 길을 걷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이설은 그 순간 왼쪽 발목에 찌릿한 통증을 느끼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옷을 걷어 보니 발목부터 발까지 전부 퉁퉁 부어 있었다. 몇 번이나 넘어지고 굴렀으니 어디든 성한 게 있다면 이상할 노릇이었다. 어깨며 옆구리며 멍이 안 든 곳이 없었고 가시덤불을 구르며 긁힌 무릎 상처도 쓰라렸다.

그래도 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가야 할 길은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고 뒤에서 쫓아오는 것이 추격자인지 아니면 황궁에서 보낸 수색대인지 알 길이 없었다. 안전한 곳으로 가야 한다. 금군이 있는 곳으로.

그때였다. 이설이 다리를 절뚝이며 천천히 일어나려던 순간 머리 위로 무언가 날아와 수풀 사이로 떨어졌다. 묵직한 소리를 보니 화살은 아니었다. 놀란 이설이 재빨리 바닥에 가슴을 대고 엎어져 숨을 참았다. 돌에 배기는 온몸이 아파서가 아니라 밀려드는 공포와 압박감에 눈물이 줄줄 흘렀지만, 소리 내지 않으려고 흙 묻은 두 손으로 입을 꽉 막았다.

발소리가 가까워지며 곧 머리 위로 그림자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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