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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181)화 (181/300)

달의 황홀경

18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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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취한 좌승의 목을 그으셨다고요?”

태금궁의 집무실로 막 들어간 우찬에게 먼저 와 있던 차란이 대뜸 물었다. 놀라는 것 같기도 하고, 묘하게 비아냥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우찬은 일단 바닥 한가운데 놓인 커다란 자기 화분을 발로 걷어차는 것으로 짧게 분을 삭인 뒤 자리에 앉았다.

뒤로 밀린 화분이 와장창 깨지고 쏟아지는 흙에 분재 나무까지 엎어지는 광경을 보고도 모인 사람들은 놀라는 기색 없이 티 내지 않고 무거운 한숨만 내쉬었다. 당장에라도 우찬 앞에 뛰어나올 것 같던 차란도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알아보았느냐.”

특정하여 누구랄 것도 없이 우찬이 물었다.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지만 우찬이 무엇을 알고 싶어 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늦은 오후 전서구가 전해 나른 소식을 알게 된 이후로 우찬의 관심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흔적을 따라 남은 금군 호위대가 모두 쫓고 있다 합니다. 방향은 동쪽. 알고 가시는 줄은 모르겠으나 곧장 도국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알고 계실 겁니다.”

금위대장의 말 끝나기가 무섭게 차란이 끼어들었다.

“북쪽 산 어디에 떨어져도 원하는 곳은 갈 수 있다고 자신하셨습니다. 연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달으시고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도국으로 향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도국 국경에 주둔 중인 금군이 많다는 사실도 알고 계십니다.”

어떻게든 우찬의 기분을 누그러뜨리려는 차란이 속사포처럼 말을 빨리했다. 고성 한번 지르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한 채로 노기를 짓누르고 있는 우찬이 언제 터질지 모두 전전긍긍하는 얼굴들이었다.

우찬은 빈 찻잔을 살짝 기울여 서너 번 돌리며 다시 물었다. 목소리는 평온하고 침착했다.

“쫓는 이는 없다더냐.”

금위대장과 차란이 서로 눈짓을 보내다 결국 차란이 대답했다.

“습격한 이민족 몇몇이 살아남아 뒤를 쫓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금군이 최선을 다해 뒤쫓고 있습니다.”

“최선이라.”

나직한 목소리로 비웃은 우찬이 찻잔 돌리던 것을 멈췄다. 차란은 입술을 꽉 다물며 이마를 문질렀다. 말실수를 했다고, 자책하는 표정이 짧게 스쳐 지나갔다.

“그러니까. 국경을 넘자 연국 병사들로 위장한 이민족이 산길로 호위대를 유인했고. 정체가 발각되자 매복하던 궁수까지 합세해 연이설을 죽이려고 했다. 그 난장판 중에 빠져나온 연이설은 지금 도국으로 도망 중이고, 그 뒤를 이민족과 금군이 함께 쫓고 있다. ……이 말들을 하고 있는 것이냐.”

느릿하게 우찬의 말이 이어질 때마다 모인 이들의 표정이 더욱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시간 차를 두고 들어온 조각난 정보를 이어 맞춰 들어 보니 어처구니가 없을 내용이기도 했다.

우찬은 덜떨어진 얼굴들을 하고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제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훑어보았다. 어느 한 명의 책임으로 벌어진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분이 가시지 않았다.

책임 있는 자들의 목을 모두 벤다고 당장 이설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 하나에만 정신을 집중하려 노력해도 머릿속으로는 겁을 먹은 채로 정신없이 혼자 산속을 헤매고 있을 이설의 모습이 선연했다.

산짐승의 위협은 받지 않을까. 추워 떨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시 어디 다친 곳이 있지는 않을까…….

“폐하!”

팟! 하는 소리와 거의 동시에 차란이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튀어나왔다. 이설을 생각하며 순간적으로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이 감싸 쥐고 있던 찻잔을 깨뜨려 버렸다. 깨진 조각들이 손바닥 안에 박혀 있다가 큰 조각들은 아래로 툭툭 떨어졌다.

“괜찮으십니까? 바로 태의를 불러오겠습니다.”

“……됐다. 두어라.”

윤 내관을 찾으려는 금위대장을 말리고 급한 대로 자기 관복의 띠를 풀어 손에 감으려던 차란을 물러나게 했다. 툭툭 털어 낸 손바닥에서 자잘한 사기 조각들이 떨어지는데 별다른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감정도 고통도 모두 육체에서 떠난 것처럼 퍽퍽하다.

손바닥을 들어 올리자 금세 꿀렁꿀렁 새어 나오는 피가 아래로 흘러내리며 손목을 적셨다. 금빛으로 반짝거리며 선명하던 이설의 이름이 붉은 피에 뒤덮여 보이지 않았다.

우찬이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살짝 젖혔다가 잠시 후 눈을 떴다. 찻잔이 깨진 것과 동시에 균열로 어그러졌던 얼굴은 어느새 다시 평온해져 있었다.

“도국에 있는 모든 금군에게 알려라. 연이설을 찾으라고.”

“국경 수비와 이민족들이 모여 사는 부락을 감시하는 군 외에는 이미 루 소의 마마를 수색하는 데에 모두 투입되었습니다.”

“아니.”

단호하게 말하며 우찬이 자리에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았다. 소매를 완전히 적신 피 때문에 차란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관복 띠를 들고 쩔쩔맸다.

“금군은 한 명도 빠짐없이 연이설을 찾으라고 전해.”

“금군이 도국의 국경을 비우면 이민족의 침략이 더 심각해질 것입니다. 도국의 병사들만으로는 막아 내기 부족할 것입니다. 남하하는 이민족들의 목적지가 어딘지는 뻔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금군의 감시가 없는 틈을 타 이민족 부락민들이 반란에 가담하기라도 하면,”

“죽여라.”

우찬이 걱정 어린 금위대장의 말을 끊으며 차란에 손을 내밀었다. 건네받은 띠로 아직 피가 나는 손바닥을 닦지도 않고 대충 둘러 묶었다. 손목은 여전히 피에 흥건하여 이설의 이름을 가렸다.

차란은 제 손이 아프기라도 한 듯 인상을 썼고 금위대장은 우찬의 대답을 잘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반란에 가담하는 부락민은 모두 죽여라. 늙고 병든 자든 여인과 아이든 모두 상관없다. 국경을 넘는 자들 또한 예외 없이 죽여라. 정해진 거주지를 이탈하는 오랑캐의 목을 베고 그 본거지를 불로 태워 버려라. ……금이 북방 야만인들에게 베푼 자비는 모두 끝났다고, 전역에 알려라. 당장.”

잠시간 침묵이 도는 가운데 금위대장이 끝내 ‘존명’이라는 짧은 대답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멀어지는 금위대장의 뒷모습을 보며 차란이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한 발자국 우찬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본능적으로 주위에 서 있던 호위군들이 검을 빼내 들 기세로 상체를 기울였다.

“도국의 금군을 움직이지 않더라도 이설 님을 찾을 병력은 충분합니다. 이미 궁에서도 수색대를 보냈고요. 이 시국에 국경을 비우는 것은 위험합니다.”

금위대장이 사라지자마자 곧바로 대드는 것부터 시작하는 차란도 오후 무렵부터 눈에 띄게 초조한 기색을 보였다. 이설이 습격을 당한 것이 걱정되는 한편 근래에 자신의 예상과 계산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던 것들이 쌓여 폭발에 이른 듯했다.

“급파된 수색대가 근방에 도착하는 데만도 이미 하루 반나절이 지날 것이다. 너무 늦어. 그리고 연이설이 도망치는 방향으로 다른 오랑캐의 습격이 없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나? 뒤쫓는 금군만으로는 연이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이설 님의 안전이야 물론, ……하아.”

말귀를 알아먹은 차란은 더는 반박하지 못하고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차란은 단순히 금군이 지키던 자리는 비우는 것이 걱정스러운 듯했지만 우찬은 그게 큰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금위대장도 그걸 알고 있으니 군말 않고 황명을 전하려 나간 것이었다.

차란 만큼은 아니어도 금위대장 역시 우찬에게 소신껏 제 할 말을 할 줄 아는 사내였으며 금군 한 명 한 명의 책임을 진 무장이었다.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말이었으면 그 자리에서 강경하게 고개를 저었을 것이다.

금은 이번 오랑캐 토벌 전쟁에서도 절대 질 리가 없다. 피해의 정도가 얼마나 될지만 가늠할 일이었다. 도리어 뻔히 보이는 군사력을 차이를 두고 막무가내로 남하하는 이민족들의 의도가 기이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승패가 빤히 보이는 이 전쟁에서 괜스레 찜찜함이 느껴졌던 것도 이것 때문이었다. 혹시 자신이 뭔가를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뭘 믿고 저들이 이리 적극적인 공격으로 밀고 내려오는지.

“폐하!”

어쩌면 놓치고 있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골똘히 생각에 잠긴 우찬의 이목을 끌며 양문이 활짝 개방됐다. 사내 특유의 굵고 우렁찬 목소리로 부르는 고함 소리에도 우찬은 동요하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좀 전에 황명을 전달하러 나갔던 금위대장이 뛰다시피 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안 좋은 소식이라도 있습니까?”

잠시 숨을 고르는 금위대장을 빤히 쳐다만 보는 우찬을 대신해 차란이 긴박하게 물었다. 금위대장은 우찬에게 가까이 다가가 우찬이 자신을 올려다보지 않게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제 도국 근방에서 잡아들인 이민족들의 몸수색에서 각 부족과 교신하던 서찰을 찾아냈습니다. 헌데 그 내용이…….”

금위대장이 슬쩍 고개를 들어 우찬의 얼굴을 살폈다. 여간해서는 말을 가려 하지 않는 우직한 무장 충신이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 우찬이 이를 악물었다.

금위대장은 이내 결심한 듯 품 안에서 피와 흙먼지로 지저분해진 서신 한 장을 꺼냈다. 두 손으로 건네는 종이를 낚아채듯 가져간 우찬이 양손으로 종이를 펼쳤다. 다시 움직이는 왼손 손바닥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게 느껴졌다.

너덜너덜한 종이 위에 또렷하게 쓰인 글자들이 이룬 문장은 간결하고, 의미는 분명했다.

「만설지의 왕 호설제의 자손들은 들으라.

금황제의 몸에 이름을 새긴 정인 연이설이 북쪽에 있다.

찾아 죽여라.

그리하면 금황제가 곧 그 뒤를 따를 것이다.」

명료한 글의 처음부터 끝까지 몇 번을 곱씹다가 끝내는 가운데 다섯 글자를 입에 넣어 굴려 보았다.

찾아 죽여라.

누구를 찾아 죽이라는 말인지는 이것을 가지고 있던 자를 문초하지 않아도 알 만했다.

한두 명이 가지고 있던 서신이 아닌지 금위대장은 우찬에게 준 것과 같은 종이를 차란에게도 건넸다. 검은 글씨를 빠르게 훑어 내려간 차란이 말문이 막혀 다 읽은 종이를 옆에 흑영에게 넘겨주었다.

우찬이 종이를 와락 움켜쥐자 피로 물들며 글자가 번졌다.

내내 찜찜하던 것이 이것 때문이었나. 이민족들이 남하하며 민가를 어지럽힌 것은 금군의 이목을 끌기 위한 것일 뿐 진짜 목적은 연이설이었다. 이설이 우찬의 정인인 이상 그 둘은 생사를 함께할 것이라고 믿는 오랑캐들이 화살을 방향을 우찬이 아닌 이설에게로 돌렸다. 팽팽해진 활시위는 언제라도 화살을 튕겨 낼 작정이다. 이제 북의 모든 이민족이 연이설을 노릴 것이다.

우찬이 왼쪽 손목 위를 소매로 벅벅 문질러 닦아 냈다. 말라붙은 피에 가려 더러워진 이름 세 글자가 드러났다. 가만히 그것을 쳐다보던 우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은 일대로 커지고 우찬은 언제 폭발할지 몰라 노심초사하던 차란이 깜짝 놀라 어깨를 흠칫 떨었다. 우찬은 차란의 걱정만큼 크게 노여워하는 대신 맥이 풀린 목소리로 말했다.

“무암궁의 연이설을 데려와라.”

오직 이 방법만이 이설에게 향한 화살의 방향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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