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의 황홀경 (179)화 (179/300)

달의 황홀경

17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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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기분 나쁜 꿈을 꿨다. 정확히 어떤 꿈이었는지는 선명하지 않지만 자고 일어나니 묘하게 불길한 느낌이 들었고 등 뒤로 식은땀도 흥건했다.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누웠던 자리에 앉아 멍하니 천막 천장을 바라보는 이설을 보고 단향은 잠이 덜 깨셨냐며 웃었다.

주변이 아직 푸르스름할 무렵 이설과 호위대는 허둥지둥 짐을 챙겨 출발했다. 이른 새벽의 공기는 차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유강이 몸을 덜덜 떨고 이를 딱딱 부딪치며 이설의 말고삐를 잡았다.

추워 죽겠다며 우는소리를 하는 것은 유강만의 엄살이 아니었다. 다른 병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설마저도 생각했던 것보다 더 쌀쌀한 날씨에 어제 받은 석재영의 겉옷을 더 단단히 여몄다.

푸르스름했던 새벽안개가 흩어지며 곧 해가 밝은 뒤에야 추위가 한결 가셨다. 그쯤 이설은 미묘하게 바뀐 풍경을 보고 국경을 넘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부터 밟는 땅은 모두 연국이다.

“국경은 무사히 지난 것 같습니다.”

후발대를 통솔하며 쫓아오던 석재영이 말의 속도를 높여 이설 옆으로 왔다. 이설이 안도감에 지은 미소로 답했다.

“요즘 국경이 어수선하여 사고가 많다 들어서 걱정이었는데 참으로 다행입니다.”

“편국이나 도국 쪽은 사정이 그런 듯하지만 회국은 이민족으로 인한 피해가 미미한 모양입니다. 국경 지대가 보통 험한 산길이 아니니, 다들 동남 지방을 통해 남하하는 거겠지요.”

“남하요? 금으로 내려온다는 말씀이십니까?”

“예. 황궁은 그런 줄로 알고 대비하고 있습니다.”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으니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거주지를 이탈하여 국경을 넘어와 민가를 습격하고 약탈하는 패악이 단순한 유흥거리는 아니었을 테니까.

수십 년간 평화로웠던 땅에 찾아온 전쟁의 그림자가 단순히 혼자만의 불안이길 바랐는데 착각이었다.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진 이설이 힘없이 말갈기를 쓰다듬었다.

“결국 전쟁도 불가피하겠군요.”

“그렇긴 합니다만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한낱 오랑캐 따위는 금의 국경도 넘지 못할 테니까요.”

이설이 제 안위를 걱정하여 시무룩해진 것이라고 생각한 석재영이 우직하게 말했다. 몇 차례 짧게 얘기를 나눈 적이 있던 금위대장도 그렇고, 금의 무관들은 제 나라의 군사력에 대한 긍지가 대단했다.

금국의 군사력이야 두말하면 입 아프다며 온 나라에 위세가 대단했지만 그것도 다 옛말이었다. 긴 시간 동안 전쟁이 없었던 탓에 그 위세를 과시할 기회 역시 찾아오지 않았다. 이설은 금군의 위세가 과연 얼마나 용맹할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만설지에 사는 소수 부족까지 모두 합쳐도 채 이만이 되지 않을 이민족과의 전쟁에서 패하게 될지를 걱정하는 건 아니었다. 전쟁이 불가피하게 된 이상 그로 인해 적어도 하나 이상은 죽게 될 누군가의 목숨이 안타까웠다.

“그럼 궁은 전쟁 준비를 모두 마친 상태인가요?”

“아직 대외적으로 포고를 한 상태는 아니지만 일단 적절한 명분만 갖춰지면 곧바로 깃발을 올릴 것입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이미 명분은 갖춰진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소규모이기는 하지만 이민족의 습격으로 피해를 입은 민가가 한두 곳도 아니니, 이제 와서 금국이 먼저 전쟁을 선포한다 해도 명분 없는 영토 확장 전쟁이라고 손가락질받을 이유가 없었다.

“좋지 못한 시기에 궁을 떠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네요.”

여행길 내내 들었던 불길한 기분이 이것 때문이었을까. 사정을 듣고 나니 괜히 더 찜찜해지는 마음에 괜히 기운만 빠졌다.

늦어도 저녁때쯤이면 연국 궁에 도착해 그리웠던 얼굴들을 볼 생각에 마냥 들뜰 줄만 알았는데 생각만큼 즐겁지가 않다. 코끝을 살랑이는 익숙한 꽃향기도 기운을 북돋아 주는데 별 소용이 없다.

“이 근방은 이민족들의 세가 뻗치지 않은 곳이니 걱정 놓으십시오. 이민족들이 연국에는 무척 우호적이라 들었습니다.”

“예. 아무래도 다른 나라들보다는 교역이 쉽고 출신 부족에 따른 분리 정책을 시행하고 있는 것도 아니라……. 그래도 다 부족 나름입니다.”

이설이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수통에 든 물로 목을 적셨다. 아까 잠시 휴식하며 말에서 내렸을 때 찾아낸 약초의 이파리를 넣은 물에서 화하고 알싸한 맛이 났다. 고향의 물맛이다.

오늘따라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져서 혼자 있고 싶은데 제 속도 모르고 석재영은 곁을 떠날 줄 몰랐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부족 나름이라니요?”

잠시 혼자 생각할 게 있다며 석재영을 물릴 적절한 때를 놓쳤다. 이설은 자신만 아는 의미로 힘없이 푸스스 웃은 다음 미소가 흐릿한 얼굴로 대답했다.

“연국이라고 모든 이민족과 사이가 좋은 것은 아닙니다. 개중에는 연국이 자신들의 선조들과 맺었던 동맹을 배신했다며 돌아선 부족도 있습니다.”

“초대 황제께서 북방을 토벌할 때 연국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들었는데 그게 그들 입장에서는 그리 보였을 수도 있었겠군요.”

“뭐, 그네들 입장으로는 그렇겠지요. 하지만 그 무렵에는 이미 이민족 간의 다툼이 많아 연국 땅 안에서도 크고 작은 전쟁이 한창이던 때였습니다. 무고한 연국인들이 죽어 나간 것만 수천이었지요.”

어렸을 때 읽었던 역사서를 되짚어 보며 대답하는 이설도 한편으로는 제 나라에 이를 가는 북방의 몇몇 부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고한 백성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었던 그때 왕의 선택을 탓하지도 못했다. 모든 사람은 그 순간에 가장 이성적이라고 여기는 선택을 한다.

“당시 연국의 군사력으로는 어림도 없었기 때문에 금국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때 만설지 끝으로 쫓겨난 몇몇 부족은 아직도 연국을 미워합니다. 간혹 설산의 곰 사체를 훼손시켜 궁 앞에 두고 갈 정도니 그 원한이 보통은 아닌가 봅니다.”

이민족이 일삼는 괴상한 짓거리를 들은 석재영의 무뚝뚝한 얼굴에 놀라움과 혐오가 뒤섞인 애매한 감정이 떠올랐다.

설산에서 죽인 동물 사체를 훼손시켜 남의 집 문 앞에 던져놓고 가는 것이 북에서 어떤 의미를 가진 미신일지 알려 줄까 하다 관뒀다. 미신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더 많은 사람이 알게 될수록 효력이 높아진다는 그 옛날 보모상궁의 말이 생각나서였다.

석재영은 그 뒤로도 북방 이민족에 관하여 여러 가지를 물었다. 그들의 관습, 지역별로 나눠진 부족 간의 특성, 군사력과 주요 군술 등등. 평범한 생활상을 묻는 것이야 전반적으로 알려진 것들을 아는 대로 얘기해 줄 수 있었지만, 군술 등의 분야는 아는 바가 없어 묻는 것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수밖에 없었다.

혼자 있는 게 적적하여 말을 건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저를 통해 이민족의 정보를 알아내려던 참이었나 보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설이 알고 있는 정보 중 전쟁에 유용하게 쓰일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참을 얘기하고 나서야 석재영은 아쉬운 표정으로 마른기침을 하며 심문을 이만 마쳤다.

“필요하신 정보를 얻기에는 제 지식이 한참 모자라지요. 입궁하는 대로 연국 국경 수비대장을 뵙도록 해 드릴 테니 뭐든 물어보십시오. 최대한 도움 드리라 일러 놓겠습니다.”

사양하지 않고 감사하다 전하는 석재영을 보고 이설은 불현듯 지금쯤이면 만났어야 할 연국 병사들이 아직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국경을 완전히 넘은 지도 오래됐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이때쯤이면 마중은 물론 연국 깃발을 세운 수비대의 야영지를 발견했어야 했다.

길을 잘못 든 것도 아니었다. 국경을 넘었을 때 지도를 다시 확인했는데 분명 이 길이 맞았다. 어차피 말과 수레가 드나들 정도로 큰길은 이 길 하나였기 때문에 다른 길로 잘못 들었을 리도 없었다.

괜히 드는 불안한 생각에 이설이 말의 속도를 조금 늦췄다. 석재영에게 사실을 말하고 다시 지도를 확인해 볼까 생각이 든 찰나. 선두에서 걷던 병사들이 모두 멈춰 섰다. 이설은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느라 멈춘 앞을 보지 못하고 있다가 아래에서 유강이 ‘마마’ 하고 부르는 소리에 급하게 고삐를 당겼다.

“무슨 일이냐!”

이설과 대화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굵은 사내의 목소리로 소리치며 석재영이 병사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턱을 치켜들어 멀리 앞을 내다본 이설은 이내 환해진 표정으로 석재영의 뒤를 쫓으며 소리쳤다.

“연국에서 보낸 병사들입니다!”

자연스레 검부터 뽑아 든 석재영의 뒤를 쫓아 이설이 선발대의 앞까지 왔다. 앞에는 연국의 깃발을 든 병사들 수십 명이 서 있었다. 선봉에 말을 타고 있던 사내가 말에서 내려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춰 인사하려고 하자 이설이 말렸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네.”

“마마께서야말로 먼 길 오시느라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저희가 궁까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젊은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믿음직스럽게 말했다. 다시 말에 올라탄 사내에게 호위대의 책임자라며 석재영을 소개시켜 주었다. 사내는 석재영을 반갑게 맞은 뒤 곧바로 다시 말에 올라타 갈 길을 재촉했다.

사내가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 석재영이 말을 붙이고 다가와 신원을 더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냐며 물었지만 깃발이며 갑옷이며 모두 연국의 것이 맞으니 걱정할 것 없다며 안심시켰다.

“얼마 전 화전민이 태운 산불이 크게 번져 궁으로 가는 길에 고목이 쓰러졌습니다. 고목을 지나 길을 돌아오느라 제때 도착하지 못하여 송구합니다.”

“마음 쓸 것 없네. 그럼 지금 가는 길은 다른 길인가?”

“예. 저기 고개를 지나면 병사들이 오가며 다져 놓은 새 길이 있습니다. 궁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해마다 한 번씩은 화전민이 땅을 잘못 태워 산불로 인한 피해가 생긴다. 전부터 이를 해결할 방법들을 여러 방면으로 모색해 보고는 있지만 뾰족한 수가 없이 매해가 가고 있었다.

또다시 불에 탄 숲 생각에 마음에 안 좋아진 이설이 깊은숨을 내쉬었다가 다시 들이마신 때였다. 청량한 풀 냄새 사이로 역한 비린내가 코끝을 자극했다. 순간 얼굴이 굳은 이설이었지만 석재영은 사내와 한창 얘기를 나누는 중이라 보지 못했다.

“피……?”

“예? 마마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유강이 밟은 나뭇가지가 우지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이설이 입술을 중얼거렸다. 유강이 고개를 쳐들고 묻기에 아무것도 아니라 대답하고는 다시 조용히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역시 흐릿하게 피 냄새가 났다.

이설은 아무렇지도 않게 고향에 돌아온 게 마냥 좋은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길은 점점 좁아지고 머리 위로 우거진 나무 때문에 햇빛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게다가 궁은 상 중턱에 있기 때문에 궁으로 향하는 길은 오르막길이어야 하는데 어쩐지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아침 내내 품고 있던 불길한 기분이 최고조에 달했다. 이설이 마른침을 삼킨 뒤 고개를 돌렸다.

“……궁에는, 그간 별일 없었는가?”

화사하게 웃음이 진 이설이 묻자 사내가 대답했다.

“예. 전하의 지병만 아니라면 궁은 늘 그렇듯 평화롭습니다. 모두들 마마가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도 다들 보고 싶군. 내가 도착하면 다 함께 아바마마의 신목에 모여 제를 올리자고 했는데, 준비는 마쳤는지 모르겠어.”

“공주마마께서 다 준비해 놓으셨으니 걱정 마십시오.”

“그래? 그거 다행이군. ……길이 계속 험해질 것 같은데 잠깐 여기서 쉬었다 가지.”

이설이 갑자기 말의 고삐를 당겨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짧고 굵은 호각소리와 함께 온 병사들의 이동이 중지되었다. 사내는 곧 해가 더 어두워지기 전에 부지런히 걷는 것이 좋다는 입장이었지만 석재영은 여정 내내 한 번도 먼저 쉬고 싶다 말한 적 없던 이설의 첫 명을 따랐다.

“이 길은 해가 잘 들지 않아 곧 있으면 금세 어두워질 겁니다. 조금만 더 기운을 내십시오.”

“마마께서 무리하게 움직이실 필요 없으니 일다경 정도만이라도 잠시 쉬었다 가시지요.”

말 위에 선 두 사람이 팽팽하게 신경전을 벌였다. 지친 표정이 역력한 채로 둘을 바라보던 이설이 둘 사이에 말머리를 밀어 넣으며 섰다. 자신을 사이에 두고 갈라진 두 사람 중 이설은 석재영의 옆으로 바짝 말을 붙여 댔다.

그리고는 느릿하지만 아주 단호하게, 석재영의 허리춤에 달린 검을 꺼내 겨눴다. 검 끝은 정확히 사내의 목을 겨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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