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178화
황궁 구석진 곳에 위치한 옥사를 나온 때마침 금군이 한 가족으로 보이는 죄인 여럿과 그 집 하인들은 포박하여 끌고 지나갔다.
제일 어린 자식으로 보이는 남아가 어림잡아 열댓 살 정도. 부모를 잘못 만나 가진 건 누려보지도 못하고 남의 집 종살이를 하게 생겼다. 온 가족이 모두 황궁까지 끌려올 정도면 보통 부정한 짓을 저지른 게 아닐 테지만 뭣 모르는 어린애까지 죽음으로 몰고 갈 생각은 없었다.
오래전 우찬이 지금의 태자보다도 어렸던 시절, 정신이 오락가락하여 상황으로 일찍이 물러난 늙은이가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 뇌리에 남아서 일지도 모르겠다. 어린아이의 피를 묻히고 잠이 드는 날이면 꿈자리가 뒤숭숭해 잠에 들 수가 없다고. 숙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찬에게는 심각한 문제였다.
엉엉 울며 바닥에 붙은 다리 그대로 끌려가는 아이의 뒤를 따라 시선이 쫓아갔다. 차란이 함께 유심히 지켜보다 귀띔을 해 주었다.
“대사농(大司農 : 지방에서 중앙에 바치는 세금과 양곡을 관리) 엄의충의 식솔들입니다. 그간 중간에서 가로챈 세금으로 사돈의 팔촌까지 벽에 금칠을 하며 산다 합니다.”
“다들 적당히가 없군, 적당히가. 결국 그 욕심이 제 집안을 말아먹을 줄 모르고.”
“아직 약관에 이르지 않은 사내아이는 북쪽 국경 지대에 강제 노역을 하게 될 테고 여자아이는 남의 집 종살이를 하게 될 테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별 신경도 쓰지 않는 것을 위로처럼 늘어놓는 차란을 한번 훑어본 뒤 우찬이 대답했다.
“손조익 그자의 뻔뻔한 얼굴이 구겨지는 게 보고 싶어서.”
“예?”
“그래서 화유루에 가는 것이다.”
“아아. 굳이 그러실 필요까지야.”
“적당히를 모르는 그 욕심이 결국 어떻게 자기 가문을 무너뜨리는지 알게 되겠지.”
우찬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리자 차란이 혀를 내두르며 뒤를 돌아봤다. 기가 막혀 하는 제 심정을 윤 내관에게 토로하여 공감이라도 받아 볼 심산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윤 내관은 그저 그러시구나, 하는 예의 그 덤덤한 얼굴로 고개만 천천히 끄덕였다.
걷는 동안 우찬은 아까 전 받았던 서신 한 장을 떠올렸다. 존체의 안부부터 금의 평안을 기원하기까지 두루 훑어 써 내려간 글은 필체가 익숙하여 굳이 말미에 인장을 확인해 볼 필요도 없었다.
서신의 요지는 간단했다. 이동이 지체되어 하루 이틀쯤 일정이 늦어질 듯하니 부디 넓은 아량으로 허락해 달라는 것이다.
허락은 무슨. 허락하지 않는다 하면, 당장에라도 말머리를 돌려 돌아오겠다는 말인가? 그럴 수 있다면 그리하여라. 맘 같아서는 이대로 답신을 보내고 싶었지만 우찬은 꼬인 마음을 툭툭 털어 내고는 붓을 들었다.
이설이 그랬던 것과 같은 진부한 안부는 안중에도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고 짧게 써 내려간 글자들을 보고 어쩐지 제가 쓴 글이 아닌 것 같아 다시 쓰려다 차란이 급히 찾는 바람에 그대로 윤 내관에게 건네주었다.
이설이 당장 돌아오는 것은 반길 일이지만, 지금 황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봤을 때 이설이 반길 일은 아닌 듯싶다. 궁은 매일 같이 사람이 죽어 나가고 있었다. 악공들이 여기저기서 연주를 하면 그 사이로 창을 든 금군이 걸어가고 그 뒤로는 사람들이 울부짖는 비명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그 와중에 연회는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었다. 낮이면 이곳저곳에서 술판이 벌어지고, 밤에는 가무와 잔치가 해가 뜰 때까지 계속됐다. 궁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 자는 뒤가 구린 것으로 알고 모두 추포하겠다는 황명에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황궁으로 모여들었다. 한데 모여 술을 마시던 중 금군이 나타나 누군가를 끌고 나가면 모두 놀라 술잔을 떨어뜨리는 동시에 자신은 무사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다시 왁자지껄하게 술판을 벌였다.
하여간 모든 게 엉망진창인 연회였다. 우찬은 이 난장판이 된 황궁을 이설이 잠시 동안 떠나있는 것은 역시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이설은 매일같이 누군가 죽어 나가는 황궁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저쪽에 태자 전하께서 앉아 계십니다.”
담 없이 덩그러니 대문만 남아 있는 것도 문이라고, 거길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얕은 연못 주변으로 술상을 받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우찬의 모습을 발견한 악공들이 연주를 멈추자 화기애애했던 웃음꽃이 사그라지고 다들 사색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찬이 무시하고 지나간 뒤에야 모두 자리에 앉았고, 윤 내관 눈치에 악공들이 연주를 시작하고 나서야 다시 웃음소리가 들렸다.
“뭘 마시고 있는 것이냐?”
연못 위에 지어진 누각으로 이어진 돌다리를 건너며 물었다. 우찬이 적당히 가까이 다가오면 안부 인사를 하려던 태자가 어정쩡하게 인사를 전한 뒤 자기 병을 들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사과 향이 나기는 하는데, 복숭아 향인 것 같기도 하고…….”
“취했느냐?”
“소자, 술은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우찬에게 놀라 어안이 벙벙하던 얼굴이 조금 뾰로통해지며 툴툴거렸다.
태자의 나이 정도면 약주 한두 잔 정도는 식사 때 마셔 줘도 괜찮다는 태의의 말에도 우찬은 기어코 태자가 술 마시는 것을 금했다. 다행히 태자도 술에는 별 관심이 없어 귀한 술이 올라오면 살짝 맛을 보는 정도에 만족했다.
“황궁이 한참 어지러운데, 아바마마께서는 어인 일로 여기까지 납시셨습니까?”
그간의 여러 일로, 특히 이설과 관련된 일로 아직 화가 덜 풀린 태자가 괜히 더 과장된 예의를 갖추며 공손하게 물었다. 가끔씩 태자가 이럴 때면 버릇없다 면박을 주거나, 받아치지도 못할 말로 대꾸해 태자를 당황하게 했던 우찬은 아예 무시하고 주변만 둘러봤다.
“네 외조부가 보이지를 않는구나.”
가끔씩 버릇없게 굴기는 해도 대놓고 짜증을 부리거나 인상을 쓰지는 않는 태자지만 이번만큼은 기어코 기분을 못 숨겼다.
“소자는 그런 외조부를 둔 적 없습니다.”
“네가 뭐라 부정하든 네 친모의 뿌리는 손 가에서 시작됐다는 걸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어.”
꾹 다문 입술을 불퉁하게 삐죽거리며 태자가 허락도 없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곁에 선 태자의 보모상궁이 안절부절못하며 우찬의 눈치를 봤다. 오늘따라 왜 저렇게 버릇이 없나 가만 생각을 해 보니 그간의 일도 일인 데다가 이설이 인사도 없이 떠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소자의 외조부께서는 조금 전 누군가 나눌 얘기가 있다며 찾아와 함께 떠나셨습니다.”
“누군가?”
“처음 보는 자였습니다. 편국의 인장과 같은 무늬를 새긴 옥패를 허리춤에 달고 있는 걸 보니 아마 편국의 사신이었나 봅니다.”
“확실히 편국의 사신이었느냐?”
“사신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무튼 편국의 인장과 같은 무늬였던 것은 확실합니다. 하온데 아바마마. 소자가 꼬박 며칠을 앓은 줄 아십니까? 어찌 몸은 다 나았는지 한번 물어보지도 않으시는 겁니까?”
내내 뚱하게 쳐다보던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나. 한번 그런 적 없던 서운함을 토로하는 태자가 안쓰럽기는커녕 어처구니가 없었다. 바쁜 와중에 좋다는 약재들도 신경 써 매일 보내 주었는데 기껏 한다는 투정이 딱 열 살배기 어린애 같다.
우찬이 들은 척도 안 하고 무시하자 괜히 혼자 머쓱해진 차란이 태자의 안부를 물었지만 이번에는 태자가 대놓고 무시하며 전과를 앞니로 앙물었다.
요 며칠 수족처럼 부리던 이들이 금군에 끌려가 시체가 된 것만 해도 벌써 몇 명인데 손조익은 사람이 참 태평하다. 하기야, 가만히 앉아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어도 이상해 보이기는 했을 것이다. 뭐라도 붙잡아야지. 어떻게 해서든 이 난관을 헤쳐 나갈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사실 손조익이 지금 목숨을 부지할 명목으로 여기저기 발품을 팔고 다닐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자는 우찬이 자신의 목을 벨 수 있다 여기지도 않았다. 황제조차 거둘 수 없는 목숨이라며 지나치게 맹신했다.
“갑자기 편국의 사신과는 무슨 얘기를 하는 걸까요? 혹시 망명 도주라도 할 요량은 아닌지.”
“그 체면에 망명 도주라니 말도 안 되지. 편국에서도 쉽게 받아 줄 리 없고. 그보다는 차라리…….”
차란과 다른 얘기를 더 나눠 보려던 우찬은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쫑긋 기울이는 태자를 눈치채고는 말을 멈췄다. 구태여 태자의 앞에서는 하지 않아도 될 말이다. 볼일이 끝났으니 이만 돌아가자며 몸을 돌리는 순간 태자의 보모상궁이 불러 세웠다.
“태부를 찾아왔던 그 사내 말입니다. 전하의 말씀대로 편국의 옷을 입고 패를 차고는 있었지만 편국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무슨 근거로?”
“차림새야 감추면 감출 수 있다지만 말의 억양은 쉽게 고칠 수 없습니다. 이 늙은이의 귀에는 분명 북쪽 오랑캐의 방언이었습니다.”
우찬과 차란의 눈이 마주쳤다. 일순 심각하게 굳은 차란이 상궁에게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느냐 묻자 상궁이 결연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연주 소리가 뚝 하고 멈췄다. 자연스레 누각 입구의 대문 쪽으로 돌아간 시선들은 금군 수십 명을 발견했다. 연못가에서 술을 마시던 자기네들 중 누군가를 잡으러 왔다는 사실에 혼비백산하는 사람들을 지나 금군 두 사람이 급히 우찬에게 달려왔다.
“무슨 일이냐.”
“방금 전 도국 국경으로 파병된 군에서 파발이 도착하였는데, 저희 예상과는 달리 이민족으로 구성된 대부분의 군이 동남쪽이 아닌 서남 방향으로 남하하여 진격하고 있다 합니다.”
급하게 뛰어온 사내가 전하는 말마다 숨을 헐떡이며 대답했다. 잠자코 듣던 우찬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도국 국경을 기준으로 서남 방향이라 하면 회국을 지나 금으로 들어올 계획이군. 헌데 뭐가 그리 호들갑인 것이냐? 금의 서남지방 병력으로는 막기 힘들다, 이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아니 그런 것이 아니오라…….”
말을 잇지 못하는 사내가 옆에 선 동료를 한 번 봤다가 우찬은 보지도 못하고 차란을 봤다. 딱 봐도 차마 우찬에게는 직접 전하지 못할 얘기가 입속에서 맴돌고 있을 거라고 눈치챈 차란이 어서 말을 해 보라 닦달을 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태자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차란의 뒤편에 섰다.
“우리 군의 병력은 문제없습니다. 다만,”
“다만.”
“서남쪽으로 이민족 군이 가장 빨리 남하할 수 있는 산길은 오직 하나뿐인데, 루 소의 마마께서 연국으로 가시는 국경 길과 일치합니다. ……그 길이라면 필시 마마께서 습격을 받으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