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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177)화 (177/300)

달의 황홀경

177화

“아닙니다. 지금이야 해가 져서 쌀쌀한 거지 날이 밝으면 견딜 만할 겁니다. 제가 나고 자란 곳의 날씨니 너무 걱정 마세요.”

회국을 거의 벗어날 무렵, 연국에 가까워져서야 이설을 비로소 숨통이 트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얇은 옷의 사이사이로 들어오는 서늘한 바람과 푸릇한 나무 냄새가 이제 곧 연국에 도착할 것이라는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곳곳에서 부는 바람과 한층 싸늘해진 공기에 상쾌함을 느끼는 건 이설과 유강뿐, 병사들은 하나둘 추위를 토로하며 준비해 온 옷 한 겹을 갑옷 안에 더 껴입었다.

“마마께서 고뿔에 약하니 몸이 차지지 않게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라는 폐함의 엄명이 있었습니다. 부디 신의 말씀대로 해 주십시오.”

포단 두른 어깨를 좁게 말아 앉아 있던 이설이 고개를 번쩍 올려 들었다. 한쪽 어깨에 포단 끝이 내려가자 석재영이 일어나 다시 끌어 올려 준 뒤 앉았다.

“폐하께서요?”

“예. 그리고 나뭇잎에 긁히는 상처조차 용납하지 않으시겠다 하셨으니, 자꾸 무리를 이탈해 다른 길을 가시면 곤란합니다.”

그제야 석재영이 슬쩍 미소 지었지만 이설은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무리를 이탈해 길을 잘못 드는 것은 고삐를 능숙하게 다르지 못해서인데, 이걸 석재영이 모르고 하는 소리일 리가 없기 때문이다.

분위기를 풀어 보려는 심산인지 먼저 농담을 하는 데도 이설은 민망한 것도 모자라 당황스럽기까지 한 심정에 할 말을 잃었다.

우찬이 제 걱정을 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궁을 떠나는 순간부터 가급적 우찬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내내 노력하던 참이었는데 단 한순간도 성공해 본 적이 없었다. 병세가 악화되어 자리에 누운 아바마마보다도 우찬을 더 많이 생각하는 것이 괴로우면서도 당장 이 생각을 떨쳐 내기가 어려웠다.

강렬하게 타오르던 모닥불이 슬슬 사그라들었을 무렵 자리에서 일어난 석재영이 직접 나뭇가지를 모아 불길 속에 던져 넣었다. 눈 깜짝할 새 다시 활활 불길이 치솟은 모습을 멍하니 보는 이설에게 석재영이 다가와 물었다.

“발목은 아직 불편하십니까?”

울퉁불퉁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은 왼쪽 발목이었다.

“조금 뻐근하긴 해도 아주 불편할 정도는 아닙니다.”

“간혹 걸으실 때 다리를 절뚝일 때가 있으십니다. 궁에 돌아가면 의원을 먼저 만나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신경써 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며 이설은 그 뒤 석재영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눴다. 걱정했던 이민족의 습격을 받은 일 없이 순조롭게 이곳까지 다다른 것에 안도하며 두 사람 모두 일단 국경을 지나면 큰 위협은 없을 거라는 것에 동의했다.

회국과 연국과의 국경 지대는 처음이라는 석재영에게 내일 이동할 길을 조곤조곤하게 알려 주고 우찬과 약조한 기일에서 이틀의 시간을 더 청하는 서신을 내일 당장 보내는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대화 내내 어딘가 얼굴빛이 완연하게 어두운 석재영이 불편한 곳이 있는지 물었다. 이설은 몸이 피곤해 그렇다는 말로 얼버무리며 석재영의 배웅을 받아 천막 아래 잠자리에 몸을 눕혔다.

팔다리, 어깨, 등과 엉덩이. 어느 한 부분 개운하지 않은 곳이 없다. 피로 쌓인 몸이 더운물이 데워진 욕탕에 넣어 달라 아우성을 치는 것 같지만 쉽사리 잠이 오지는 않는다.

연국에 가까워질수록 짙어지는 불길한 기운은 그저 피로가 쌓이며 찾아오는 예민한 신경일 뿐이라고, 잠들기 직전까지 되뇌었다.

*

황궁을 둘러싼 높은 담의 바깥쪽. 연일 들려오던 악공들의 연주 소리가 나흘 전 늦은 저녁쯤부터 잦아들기 시작했다. 삼삼오오 모여 깔깔 웃어 대던 궁녀들의 웃음소리도 어느 순간 사라졌다. 대신 담벼락에 조용히 귀를 대고 있다 보면 발을 맞춘 여러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이따금 들려왔다. 그리고 그 뒤에는 꼭 울음 섞인 비명 소리가 뒤따랐다.

오늘 이른 아침. 연주 소리가 다시 시작됐다. 어느 때보다도 더 크고 높은 소리로, 악공들은 쉬지 않고 악기를 연주했다.

연주를 멈추지 말라는 황명을 직접 전달한 차란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눈치였다.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으시냐는 물음에 가볍게 웃어 주니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때마침 사내의 비명 소리가 차란의 귓전을 때렸다. 어제까지 여분령(旅賁令:황실과 궁성 수비를 담당하는 사무직 관직 중 하나이며 위위의 속관)의 관직을 지낸 사내였다.

“마, 말씀드리겠습니다! ……크흑, 폐하 다 말씀, 말쓰……음 드리겠으니 제발 살려, 커헉컥!”

이른 아침부터 저 자리를 지나쳐 간 이들과 비교해 봤을 때도 몰골이 심히 엉망진창인 사내는 단어 사이마다 울컥거리며 붉은 피를 토해 냈다. 이런 게 익숙하지 않은 차란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우찬은 한심하단 얼굴로 차란을 노려본 뒤 금위대장에게 마저 하라는 듯 턱짓을 했다. 금위대장이 굵은 목소리로 위엄 있게 소리쳤다.

“폐하께서 다시 물으신다. 지난 이 년간 동보문을 지키는 야간 숙위병들의 명단을 궁 밖으로 빼돌린 사실이 있느냐.”

“……이, 있습니다.”

“빼돌린 곳이 태부 손조익이 맞느냐?”

“하늘에, 켁켁, ……하늘에 맹세코! 명단을 받아 간 이가 누군, 누군지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 두 달에 한 번씩 숙위 일정이 나올 때마다 화, 황궁 밖에서 금전 몇 푼과 거래하였습니다. 누가 그 명단을 사 갔는지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

포박된 상태로 의자에 묶인 사내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겁에 질린 목소리를 덜덜 떨며 말하는 모습이 거짓을 고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이미 오른쪽 네 개 손가락의 손톱이 모두 빠진 상태. 겁이 많고 엄살이 심하니 손톱 두어 개쯤 뽑아내면 모두 실토할 것이라던 사내의 상관이 전한 귀띔이 맞았다.

“흐음.”

“정말입니다! 저, 정말입니다, 폐하! 제 말을 믿어 주십시오! 저는 정말 그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우찬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얼굴로 턱을 매만지자 사내가 악을 쓰며 몸을 흔들었다. 동시에 의자가 함께 바닥에서 흔들리기 시작하자 옆에 서 있던 병사가 칼집으로 얼굴을 후려쳤다.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사내의 얼굴이 돌아가며 정신을 잃었다.

“송구합니다.”

“됐다.”

우찬은 사내에게 찬물을 뿌려 정신을 들게 하려던 병사를 저지했다. 종일 한곳에 앉아 있으려니 몸이 개운하지가 않았다. 수확이 있을 듯하면서도 손에 잡히지는 않는 답답함을 잠시 제쳐 두고 바람이나 쐬어야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남은 죄인은 몇 명이지?”

“끌려온 자들 중 아직 심문받지 않은 자는 셋인데 그중 사도 견갑승의 몸종이 혀를 깨물고 자결을 시도하여 어의가 치료 중입니다.”

“쓸데없는 짓을. 그냥 죽게 둬라.”

“자결을 시도할 정도면 뭔가 알고 있는 게 있지 않을까요?”

“몸종 따위 털어서 나올 게 뭐가 있다고. 적당히 기회를 봐서 견갑승을 내 직접 심문하겠다.”

우찬이 손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근처에 서 있던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우찬의 동선을 쫓았다. 궁의 고위 관직부터 견습 궁녀까지 샅샅이 훑어 솎아 내는 일에 견갑승 같은 거물까지 잡아들이려는 것을 보고 적잖이 당황한 모양이었다.

사도 견갑승은 평생 황궁을 출입하며 네 번의 황권이 세습되는 것을 지켜본 황제의 최측근이었으나, 우찬이 즉위하며 차란에게 전에 없던 승상 자리를 내어 준 뒤로 그 위세가 엎어졌다.

즉위 무렵부터 손조익을 경계하던 우찬은 견갑승과 손조익 두 사람이 오랜 옛날부터 막역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올해 무렵 눈에 띄게 서로의 문지방을 드나든다 싶더라니, 결국 제대로 꼬리를 잡았다.

“견갑승은. 입궁했나?”

“건강상의 이유로 얼마 전부터 평내성 별가에서 요양 중이라 합니다.”

“난 따로 들은 바가 없는데.”

우찬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차란을 보며 말했다. 차란은 다소 당황한 눈으로 옆에 선 호위군 두셋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지만 외면당했다.

“그간 다른 중차대한 일들이 많아……. 송구하옵니다. 다 신의 불찰입니다.”

“알면 됐다.”

“시일 내에 입궁하라 오늘 바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알아서 하라는 듯 우찬이 별 관심 없이 고개를 흔들며 뒤를 돌아섰다. 오랜 시간 앉아 있던 탓에 고개를 좌우로 꺾어 움직이자 우둑우둑하는 소리가 살벌하게 났다. 뒤를 쫓는 차란이 따라 해 보다 애먼 담만 더 걸리는 것 같은지 금세 관뒀다.

“태금궁으로 모실까요?”

“화유루(樺流樓)로 가지. 지금쯤이면 술판도 한창일 텐데.”

옥사의 문턱을 막 넘은 우찬이 뒤를 흘끗 돌아보며 말했다.

차란은 아침 내내 쬐지 못한 햇빛을 이제야 마음껏 받아 쬐며 숨을 깊이 들이마시다가 우찬의 대답에 헛기침을 컥컥거렸다.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걸음을 빨리해 우찬의 옆에 나란히 서고 허리를 숙여 고개를 빼꼼 올려다봤다.

“그러니까, 술판이 한창인 곳을 폐하께서 왜 가신다는 겁니까?”

“왜? 내가 참석하면 안 되는 곳이냐?”

“그런 것은 아니오나 지금 같은 상황에 폐하께서 어울리시는 장소는 아니지요.”

입술 양 끝을 씰룩이는 차란의 머리를 밀쳐 내며 우찬이 짧게 헛바람을 뱉어 웃었다. 차란이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이설이 떠났던 그날, 늦은 오후부터 무장한 금군이 각 관청들로 불시에 들이닥쳤다. 죄를 묻고 따져 가려낼 시도조차 하지 않고, 금군은 다짜고짜 지명받은 관리들을 난폭하게 끌어냈다.

황궁은 이미 썩을 대로 썩어 있었다. 오랫동안 인사 개혁이 없었던 탓에 수십 년 전 운 좋게 관직을 얻은 관리 중 부패한 세력들이 그 위세를 점점 키워 갔다. 적당히 욕심을 부려 곳간이나 채웠으면 귀찮은 일을 질색하는 우찬이 한 번쯤 눈감아 주고 넘어갔을 수도 있었지만, 사람 욕심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가벼워질 리가 없었다.

곳간을 채우고도 재산이 넘친 부패 관리들의 종착지는 손조익이었다. 손조익과 한 술상을 두고 마주 앉을 수 있다는 건, 돈 주고도 못 살 귀한 인맥을 얻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선황의 스승이었던 탓에 제대로 된 관직에는 올라 보지도 못한 손조익이 황궁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것은 고작 이런 방법뿐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수완이 좋았던 걸까. 긴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손조익은 황궁 여기저기에 자기 사람을 참 많이도 심어 놓았다.

일의 시작은 손조익이 궁에 심어 놓은 사람들을 남김없이 모두 솎아 내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 잡음이 들릴 거라는 예상은 이미 일찌감치 해 놓은 뒤였다. 우찬은 뚜렷한 증좌도 없이 애먼 사람을 반역자로 몰고 있다며 울분을 토하는 이들에게 그동안 찾아낸 증좌를 내밀었고, 열이면 열 선처해 달라 목을 놓아 울었다.

“진짜 화유루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내가 너랑 농담이나 주고받자 하는 얘기는 아닌 것 같지 않으냐?”

“아니, 그래도 저…….”

“알고 있다. 손조익과 태자가 화유루에 함께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어.”

머뭇거리던 차란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가 다시 얼굴을 오른쪽을 찌그러트려 울상을 지으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가시겠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태자 전하 앞에서 꼭 그……, 그러니까 그 뭐라 해야 할까요,”

“더러운 꼴을 보여야 하는 이유가 뭐냐고?”

“……뭐, 비슷한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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