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17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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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게 너울거리는 모닥불이 타닥타닥 타들어 간다. 마른 나뭇가지를 한 번에 너무 많이 넣은 덕분에 유독 활활 타오르는 불 앞에 이설이 두툼한 포단을 덮고 앉았다. 팔을 앞으로 내밀고 손을 펼쳐 온기를 쬐니 노곤한 피로감에 하품이 쩍하고 갈라져 나왔다.
체면도 없이 부린 추태에 괜히 민망하여 괜히 큼큼하며 헛기침을 하자 유강이 ‘피곤하세요?’ 하고 물으며 다가왔다.
“조금. 단향이는?”
“짐 싣는 수레의 바퀴가 빠져서 다른 수레에 짐을 옮겨 담고 있어요.”
“길이 험해 불안하더라니. 다친 사람은 없다니?”
“다친 사람이 문제가 아니에요. 수레가 엎어지는 바람에 이설 님께서 갈아입을 옷이 담긴 짐짝 하나가 산 밑으로 데굴데굴 굴러간걸요.”
“내 옷가지 몇 벌이 무슨 대수라고. 내일이면 궁에 도착할 테니 큰일도 아니다.”
그래도, 하며 시무룩한 얼굴로 툴툴거리는 유강은 생각했던 것보다 지체되는 여정이 퍽 아쉬운 모양이었다. 이설도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게 계획대로 되는 일만은 아니라는 걸 알기에 군말하지 않았다.
예정대로라면 황궁을 떠난 지 나흘째가 되는 오늘쯤에는 회국과 연국의 국경을 넘었어야 했다. 날이 밝을 때 국경을 넘어 대기하던 연국 병사들을 만나 궁까지 부지런히 움직일 생각이었는데 해가 지기 직전인 지금, 이설과 호위대는 국경을 목전에 두고 야영 천막을 펼쳤다.
“유강아.”
“네,”
“무위장군에게 혼난 것이 아직도 속상해?”
입술을 삐죽이며 나뭇가지로 애꿎은 땅만 파 젖히던 유강이 정곡을 찔려 당황했다.
연국 땅을 밟을 수 있는 지점을 코앞에 두고 오늘 밤은 이곳에서 야영을 하겠다는 말에 유강이 떼를 썼다. 아직 해가 밝고 야트막한 산 하나만 더 넘으면 되는 길이니 서두르면 해가 지기 전 궁에 도착할 수 있을 거라 고집을 부렸다.
이를 호위대장 석재영이 완강히 거부했고 끝내 언성이 높아져 분위기가 험악해지기 이르렀다. 결국 말에서 내린 이설이 오늘은 이만 이곳에 진막(陣幕: 군사들이 진을 치고 야영하는 천막)을 치고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출발하겠다 말하며 상황이 일단락됐다.
“내가 네 편을 안 들어준 것도 섭섭하지?”
“그런 거 절대 아닙니다. 저는 그냥……, 제가 아직도 너무 철이 없고 어린애인 것 같아서 조금 우울했을 뿐입니다.”
유강이 시무룩하게 중얼거리며 땅을 헤집어 놓았던 나뭇가지를 모닥불 안으로 휙 던졌다.
“저 생각 없는 사고뭉치 단향이도 궁을 나오니 눈치껏 처신을 잘하는데 저만 쓸모없는 짐짝이 된 것 같아서요. ……힘이 세서 짐꾼이 되기를 하나, 검술 실력이 좋기를 하나. 하다못해 말이라도 잘 타서 정찰꾼이라도 될 수 있기를 하나. 이럴 거면 차라리 기연 형님이 따라오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회의감도 들고요.”
누가 물어봐 주기를 바라기라도 했는지, 유강이 속사포처럼 제 안에 속마음을 거리낌 없이 털어놓았다. 이설은 늘 유강이 솔직한 심정을 가감 없이 순수하게 고백하는 것이 신기하고 부러웠다. 유강은 자신이 얼마나 나약하고 불안정한 사람인지를 드러내는 것에 창피함이 없었다.
“다 각자 나름의 역할이 있는 거지. 너무 마음 쓰지 말거라.”
“제 역할은 뭔가요?”
“음. 내가 모닥불 앞에 쓸쓸히 앉아 있으면 옆에 와서 말동무가 되어 주는 사람?”
“……그게 뭐예요. 시시해.”
기대감이 반짝이는 눈이 금세 실망하며 아래로 쳐졌다. 이설은 자꾸만 아래로 내려가는 포단을 다시 잘 여미며 주위를 둘러봤다.
“잘 봐라. 내가 여기 혼자 앉아 있는 동안 누구 하나 말을 걸어 주는 사람이 있었느냐?”
“그야 오늘은 해지기 전에 야영 준비를 하느라 다들 무척 바쁘지 않았습니까?”
“그럼 어제는? 그제는?”
그제야 유강이 꾹 다문 입을 하고는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며 당황하는 티를 냈다. 본인도 깨달은 것이다. 자기가 아니면 이 많은 사람 중 그 누구도 이설에게 말을 걸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종일 이 무리에 섞여 있어 봐도 먼저 말을 걸어 주는 것은 유강과 단향뿐이다. 그나마도 단향은 혼자 뒤에서 허드렛일 하는 일이 많아 잠들기 직전 시중을 들 때나 얘기를 하는 게 다였다. 까닭도 없이 불길한 기분이 드는 것을 떨치고 싶어 아무 얘기나 나누려고 잠깐 단향을 붙들었다가도 고된 여정에 지친 단향이 꾸벅꾸벅 조는 모습을 보면 더 그럴 수도 없었다.
이따금 호위대 병사나 호위대장 석대영이 말을 걸기도 했지만 지극히 형식적인 말들에 불과했다.
이설은 정말 유강이 없었다면 ‘날이 좋구나’ 따위의 가벼운 말조차도 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유강의 동행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네가 따라오지 않았으면 나는 아마 지금쯤 굉장히 심심해졌을 거야.”
“이설 님은 늘 그렇게 다정하게만 말씀하시니 참 좋으면서도…….”
“좋으면서도?”
“……아닙니다.”
냉큼 입을 닫는 유강은 제 말마따나 아직 어리고 철이 없어 표정 숨길 줄을 몰랐다. 대충 하고자 했던 말을 눈치챈 이설은 제 입으로 말을 해 유강을 당황하게 하는 대신 미소로 대신했다.
연국에 돌아갈 생각에 들뜬 유강이 가자마자 먹고 싶은 음식들을 줄줄 늘어놓았다. 제 고향에 그리 많은 종류의 먹을 것들이 있는 줄 처음 알았던 이설도 내심 입맛이 돌았다. 말을 타고 이동하는 중간중간 억지로 끼니를 먹는 것이 얼마나 곤욕이었는지 모른다. 넘어가지도 않는 뻑뻑한 음식들을 한차례 물리고 나면 말에 올라탄 내내 빈속이 메슥거려 죽을 맛이었다.
“강아, 연국이 그리 좋으니?”
“당연하죠. 금국은 낮이나 밤이나 항상 덥고, 어딜 가도 사람이 많아 복잡한 데다 음식도 맛이 없는걸요.”
“그치만 연국에 비하면 낮 동안 해가 오래 떠 있어서 늦게까지 놀 수 있고 기름진 고기가 많아 마음에 든다 하지 않았어? 저잣거리에 오는 사당패나 가면극도 재밌고.”
“……그래도 연국 만큼 좋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이설은 대체로 놀림을 당하는 쪽에 가까웠는데, 유독 유강에게만은 짓궂은 편이었다. 불퉁하게 튀어나온 입술을 하고 시무룩해하거나 당황하여 횡설수설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혼자 모닥불을 감상하며 들었던 찜찜한 기분을 애써 지우며 이설이 가볍게 웃었다. 억지로라도 웃으면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는 차란의 조언을 귀담아듣고 실천 중이었다.
“그럼 다시 금국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강아.”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내일 연국으로 돌아가거든 계속 거기도 지내도 돼. 궁에서 계속 일할 수 있게 내가 말은 잘해 놓을 테니.”
“그건 싫습니다!”
별안간 소리를 빽 지르는 유강에게로 주변의 관심이 집중됐다. 이제 막 여기저기 곳곳에 천막을 치던 것이 마무리될 무렵 피곤에 지친 병사들이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저는 연국도 좋지만, 이설 님과 비은궁에 사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연화 누이와 화홍 누이도 이제 막 정이 들었고, 주 상궁은 뭐……, 아직 그렇게 좋은 건 아니지만 예전만큼 싫지는 않아요.”
“그래?”
이설은 횡설수설하며 언성이 점점 높아지는 유강에게 목소리를 낮추라며 손짓을 했다. 유강은 아직 흥분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기세로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검술 훈련은 또 어떻고요. 이제 막 진검을 들 수 있게 됐는데, 이제 와서 연국으로 되돌아가는 건 너무 아깝습니다. 내후년까지 꾸준히 훈련을 잘 마치면 무과 시험 없이도 궁 수비대가 될 수 있다 하니, 그런 말씀 마세요!”
잠자코 듣던 이설은 내후년까지의 일을 미리 계획해 놓은 유강에게 놀랐다. 당장 금에 돌아간 뒤의 일도 어떻게 될지 몰라 될 대로 되라 라는 식으로 살고 있는 저보다 훨씬 어른스럽지 않은가.
웃음기가 사라진 이설이 표정 없이 유강을 빤히 바라봤다. 이제 보니 연국을 떠날 때보다 조금 자란 것 같기도 하고.
“무슨 일 있으십니까?”
모닥불을 지피려 모아 놓은 마른 나뭇가지를 밟는 소리와 함께 딱딱한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이설과 유강이 동시에 고개를 돌리자 석재영이 거추장스러운 갑옷을 모두 벗고 칼 한 자루만 허리춤에 찬 채로 성큼성큼 서너 걸음 만에 가까이 다가왔다.
“큰 소리가 들리던데,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이설에게는 자로 잰 듯 깍듯하게 묻고 난 뒤 유강에게 향하는 눈빛은 온기 없이 험악했다. 유강이 이설을 위협이라도 한 것처럼 경계하는 석재영은 이설이 장난으로라도 고개를 끄덕이면 당장에 칼을 뽑아 들어 머리를 벨 기세였다.
“아닙니다. 제가 장난이 지나쳐 그런 일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강이 너는 이만 가서 단향이를 도와주거라.”
무예의 무 자도 모르는 이설이 봐도 무관 특유의 사나운 기세가 흉흉한 사내이니 유강은 더 하면 더했지 덜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유강이 벌떡 일어나 꾸벅 인사를 한 뒤 천막 뒤로 멀리 사라졌다.
유강이 사라지기 전까지 끈질기게 뒤를 쫓던 석재영의 시선이 곧 이설에게 옮겨왔다. 모닥불 불빛에 이글거리는 눈빛이 새삼 묘하게 겁을 먹게 하긴 했다.
“오늘 밤은 궁에서 편히 잠자리에 드실 거라 기대하셨을 텐데, 송구합니다. 모두 제 불찰입니다.”
뜻밖의 사과를 받은 이설이 당황하며 고개를 거세게 저었다. 몸이 흔들리며 포단이 아래로 떨어졌다.
“장군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사과라면 제 쪽에서 드려야지요. 이게 다 제 형편없는 기마 실력 때문 아닙니까.”
이설은 결국 제 입으로 소리 내어 인정한 사실에 창피해하며 이마를 긁었다. 오늘까지도 국경을 넘지 못한 것이 석재영의 부족한 통솔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조건 제 편을 들어 주는 단향과 유강조차 그런 소리를 하지 못할 것이다. 계획이 틀어진 것은 단연 이설이 말을 타는 실력이 처참할 정도로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연습을 한다고 하기는 했는데 그래도 썩……. 면목 없습니다.”
“말을 타고 산길을 이동하는 것은 훈련된 군병들에게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나 이렇게 험한 산길은 더 그렇습니다.”
“그리 말씀하셔도 제 기마 실력이 하찮은 것은 변함없습니다.”
어색하게 웃는 이설과 눈이 마주쳐도 석재영은 내내 유지하던 무덤덤한 얼굴 그대로였지만 어쩐지 처음만큼 무섭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처음 만난 내내 사적인 얘기를 물은 적이 없던 사람이 딱딱하게 건넨 위로가 제법 효력이 있었다.
“연국과 가까워진 것만으로도 벌써 날이 쌀쌀하군요.”
석재영이 바닥에 떨어진 포단을 주워 이설을 덮어주며 말했다. 고맙다 말을 전하며 이설이 자리에 앉기를 권하자 사양하지 않고 유강이 앉았던 자리에 마주 앉았다.
“이제 곧 겨울이 시작될 테니까요. 가끔 운이 나쁘면 이맘때쯤 연국에서 눈을 구경하실 수도 있습니다.”
“눈을 보는 것이 운이 나쁜 경우입니까?”
“저희 병사들……, 아니, 연국 병사들의 경우에는 그렇습니다.”
다시 말실수를 한 이설이 아랫입술을 물었다 놓으며 코끝을 찡긋했다. 석재영은 못 들은 눈치는 아니었지만 굳이 지적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했는지 ‘그렇군요’ 하는 말로 응수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끝냈다.
“수레가 망가지는 바람에 가지고 오신 옷들을 모두 잃어버리셨다 들었습니다. 내일은 신의 겉옷을 드릴 테니 몸에 맞지 않으시더라도 어깨에 걸치고 이동하시는 게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