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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175)화 (175/300)

달의 황홀경

175화

“반나절 내내 윤 내관을 상대하느라 얼마나 피곤했는지 아십니까?”

“내가 알아야 하는 것이냐?”

“아셔야죠. 신의 노고와 공로를 폐하께서 몰라 주시면 황궁의 그 누가 알아준답니까?”

“잘도 나불거리는 걸 보니 별일은 없던 모양이군.”

“폐하께서 저잣거리에 잠행만 나가셔도 노심초사하는 늙은이들이 오늘 이 일을 알면 저와 흑영을 죽이려 들 겁니다. 흑영은 죽지 않을 테니 저만 죽겠지요.”

불만을 토로하는 차란은 우찬이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동시에 반나절 동안의 수고를 생색내기 바빴다. 우찬은 늘 그렇듯 한 귀로 들었다가 다른 한 귀로 흘려보내며 마지막으로 봤던 이설의 모습을 떠올리려 애썼다. 더위에 지친 건지 창피함에 달아오른 건지 분간이 안 되는 벌게진 얼굴로 말 위에 오르느라 안간힘을 쓰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하여간 신경 쓰이게 하는 데에는 뭐가 있다. 그러니 이른 아침부터 저 답답한 차림을 하고 호위대에 몰래 숨어 들어가는 수고를 하게 만들지.

“혹시라도, 정말 혹시라도 윤 내관이 오늘 일을 알게 되면 황명이었다 꼭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어쨌거나 결국 너도 이 일에 가담한 자가 아니냐.”

“변복까지 마치신 채로 신을 보자마자 나덕산까지만 배웅해 주고 오겠다 훌쩍 사라지신 건 폐하가 아니십니까? 억울합니다.”

“어쨌거나 무사히 돌아왔으니 이 얘기는 그만하지.”

가만 놔두면 끝도 없이 같은 얘기를 반복할 차란이 벌써부터 지겨워졌다.

다행히 아침 일정이 빡빡하지 않은 덕분에 시간을 길게 비울 수 있었지만 앞으로 며칠 동안은 이런 여유도 없을 것이다.

“금위대장은 입궁하였나?”

“예. 아마 훈련장 집무실에 있을 겁니다. 따로 지시가 없는 이상 평소처럼 행동하라 일러두었습니다.”

“오늘 안에 황궁 안에서 소집할 수 있는 병력은 얼마나 되지?”

“금위대장에게 듣기로는 삼천이 조금 안 될 거라 합니다.”

“고작 삼천?”

“현재 주안 밖의 병사들 대부분이 국경 지대로 차출되어 있는 상태라 큰 병력은 아닙니다.”

“손조익의 사병만 해도 벌써 사백이 넘는데, 어처구니가 없군.”

우찬이 실소와 함께 고개를 뒤로 젖히며 불편한 심정을 내보였다.

“내정이 이리 평화로우니 황궁에 삼천이 넘는 병력을 집중시킬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그보다는 일개 귀족이 사백이 넘는 사병을 거느린다는 게 더 비상식적인 일입니다.”

“손조익이 그렇게 거대한 사병을 거느리지 못하도록 미연이 막지 못한 내 탓이라 이거냐?”

“……이설 님이 자리를 비우셔서 기분이 좋지 않으신 건 알겠지만 그래도 꼭 말씀을 참.”

차란이 삐뚜름하게 튀어나온 입술을 하고 투덜거렸다. 그리고는 자리에 앉고 싶다 눈치는 주려는지 흘끔거리며 의자를 곁눈질하길래 앞자리에 앉으라 눈짓을 주니 냉큼 자리에 앉았다.

괜히 차란에게 면박을 주기는 했지만 그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손조익이 제 뒤에서 몰래 사백이 넘는 사병을 기르는 걸 뻔히 알면서도 제제를 가하지 않았다. 고작해야 사백의 병사로는 제 뒤를 칠 수가 없었다. 손조익과 손을 잡은 뼈대 있는 가문의 이름난 명사들의 사병까지 합쳐 봐야 일천은 고사하고 팔백이 채 되지를 못했다.

게다가 손조익이 사병으로 일천이 넘는 사병을 거느린다 한들 역모를 도모할 자는 아니었다. 때가 되면 순순히 황위에 오를 태자를 더 빨리 황제로 추앙해 봤자 순리를 거스른 죗값을 돌아선 민심으로 치르게 될 것이다.

우찬은 자신이 금국 백성들에게 꽤 좋은 신임을 얻고 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민가의 백성뿐만 아니라 작은 지방의 성주들에게 역시 우찬은 너그럽고 이해심 많은 성군이었다.

물론 소수의 성주와 대신들에게는 이름만 들어도 이가 갈릴 극악무도한 군주였으나 어차피 모든 백성들에게 성군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힘으로 찍어 누르면 충분히 밟을 수 있는 것들에까지 일일이 관심을 줄 필요는 없다.

“그나저나 요즘 비차란 네놈이 이설의 이름을 자주 부르는 것 같은데.”

뜬금없는 우찬의 지적에 차란은 갑자기 왜 그런 얘기를 꺼내느냐 대꾸를 하려다가 어쨌든 자기 잘못임을 깨닫고 바로 꼬리를 내렸다. 하지만 머리를 조아리는 동시에 ‘허나’ 하고 첨언하는 것이 그다지 반성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마마께서도 여전히 루 소의라고 부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는 듯하여…….”

“좋아하지 않아?”

“예. 폐하께서야 늘 이름을 부르시니 모르셨겠지만요.”

생각해 보니 이설을 부를 때면 늘 ‘이설아’, ‘설아’ 하고 이름을 불렀던 것 같다. 루 소의라고 부른 몇 번은 아마 이설에게 감정이 좋지 못할 때뿐이었을 것이다.

금국 사람들이 이름을 매우 소중히 여기는 것과 다르게 우찬은 남의 이름은 물론 제 이름까지도 귀하게 여겨 본 적이 없다. 태자가 어렸을 적 잠깐 자신을 이름으로 불러 달라 떼를 써 마지못해 그래 주었던 것을 제외하고는 태자에게조차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 준 일이 없었다. 아주 화가 나서 꾸짖을 때를 제외하고는.

태자에게조차 다정히 불러주지 않는 이름을 후궁이라고 불러 주었을까. 우찬은 제 후궁이 몇 명인지도 모를뿐더러 품계를 가진 몇몇 후궁들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어차피 궁에 들어온 이상 한 개인으로 가졌던 이름은 이제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얼마나 쓸모 있는 품계를 받았는지, 그게 가장 중요했다.

그런 점에서 이설은 특별했다. 연이설이라는 이름 세 글자가 맞춘 옷인 듯 이설에게 꼭 어울렸다. 이설 말고 달리 불리는 건 아무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오직 ‘연이설’이라는 이름만이 이설을 뒤돌아보게 만들 수 있다.

“소의 첩지가 성에 차지 않는다 이건가.”

“그런 의미가 아니지 않습니까.”

코웃음을 치는 우찬에게 재차 설명을 늘어놓으려던 차란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말없이 뱉기만 했다.

“정1품 첩지 정도는 되어야 마음에 들어 할 셈이군.”

“그게 무슨……?”

“돌아오면 품계부터 올려 줘야겠다.”

“대관절 무슨 이유로 품계를 갑자기 올려 드린답니까?”

“무사히 돌아온 게 기특하지 않으냐?”

“예?”

턱이 떡 벌어진 차란이 너무 뜻밖의 소리를 들어 할 말이 잃은 듯 눈만 깜빡였다.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우찬을 유심히 들어보다 턱 아래를 벅벅 긁었다. 그리고는 못 들었던 것으로 치려는 듯 고개를 저어 생각을 날렸다.

갑자기 왜 이리 기분이 좋아지신 거냐 묻는 차란에게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우찬은 실제로 기분이 꽤 괜찮은 편이었다. 이설이 열흘 남짓한 시간 동안 자리를 비우는 것만 제외하면 대체로 좋았다.

궁 안으로는 그간 신경을 긁던 손조익을 끌어내리고 그와 결탁한 썩은 이를 뽑아낼 적당한 명분이 생겼고 궁 밖으로는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 이민족들을 완전히 토벌할 수 있는 전쟁 명분이 준비되었다. 이제 금군의 깃발이 휘날리며 가는 길마다 시체가 늘어선다 해도 금국을 비난할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그 여인.

연이설.

그 여인을 이제야 입맛대로 처리할 수 있게 됐다.

“무암궁은 잠잠한가?”

“잠잠하다마다요. 아주 태평합니다. 아까 낮에 우 미인이 이민족에서 온 몇몇을 불러다 차를 마신 모양인데 거기까지 다녀왔다 들었습니다.”

“제 궁에 침입자가 들었던 건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지?”

“그 침입자라는 게 저희 쪽 사람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저기 금원 옥사에 방치된 시체 두 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뭐가 됐든.”

“어젯밤 이후로도 달리 의심스러운 행동은 없다 하니, 아마 눈치채지 못한 것 아닐까요?”

“담이 큰 여인이다. 머리가 좋은지는 이제부터 알 수 있겠군.”

다른 것도 아니고 우찬의 이름을 직접 몸에 새겨 정인이라 속이고 입궁한 것만 봐도 보통내기는 아니었다. 몇 번이나 독대를 하면서도 겁을 먹은 모습은 보지 못했으니 타고난 배짱이 좋다고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배짱이 좋은 것만으로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우찬은 그게 다가 아닌 줄 알면서도, 이설과 삐걱대던 며칠간의 불화를 모두 그녀의 탓으로 돌리기로 했다.

“역시 그 배후에 북방 세력이 있는 거겠지요?”

“그렇겠지. 혼자 힘으로 이런 큰일을 도모하지는 않았을 거다. 그리고 차라리 그런 편이 처리하기가 수월해. 아귀가 딱딱 들어맞으니까.”

“덕분에 황궁 안팎으로 소란스럽기는 하니, 그렇긴 합니다만…….”

말끝을 흐리는 차란은 아직도 찜찜한 구석이 남아있는 눈치였다. 우찬은 그게 뭔지 이미 눈치챘기 때문에 일부러 물어보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에 대한 제 대답이라고 해 봐야 차란이 납득하기 어려운 것일 게 분명했다.

차란은 여전히 그녀가 제 정인은 아닐지 긴가민가했다. 민가에서 암암리에 이름을 강제로 새기는 일이 성행한다는 걸 전해 듣고서도, 아직 의심이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사실 정황상 모든 증거가 완벽함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모를 가능성이 차란을 늘 불안하게 했다. 우찬의 정인이 확실한 그녀가 자칫 목숨이라도 위태로울 경우 우찬의 안위 역시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설령 이 이름이 무암궁 연이설의 것이라 하더라도 계획에는 변함이 없다. 황궁에 연이설은 한 명이면 족해.”

만에 하나 그녀가 진짜 정인이라 하더라도 언제까지 무암궁에 살게 할 생각은 없다. 어차피 목숨 부지만 하면 될 일이니, 크게 어려운 것도 아니다.

중요한 건 그 여인의 존재가 이설로 하여금 황궁을 빨리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 준다는 데에 있다. 우찬은 일단 이설의 날개 한 짝을 부러뜨리는 것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게다가 잡음 많은 이민족 첩자와 내통을 하고 있었던 것도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니지.”

“이러나저러나 가만 놔두지는 않으시겠다는 말씀이시군요.”

“전혀.”

우찬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장포를 벗었다. 반듯하게 걸려있는 새 옷을 입으려는 모습을 보고 차란이 옷 시중 드는 궁녀를 들이려고 했지만 막았다. 느릿하게 상의를 다 꿰어 입은 뒤 던져두었던 칼을 찼다. 칼을 찰만한 복장이 전혀 아니었기 때문에 허리춤에 찬 칼집이 유독 눈에 띄게 도드라졌다.

때마침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린다. 걸음과 걸음 사이 규칙적인 간격과 여러 발소리가 하나처럼 들리는 통일감이, 태금궁 궁인들은 아니라는 걸 알려 주었다.

이설이 돌아오기까지 열흘. 시간은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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