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172화
비은궁의 대문을 뒤로하고 걸어 나온 우찬의 앞으로 금군 몇몇이 일사불란하게 자리를 정렬하고 섰다. 우찬은 꽉 조여 맨 왼쪽 손목을 만지작거리며 뒤를 돌아봤다.
한밤중의 비은궁 기왓장 위로 반 토막 난 달이 휘영청 밝게 비추고 있었다. 아름드리 진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비춰 들어오는 달빛이 아름다워 보이는 감상에는 젖지 않는다. 당분간은 그럴 여유가 없을 것이다.
“눈에 띄지 않게 담장 밖에서 감시하라. 수상한 자가 보이면 선 조치 후 보고하도록.”
“생포할까요?”
앞줄에 선 금군이 묻자 우찬이 비은궁 쪽에서 고개를 돌렸다.
“가급적 산 채로 끌고 와. 다만 연이설의 신변에 해가 될 경우에는 즉시 사살해도 좋다. 연이설의 안전을 최우선에 두어라.”
“예.”
우찬의 손짓에 물러난 금군들은 하나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금위대장이 매복에 특출 난 자들로 추려낸 자들이니 이설과 궁인들의 눈에 띄는 일은 없을 것이다.
금군 수십을 담장 밖에 둘러 세워 놓을 생각도 해 봤지만 그 광경을 본 이설이 겁먹어 옴짝달싹도 못 할 모습이 눈에 선해 관뒀다. 게다가 궁밖에 세워진 금군의 목적을 오해하기라도 하면 일이 더 골치 아팠다.
“연회는 완전히 끝났나?”
“예. 모두 처소로 돌아갔고, 궁인들만 남아 자리를 정리하는 중이라 합니다.”
“사신으로 온 이들의 거처는 모두 황궁 안에 마련되었느냐?”
“북방에서 온 이들에게는 따로 거처가 제공되지는 않았습니다. 그중 우 미인의 친정 부족에서 온 사신들만 우 미인이 자기 궁 안에 머물 곳을 마련해 준 모양이고요.”
선 채로 곰곰이 생각을 해 보던 우찬이 곧 복면을 눈 아래께까지 올려 묶었다. 얼굴의 반을 가리고 나니 함께 선 세 명의 호위군에 섞여 들어간 그저 네 번째 사내가 되었지만 확연하게 눈에 띄는 신체까지 숨기기는 역부족이었다. 호위군 대부분은 매복과 암살에 유리하기 위해 몸집이 작고 체구가 마른 편이니 차이가 더 심했다.
“금원으로 돌아간다.”
복면에 막힌 목소리가 그리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용케 알아들은 세 사람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찬이 먼저 자리에서 훌쩍 뛰어올라 사라지고 곧바로 두 사람이 그 뒤를 따라붙었다. 남은 한 사람은 인기척이 사라진 주변을 서성이며 누군가 몰래 다녀간 흔적은 없는지 살펴본 뒤에야 앞선 세 사람을 따라 사라졌다.
*
즉위 전에는 이따금 달밤의 산책을 나서기도 했다. 모두가 잠든 새벽 밤, 우찬이 어둠에 몸을 감추는 변복을 하고 궁 담장과 지붕 위를 날아다니듯 쏘다녔던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함께 훈련을 받았던, 지금의 호위군의 시초가 된 어린 훈련병 몇몇이 함께 따라나서곤 했지만 우찬의 속도와 체력을 따라잡기란 늘 역부족이었다. 한참을 달리다 뒤돌아보면 늘 우찬 혼자였다. 그나마 비슷한 역량을 가진 게 흑영 하나였다.
경공술이며 검술이며 좀처럼 무예를 펼칠 일이 없어 녹슬었던 것이 무색하게 몸은 여전히 가볍고 날렵했다. 황제가 안 되었다면 대대손손 이름을 떨칠 훌륭한 무관이 되었을 거라는 흑영의 말이 입바른 아첨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초대 황제 이후 무예에 재능 있는 사내가 끊겼던 금의 황가에 마침내 나타난 게 우찬이었다.
흑영은 내심 이 훌륭한 재능이 쓰일 곳이 없다는 것을 안타까워했고, 차란은 무관이 쓸모없는 나라야말로 태평성대의 정점이 아니겠냐며 반박했다. 우찬은 이러나저러나 아무 상관이 없었다. 전쟁은 성가시고 태평성대한 나라는 지루했으니까.
비은궁 대문 앞에서 사라진 우찬은 눈 깜짝할 새에 금원 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먼저 출발한 것을 감안해도 뒤이어 쫓아온 두 사람과의 차이가 제법 많이 나는 편이었다.
“차란은.”
우찬이 금원 한쪽에 보초를 서고 있던 호위군에 다가가 물었다. 어둠에 가려진 우찬을 한 번에 알아보지 못하고 눈을 가늘게 뜨고 유심히 바라보던 호위군이 이내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방금 전에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대답을 들으며 우찬은 복면을 다시 아래로 풀어 내렸다. 담에 젖은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복면으로 쓸어 닦으며 별채 뒤쪽으로 향했다. 쾌쾌한 먼지 냄새를 맡으며 들어간 안쪽 첫 번째 방은 떠난 그대로의 모습으로, 차란이 한 명 더 추가됐을 뿐이었다.
“비은궁을 다녀오셨다고요?”
연회 때 입은 차림새 그대로, 침침한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장신구를 두른 차란은 우찬을 보자마자 대뜸 소리를 높였다. 바깥으로 향하는 창이 없는 꽉 막힌 돌벽 안에서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울렸다.
“아직 일의 자초지종도 모르는데 이설 님을 만나 뭘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고작해야 연국의 통행패인데요!”
목소리가 점점 격앙되고 있는 걸 감지한 흑영이 차란을 말리려 어깨를 툭툭 건드렸지만 차란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통행패쯤이야 충분히 훔치거나 위조할 수도 있는 물건이라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이자들이 정말 연국의 도움을 받아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더라면 애초에 품에 지니고 있지도 않았겠죠. 세상에 어떤 머저리가 그런 멍청한 짓을 하겠습니까? 헌데도 폐하께서는 대체 이설 님을, 읏!”
차란의 행동이 슬슬 도가 지나친다고 생각했는지 흑영이 어깨를 밀쳐 둘 사이를 막아서려던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뒤로 밀려 나간 차란이 먼지 낀 돌벽에 등을 부딪쳤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먼지가 피어오르자 그 사이를 가르고 튀어 나간 우찬이 차란의 앞에 붙어 섰다. 팔꿈치를 접은 팔이 차란의 목을 짓누르며 압박을 가하자 둘 사이가 바짝 좁혀들었다. 괴롭게 찡그린 얼굴로 차란이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연이설을 뭐.”
음산한 기운이 짙게 깔린 낮은 목소리가 조용하게 윽박질렀다. 숨통이 조여든 차란이 입을 뻥긋거렸다.
“으읏, 폐……,”
“내가 대체 연이설을 어쨌다는 거냐.”
“폐하 이러다 승상께서 곧 숨이 넘어가십니다.”
금세 검푸르게 달아오른 얼굴로 얕은 숨을 꼴깍꼴깍하는 차란이 제 목을 짓누르는 우찬의 팔을 움켜잡았다. 우찬과 아무리 막역한 사이일지라도 옥체에는 함부로 손을 대지 않는 충성마저도 거스를 만큼 고통스러운 위협이었다.
무덤덤하지만 역시 당황한 티가 역력한 흑영이 다급하게 말리고 나서야 우찬은 서서히 팔에 실린 힘을 풀었다. 우찬이 뒤로 한걸음 물러서고 난 뒤에 차란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컥컥거리는 숨을 뱉었다.
“크허, 컥! 흐으…….”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짐승처럼 숨을 헐떡거리며 괴로워하는 차란을 보고도 우찬은 분노가 가시지 않아 피 묻은 천을 빨던 물이 담긴 동이를 거칠게 걷어찼다. 주둥이가 산산 조각나며 반으로 쩍 갈라진 동이 물이 콸콸 쏟아져 나왔다. 사체의 피를 닦아낸 헝겊을 빨던 동이의 물에서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순식간에 볏짚 깔린 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며 난장판이 되었다.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을 인정한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던 것이 겨우 차란의 말 따위에 수위를 넘어서 폭발하고야 말았다. 여태껏 차란이 무슨 건방진 소리를 했어도 흘겨보고 비웃고 마는 것에 그쳤었는데.
“말해 봐.”
분이 가시지 않는 듯 우찬은 무릎과 양손을 바닥에 짚고 아직 고통스러워하는 차란의 어깨를 발로 밀었다. 옆으로 휙 넘어간 차란의 몸이 젖은 볏짚 위에 풀썩 쓰러졌다.
“대체 내가 이설을 어떻게 했다는 건지.”
“……폐하께에, 하아, 폐하께서는 지금 이설, 님을…… 의심하고, 계시는 것 아닙니까.”
곧 죽어도 살려 달라, 실언하였다 소리는 하지 않는 차란이 켁켁거리는 와중에 할 말은 다 했다. 별 같잖은 고집에 혀를 내두른 우찬은 이 소란을 듣고 내려온 호위군들을 손짓으로 다시 올려 보냈다.
“내가, 이설을 의심한다고?”
“그렇지 않고서야, 금군을…….”
말을 하는 게 힘에 부치는지 차란이 헐떡이는 호흡으로 말을 자꾸 멈추었다.
“금군이 이설 님을 연행하여 비은궁에, 끌고 가는 걸, ……연회에 모인 이들 모두가 목격하지 않았습니까?”
차란에게서 등을 돌려 듣고 있던 우찬이 몸을 휙 돌아 세우며 미간을 찌푸렸다.
“금군은 이설을 호위하기 위해 붙인 것일 뿐, 다른 의도는 없다.”
“…….”
“내가 연이설을 의심하는지 묻고 싶은 거라면 대답해 주지.”
우찬이 바닥에 엎어져 있는 차란의 옷깃을 거칠게 그러잡아 당겼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난 차란을 다시 벽 쪽으로 강하게 밀어 던지듯 처박으니 역한 피비린내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힘없이 늘어진 차란이 치켜뜬 눈으로 우찬을 올려다봤다.
“연이설은 결백해. 한 치의 의심도 없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운 나쁘게 말려들었을 뿐이야. 이설은 이 일과 아무 관련이 없다.”
맥없이 풀린 손에 몸이 자유로워진 차란이 두 발로 자리에 버티고 섰다. 우찬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지긋이 바라보던 눈이 한번 느리게 감았다 뜬 뒤에는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오랫동안 가쁘게 물아 쉬던 호흡이 겨우 진정되었다. 쇳소리로 가느다랗게 주제넘게 행동하여 죽을죄를 지었다며 머리를 푹 숙이는 꼴을 외면하고 등을 돌렸다.
깨진 동이에서 흘러넘친 물이 바닥에 누워 있던 사체 두 구에도 스며들었다. 가뜩이나 역겨운 피비린내가 찬 공간에 슬슬 참을 수 없는 악취가 나기 시작했다. 우찬과 차란 그리고 호위군만이 아는 이 은밀한 장소는 이런 용도로 활용하기에 안성맞춤이었지만 공기가 잘 통하지 않는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차란과 마찬가지로 잠시 호흡을 고르던 우찬이 가까스로 분을 삭였다.
“이 통행패는 연국에서 발행된 게 맞아. 연국을 거쳐 회국으로 넘어가는 이민족들에게 발행된 것이라고 하니 연국인이 소지하고 다니는 물건은 아니야.”
우찬은 이설에게 전해 들은 말을 그대로 전하며 품에서 꺼낸 목패를 사체 위에 던졌다.
“이설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다. 그럴 이유가 없어.”
“그렇게 생각한 적도 없습니다.”
숨을 고른 차란이 툴툴거리는 말투로 옆으로 다가와 손을 털었다. 언제 누굴 위협하고 위협받았다는 양, 두 사람은 감쪽같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얘기를 주고받았다.
“정리해 보면 이 모든 사건의 시작은 북방 이민족입니다. 나덕산에서 폐하를 시해하려 한 것부터 황궁에 숨어들어 온 것까지. 전부 이민족관 관련된 일입니다. 하물며 시기적절하게 나타난 무암궁의……, 그분께서도 하필 북방 출신이고요.”
“그간 황궁의 썩은 이를 뽑아내느라 국경 밖의 일에 너무 소홀했군.”
“그동안 문제없이 잠잠했으니까요. 설마하니 이런 일을 꾸미고 있을 줄은…….”
“이런 일이란 게 뭐지, 차란?”
다 알고 있는 표정으로, 비웃듯 묻는 우찬에게 차란이 비장하게 대답했다.
“반란입니다, 폐하. 이제 전쟁을 준비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