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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170)화 (170/300)

달의 황홀경

170화

*

가마 바깥으로 발을 내디딘 이설을 부축하는 연화가 손을 덜덜 떨었다. 몸을 돌려 가마 뒤편까지 둘러본 이설 역시 마른침을 삼켰다가 아랫입술을 물었다. 어두운 밤의 장막에 희미하게 가려진 금군의 모습이 멀리까지 보였다.

뭘 모르는 사람이 봐도 단순히 이설을 호위하기 위해 이 많은 인원을 따라붙게 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광경이었다.

“안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가마 가까이 서 있던 금군이 다가와 말했다. 연화가 움찔 놀라며 이설의 팔을 안아 제 쪽으로 당기는 바람에 이설이 휘청거렸다.

“여기까지면 충분합니다. 이만 돌아가세요.”

“침소까지 모셔다드리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폐하께서 직접 말씀하신 건가요?”

“예.”

이설이 시선을 낮게 내리깔았다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는 연화에게 붙들린 팔을 빼고 말없이 혼자 앞장서 걸었다. 그 뒤와 옆을 에워싸고 금군 몇몇이 따라붙었다. 호위를 받는 건지, 죄인 된 신분으로 호송되어 가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침소 앞에 다다르자 주 상궁이 문을 열어 주었다. 곧장 안으로 들어가지 않은 이설이 뒤를 돌았다.

“먼저 들어가 보시죠.”

“마마께서 들어가시는 것만 확인하면 됩니다.”

“제 처소를 수색해 보라는 황명은 없었습니까?”

상냥한 말씨에 어딘가 비꼬는 것이 역력한 이설을 보고 금군이 일순 당황하여 그런 명령을 전달받은 적 없다며 말을 얼버무렸다.

이설이 주 상궁과 침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금군이 모두 물러갔다. 늦은 밤 무장한 금군 여럿이 복도를 빠져나가는 소리가 위협적으로 들렸다. 칼집이 갑옷에 부딪히며 나는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궁녀들이 들어와 이설의 치장을 벗겨 주었다. 다들 이설에게 말을 걸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면경에 비친 무거운 표정을 보며 할 말을 꾹 참는 눈치였다.

목간에서 목욕까지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이른 새벽 일어나 몸단장을 하고 제를 드린 것부터 사의시를 들렀다 연회까지. 몸이 고단한 이유가 있었다. 맘 같아서는 이대로 한숨 푹 자고 싶었다.

“마마, 기연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응. 들어오거라.”

이설이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기연을 들였다. 전 같았으면 옷고름 어디가 풀어졌든 말든 상관도 안 했을 텐데 요즘 들어 이런 사소한 것들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하루 내내 고단하셨을 텐데 이만 쉬지 않으시고,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습니까?”

“물을 게 있어 불렀어.”

기연을 맞은 이설이 자리에 일어나 탁자 위에 큰 종이를 넓게 펼쳤다. 그린 모양은 형편없지만 자세히 보면 필요한 건 다 그려진 제법 쓸 만한 지도였다. 조금만 들여다봐도 어느 지역을 그린 건지, 알 만한 사람은 한눈에 알아봤다. 지도 위 붉은 염료로 길게 그린 선이 끝나는 지점에는 아마 연의 궁이 있을 터였다.

“이건 연국 지도 아닙니까? 마마께서 직접 그리신 것입니까?”

“응. 여기서 찾은 연국 지도는 다 오래전에 그려진 것들이라 별로 정확하지가 않더라고.”

연국 일대는 화전민이 많고 이따금 산사태도 드물게 일어나는 편이기 때문에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길이 수년마다 바뀌었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연국 궁 안에서만 살았던 이설조차도 금국에서 찾은 연국 지도를 보고 고개를 저을 정도였다.

“아직 이 근방에 연국 군사가 남아 있을까?”

“여기 회국과의 국경을 따라 동쪽으로는 아마 그럴 겁니다. 이 아래에 바로 화전민촌이 있어 식량을 조달받기가 쉽거든요.”

“여기서부터 우리 궁까지는 사흘쯤 걸리려나?”

“넉넉잡아도 이틀입니다. 이쯤 가파른 산턱 하나만 넘으면 교역꾼들이 다져 놓은 지름길이 있습니다.”

지도를 유심히 들여다보던 기연이 엉망진창으로 그려진 그림 한 부분에 교차하는 선 두 개를 그려 표시했다. 이설은 좋은 정보라도 들은 양 손뼉을 짝 맞추고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던 기연이 ‘저, 마마’ 하고 조심스레 이설을 불렀다.

“이 지도는 무얼 하시려 그리신 겁니까?”

“척 보면 알지 않겠어?”

“그걸 알겠으니 여쭤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설마 제가 염려하는 것은 아니리라 믿습니다.”

“기연이 네가 염려하는 것이 무엇인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기연과는 달리 이설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에 가벼운 미소까지 지은 채로 장난스레 되물었다. 더운물에 데워진 몸이 녹진하게 의자 위에 내려앉았다. 그리고는 턱을 괴고 고개를 기울이자 젖은 머리카락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마마께서 그렇게 농을 하시는 게 저는 무척 낯섭니다.”

“나야 늘 이랬는걸.”

“연국에서야 그러셨죠. 그것도 벌써 오래전 일입니다.”

“…….”

“그러니 이만 말씀해 주십시오. 연국으로 가는 지도는 어찌 그려 놓으신 겁니까?”

도통 장난이나 농담이 통하지 않는 기연에게 입술을 삐죽인 이설이 뻑뻑한 눈가를 문지르며 일어났다. 자꾸만 앞섬이 벌어지는 웃옷의 허리띠를 꽉 졸라맨 뒤 지도를 반으로 접어 덮었다.

“연국에 잠시 다녀와야 할 것 같아.”

“방법이 없으실 겁니다.”

예상치 못한 얘기도 아니었고, 처음 듣는 얘기도 아닌지라 기연이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설은 그 대답이 이해가 고개를 끄덕였다가 다시 가로 저었다.

“아주 없는 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그게 무엇인지 제게도 말씀을 해 주셔야,”

탁탁탁, 발소리가 요란하다. 직감적으로 안 좋은 소식을 예감한 이설이 입가에 띤 미소를 지우고 고개를 휙 돌렸다. ‘마마’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단향의 등장에 기연이 인상을 팍 찌푸리며 무엄하다 한소리를 크게 하였지만 단향은 들은 척도 않고 한걸음에 달려 들어와 기연을 일으켜 세웠다.

“지금 밖에, …하아, 밖에 폐하께서!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지금 말이냐?”

“예! 이쪽으로 오고 계시는 중입니다. 폐하께서 아주 몰골이 아휴, 아니 그…… 아무튼, 얼른 이리 나오세요!”

허둥지둥 정신이 하나도 없는 단향은 말을 전하랴 자리에 꿈쩍도 않는 기연을 끌어내느라 바빴다. 횡설수설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밖에 황제가 왔다는 말은 정확히 알아들었다.

“이 야심한 밤에 마마 침소에 외간 사내가 함께 있는 걸 보시면 큰일도 그런 큰일이 없습니다. 얼른 나오시라고요, 기연 님!”

그제야 단향의 의도를 눈치챈 기연이 얼른 칼을 집어 들었다. 단향을 따라 나가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설을 한 번 돌아봤지만 이제는 악다구니를 써가며 팔을 잡아당기는 단향 때문에 이렇다 할 말 한마디도 못 하고 사라졌다.

쿵 하고 닫히는 문을 허망하게 바라보던 이설은 잠시 후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에 짧은 숨을 토하며 문 앞에 섰다. 곧 기별도 없이 장지문이 양옆으로 벌컥 열렸다.

“오셨습니까.”

“오는 줄 알았느냐.”

“오시는 걸음 소리가 저기 대문부터 들렸나이다.”

실없는 소리를 하는 이설은 웃음기 없이 담담히 말했지만 속으로는 내심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참이었다. 온통 시커먼 복장을 하고 들어오는 우찬의 모습이 어릴 적 몰래 읽던 설화의 야차의 현신 같았다. 희미하게 풍기는 피비린내와 쾌쾌한 먼지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니 몽롱한 정신이 꿈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처럼 멍해졌다.

“별 헛소리를 다 하는군.”

이설을 스쳐 지나간 우찬이 조금 전까지 기연이 앉았던 의자 옆에 섰다. 어떻게 봐도 누군가 앉았다 일어난 자리가 분명해 보이는 의자의 위치를 눈치채고 아차 싶었다. 우찬이 누군가 다녀갔는지 묻는다 해도 거짓말을 할 생각은 절대 없었지만 오고 갈 대화에 벌써 숨이 막혔다.

“이리 와서 앉지 않고 뭘 해.”

하지만 우찬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처음부터 제 자리인 것처럼 익숙하게 앉아 손짓하자 이설도 내심 안도했다.

“밤이 깊었는데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내가 오면 안 되는 곳을 오기라도 한 것처럼 들리는데.”

“근래 통 오시지 않으셨던 분이 갑자기 이 밤중에 찾아오시니 궁금하여 그렇습니다.”

이설이 심드렁히 대답하며 우찬에 앞자리에 앉았다. 우찬이 앉으라는 말을 먼저 하지 않으면 빈 의자를 옆에 두고도 꼼짝하지 않던 예전에 비하면 무척 대담한 행동이었다. 우찬에게 별로 거슬릴 만한 행동은 아니었는지 자리에 앉은 이설을 한 번 흘끔 쳐다본 뒤에는 탁자에 종이를 들추며 성의 없이 대답했다.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하문하십시오.”

그다지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우찬이 이내 탁자 위 종이들에 관심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품에 손을 넣어 꺼낸 물건을 이설의 앞에 툭 던지듯 내려놓았다. 역하게 올라오는 피비린내에 미간을 찌푸린 이설은 군데군데 묻어 있는 핏자국이 신경 쓰여 만지고 싶지 않았지만 우찬이 제게 던져 준 것이, 한번 들여다보라는 의미인 것 같아 조심스레 집어 올렸다.

“이게 무엇입니까?”

“그건 네가 더 잘 알지 않느냐?”

“제 말은 연국의 통행패를 왜 폐하께서 제게 주시는지 여쭤본 것입니다.”

“그게 연국에서 발행된 것은 분명하단 말이냐?”

순간 복잡한 일에라도 말려든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 와서 거짓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이설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목패 뒤에 각인으로 봤을 때는 그렇습니다.”

위조된 목패가 암암리에 이민족들 사이에서 돌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긴 하지만 구태여 얘기해 줄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말을 아꼈다.

“폐하께서는 이 통행패를 어디서 찾으신 겁니까?”

“알 거 없다.”

“소매에 묻으신 핏자국은 이 통행패 주인의 것입니까?”

담담히 묻는 이설의 말을 듣고 우찬이 오른손을 들어 소매를 확인했다. 검은 의복이라 잘 티는 나지 않지만 유난히 색이 짙은 얼룩은 얼핏 봐도 핏자국이 분명했다. 소매뿐만 아니라 옷 여기저기에 마른 얼룩이 얼룩덜룩하게 묻어 있었다. 고약한 피비린내의 원흉일 것이다.

“그런 셈이지.”

“폐하께서도 다치셨습니까?”

우찬에게 피 냄새가 풍길 때부터 가장 먼저 묻고 싶었던 것을 결국 참지 못했다. 다친 곳은 없어 보였지만 그래도 보는 것만으로는 걱정이 가시지 않았다.

우찬에게 분명 화가 났는데, 피를 흘릴 만큼 다쳤을 거라고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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