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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169)화 (169/300)

달의 황홀경

169화

“마지막 차례입니다. 편국 제하성 북편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인데 장성한 사내 대부분이 금의 국경 수비대로 차출되어 있습니다. 저희 금에는 무척 호의적이나 편국과는 사이가 좋지 않은 편입니다.”

윤 내관이 속삭이는 말을 귀 기울여 듣던 이설은 드디어 막바지에 다다른 연회에 안도하며 어깨에 힘을 풀었다. 긴 시간 긴장했던 몸의 한 부분 한 부분이 느슨해지며 입술 새로 더운 숨이 길게 흩어져 나왔다.

“올해 참석한 이민족은 모두 몇이지?”

“여섯입니다.”

“작년에는.”

“아마 아홉쯤이었을 겁니다.”

“그 전해에는 아마 열두셋쯤 됐겠군.”

“해마다 줄어드는 추세이기는 합니다.”

“내가 즉위한 이래로 말이지.”

윤 내관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침묵으로 그 사실을 증명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설은 두 사람 얘기에 관심 없는 척 불놀이나 쳐다보고 있었지만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금국의 초대 황제가 영토 확장 전쟁으로 혼란스러웠던 대륙을 무력으로 평정한 뒤 수많은 이민족이 금 앞에 무릎을 꿇었다. 걸핏하면 남쪽 땅에 침략과 약탈을 일삼던 이들이 변방으로 쫓겨난 뒤 수십 년이 세월이 흘렀다. 금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속수무책으로 밀려 일족이 몰살당하고 맞서 싸우던 사내 수백 수천이 죽어 나갔던 것을 직접 목격했던 세대들은 모두 사라졌다. 모든 일은 이제 구전으로만 전해졌다.

초대 황제가 피바람을 일으킨 이후로 금의 황제들은 대체로 이민족에 대해 온건한 정책을 유지했다. 문제는 곧바로 일어나지 않았다. 반역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속도로, 눈에 띄지 않는 규모로만 간간이 나타났다. 지금껏 어느 황제도 이를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애초에 그럴 만한 중대한 사안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쯤, 이설도 정도를 벗어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하하는 이민족들의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었고, 일반 백성들이 입는 피해도 상당히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항간의 떠도는 얘기로는 전쟁을 직접 겪어 보지 못한 우찬을 얕잡아 보기 때문이라고, 기연이 조심스레 귀띔해 주었다. 우찬은 가끔씩 이민족의 약탈이 일어나는 것만 빼면 태평성대의 정점을 누리고 있는 금을 물려받아 통치하고 있다. 후세는 우찬을 성군으로 기억할 수는 있겠지만 강력한 군권을 휘둘렀을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할 것이다.

그 증거로 해마다 북쪽에서 금으로 들어오는 공납의 질과 양이 떨어지고 있다. 혼인 등의 동맹으로 강력한 충성을 맹세한 몇몇 부족을 제외하고는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공납을 소홀히 하기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찬은 이 또한 문제 삼지 않았다. 간혹 대신들이 이를 엄히 다스려야 한다 목소리를 높여도 별말 없이 넘어가기 일쑤였다.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북쪽에서 들어오는 공납은 벌써 수년 전부터 꾸준히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윤 내관은 뒤늦게 고개를 저었지만 금의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이설이라도 쉽게 수긍하기 힘든 변명이었다.

“야만스러운 것들은 하여간 적당히를 몰라.”

경멸로 중얼거리는 말소리에 뜨끔한 이설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우찬은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 어느 지점을 바라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간 그 눈빛에 좋은 의도가 담겼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조금만 풀어 주면 항상 도를 지나친단 말이지.”

“…….”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 설아.”

말과 달리 한 박자 느리게 옆으로 기울어지는 얼굴이 불쑥 물었다. 이설은 어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잠자코 앉아만 있었다.

“이만 일어나야겠다.”

“태금궁으로 모실까요?”

“일단은.”

우찬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악공들의 주악이 멈추고 아래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위로 쏠렸다. 그리고 곧 약속이라도 한 듯 따라 일어나려 하였지만 우찬이 손짓하자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기름을 먹여 불붙인 나무 막대기를 공중에 던지며 묘기를 부리던 이들이 재주 부리던 것을 멈춘 것도 계속 이어 하라는 듯 부드럽게 손짓했다. 다시 주악이 시작되며 장내가 소란스러워졌고 시선들은 본래 향하던 곳으로 돌아갔다.

잠시 고민하던 이설도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우찬이 다가왔다.

“연회가 끝나면 금군이 호위할 테니 곧바로 비운궁으로 돌아가거라.”

“호위는 괜찮습니다. 가는 길은 제 호위무사가 함께할 것입니다.”

낮에 황궁 밖에서 볼일을 보고 들어온 기연이 저 아래에서 이설을 모셔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연회가 이어지는 며칠 내내 황궁에 바깥손님이 자주 드나드는데, 이럴 때야말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며 주 상궁은 기연에게 호위무사로서의 직무를 소홀히 하지 말라 충고했기 때문이다.

“시키는 대로 해. 연회가 끝나는 대로 금군과 함께 궁으로 곧장 돌아가.”

“궁에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없다.”

혹시나 싶어 조심스레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예상했던 대로다.

“너는 알 필요도, 들을 필요도 없는 것이야.”

“저를 그렇게 꼭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로 만드셔야 하겠습니까?”

“그게 가능하다면 차라리 그러고 싶군.”

“폐하. ……금군은 저를 호위하기 위함입니까, 아니면 저를 감시하기 위함입니까?”

이설은 침착하게 물었고 우찬은 동요하지 않았다.

뭔가 짚이는 것이 있어 떠보는 것은 아니었다. 오늘 하루 종일 답지 않게 변덕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우찬이었기 때문에 이 역시 그러려니 넘어갈 수도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이설 역시 이렇게 직접적으로 화제를 돌리는 것은 피했을 것이다.

이설은 그냥 요즘 자신이 너무 이상해졌다고, 문득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후회가 되지 않았다.

“금군은 황명을 따르는 자들이다. 내가 그들에게 너를 감시하라 일렀을 것 같으냐?”

“잘 모르겠습니다. 폐하께서 직접 답해 주시옵소서.”

이설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것이, 멀리서 보면 마치 애틋한 대화라도 나누는 것처럼 보일 듯했다.

말없이 이설을 한참 바라보던 우찬이 먼저 등을 돌렸다. 결국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한 이설은 황명에 대담하게 질문을 던진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다만 어쩌면 자신도 답을 알고 있는 괜한 질문을 한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

소청각에서 태금궁으로 곧장 돌아간 우찬은 일찍이 잠자리에 들었다. 윤 내관은 오늘 밤 우찬의 침소 앞에서 시중을 들기 위해 서 있는 궁녀들을 보내고 여간해서는 밤을 새우는 일을 맡지 않는 상궁 둘을 대신 세워 놓았다.

두 상궁은 침소 앞을 지키고 서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안쪽에서 덜거덕 뭔가 떨어지는 소리에 서로 눈이 마주쳤다. 마침 그 앞을 지나던 숙위 중인 금군이 무슨 일이 있느냐 묻자 두 사람이 태연한 얼굴을 돌렸다.

“아니. 아무 일도 없네.”

그 무렵 우찬은 금원 한복판을 지나고 있었다. 검은 밤 아래 입고 있는 새까만 색의 복장 탓에 수풀 밟히는 소리가 아니면 누가 금원을 지나고 있는 줄도 모를 일이었다. 급하게 나오느라 연회 때 해 둔 머리 장식이 그대로였는데 창문에 걸려 장신구 하나가 목각함 위로 떨어졌다. 풀어헤친 머리카락이 바람에 길게 흩날렸다.

“오셨습니까.”

“흑영은.”

“안에 계십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금원 깊숙이 들어간 우찬이 걸음을 멈춘 곳은 목자재로 높게 올린 별채였다. 언젠가 이설이 금원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보여 주었던 곳이다.

우찬을 마중 나왔던 호위군을 따라 우찬이 다시 걸었다. 버젓이 보이는 입구를 두고 별채의 뒤쪽을 향한 두 사람은 허름한 쪽문을 열고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쾌쾌한 먼지 냄새가 풍기는 안쪽 복도는 벽 중간마다 희미한 횃불이 밝히고 있었는데 그 길을 쭉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앞서 걷던 호위군이 첫 번째로 마주친 방의 문을 열었다.

녹슨 경첩의 삐그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열린 문 너머는 복도 바깥보다는 불의 밝기가 환했지만 지하 특유의 눅눅한 불쾌함이 온몸을 엄습했다. 오랜만에 찾은 곳이었지만 몸의 감각은 이곳을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이것들이냐.”

우찬이 안으로 들어서며 바닥에 놓인 두 구의 사체를 보며 물었다. 흑영이 그렇다 대답하며 횃불로 사체 위를 밝혔다.

한 구는 가슴 부근에 출혈로 의복이 흥건이 젖었고, 다른 한 구는 의복은 비교적 깨끗하나 얼굴색이 거무죽죽하게 안쪽에서부터 썩어 있었다. 유심히 들여다보면 우찬이 발끝으로 거뭇한 얼굴을 툭툭 걷어찼다.

“자결인가?”

“예. 달아나던 중 입에 물고 있던 독초를 씹고 즉사하였습니다.”

“저건?”

“급습에 당황하여 바로 급소를 공격한 것 같습니다. 송구합니다.”

흑영이 데려간 호위군 중 하나가 쓸데없는 순발력을 발휘한 모양이다. 훈련이 너무 잘되어 있어서 곤란하게 됐다. 적당히 불구만 만들어 데려왔으면 일이 좀 쉬웠을 텐데.

우찬은 신경질적으로 사체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 다시 설명 좀 해 봐.”

“무암궁 별채를 뒤지던 중 이자들이 갑자기 급습하였습니다. 추후 살펴보니 매복하던 자들은 아니고 저희가 별채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 후 뒤쫓아 온 듯합니다.”

흑영이 한쪽 손으로 횃불을 밝히며 자리에 쪼그려 앉아 사체 옷을 들쳤다.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된 수많은 흉터가 가슴과 배에 빼곡했다.

“고도로 훈련된 자들입니다. 일반 군에서 배울 수 있는 기술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작정하고 공격한 것을 한 번에 막아 냈으니 훌륭하다 칭찬을 해 줘야 할지 모르겠군.”

드물게 당황하는 흑영을 모르는 척하고 우찬이 자결한 사체 옆에 앉았다. 직접 의복 안에 손을 넣으려고 하자 흑영이 대신하겠다는 듯 손을 내밀었지만 무시했다.

“사체는 모두 수색했지만 전해 드렸던 것 말고 특별한 것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건 어디에 있느냐. 내가 한번 봐야겠다.”

거뭇한 먼지가 묻은 손을 툭툭 털어 내며 우찬이 일어났다. 여기까지 우찬을 안내한 호위군이 구석에 있는 나무 탁자에서 손바닥만 한 목패를 검은 천에 싸서 가져다주었다. 모서리가 헤지고 군데군데 피가 묻은 목패는 국경을 넘는 통행 시 사용하는 것으로 보였다. 금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금은 구리 패를 사용하는 게 보통이다.

“이걸 몸에 지니고 있었다고?”

“예.”

흑영이 즉각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찬은 손에 들린 목패를 가만히 쳐다보다 바닥에 누인 두 사체를 번갈아 봤다. 쾌쾌한 먼지 냄새는 익숙해질 줄 모르고 심기를 자극했다.

“그러니까 흑영 네 말은, 무암궁 별채에 침입한 자들이 연국에서 발행된 통행 호패를 가지고 있었다는 거잖아, 지금.”

“…….”

“빌어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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