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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168)화 (168/300)

달의 황홀경

168화

“왜 그런 말씀을…….”

밋밋하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얼굴에 돌연 균열이 생긴 것처럼 당혹감이 번졌다.

“제 기분 따위가 폐하께 어찌 중하시다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러니 말이야. ……네 기분 따위가 뭐라고.”

“…….”

“거봐라. 지금 또 내 말에 네 기분이 상한 것 아니냐.”

‘네 기분 따위가 뭐라고’ 하며 혀를 쯧, 하고 차자 일순 서운한 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난 이설을 보고 우찬이 제 말이 맞지 않냐는 양 짧게 비웃었다.

“됐다. 말 걸지 않을 테니 마저 보거라.”

마저 보기는 무슨. 눈에 들어오던 게 있을 리가 없는데 사람 마음도 모르고 태평한 소리를 하는 우찬에게 울컥 심통이 터졌다. 마주 보는 이가 누군 줄도 모르고 흘겨보는 눈을 했다가 곧바로 거두고 고개를 돌렸지만 억울한 마음이 쉽사리 가시지는 않았다.

아침나절 내내 퉁명스러웠던 황제다. 이설 자신도 썩 고분고분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우찬이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만 생각하면 서러운 마음을 말로 다 표현하기도 힘들었다. 근데 이제 와서 제 기분을 걱정해 주는 척 한마디 툭 내뱉는데 그마저도 억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경국 경 왕가의 하나뿐인 자인공주입니다. 올해 봄 초 경국에서 정밀하게 측량하여 보낸 나주산맥의 지도 덕분에 나주산을 가로질러 군수품을 조달하는 방법이 한결 수월해졌습니다.”

연회를 축하하기 위한 물건들을 싣고 각국 사절단이 들어올 때마다 윤 내관이 우찬의 뒤에 서서 소곤소곤 말을 속삭였다. 그러면 경연이 끝난 뒤 우찬은 그에 걸맞은 적당한 하사품을 골라 친히 내려 주었다. 우찬의 말이 끝날 때마다 황은이 망극하다며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각국의 사신들을 보는 것도 슬슬 지겨워질 무렵 다시 주악이 울렸다. 이번에는 검무를 추는 여인들이었다.

넋을 놓고 바라보던 이설은 앞으로 남은 모든 생을 검무에만 몰두해도 자신은 절대 저런 춤을 선보일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새삼 상기하며 숨을 토했다. 발이 퉁퉁 붓도록 연습한 노력이 아깝고, 시간을 내어 준 우 미인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돌이켜 보면 우찬과 사이가 좀 틀어졌다고 해서 기껏 연습했던 검무를 내팽개칠 이유가 없었다. 핑계라면 그저 다 핑계였다.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남의 검무에 시선을 빼앗긴 어느 순간, 불쑥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검무 연습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지?”

“…….”

“저 정도는 바라지도 않아. 그래도 연회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창피는 당하지 말아야 할 거 아닌가.”

“지금 저에게 하시는 말씀이셨습니까?”

“허면? 여기 검무 연습을 하는 이가 누가 또 있다고.”

우찬이 어디 한번 둘러보라는 듯이 턱을 치켜들었다가 내렸다. 굳이 둘러보지 않아도 뻔하지만 얼떨결에 이설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뒤에 바짝 붙어선 윤 내관과 그 옆에 상궁, 한걸음 뒤에 복면을 쓴 사내 두 명이 전부였다.

검과 함께 휘날리는 여인들의 쪽빛 소맷자락만 하염없이 보고 있던 이설이 도통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우찬을 봤다.

말 걸지 않겠다 할 때는 언제고, 또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건다. 게다가 검무라니.

“검무 연습은 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그대가 이번 연회의 마지막에 검무를 선보일 거라고 벌써 소문이 자자한데.”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을!

후궁들끼리 모여 각자 어떤 경연을 선보일지 패를 뒤집었을 때도 이설은 뒤로 물러나 있었다. 모두들 우 미인 혼자 독무를 추는 것으로 알고 있었을 텐데, 누가 그런 소문을 냈다는 건지 모르겠다. 굉장히 난처해졌다.

“아주 열심이었잖아. 검무복까지 차려입고 혼자 연습할 만큼.”

우찬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가만히 생각해 보던 이설은 순간 화르르 불타오르는 얼굴을 손등으로 가렸다. 갓 지은 검무복을 입고 침소에서 혼자 청승을 떨던 날 우찬이 기별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친 것이 이제야 생각났다. 못 봤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구태여 입에 올릴 일이라고 생각지도 않았다.

“어찌 대답이 없느냐?”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검무 연습은 이제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내 묻지 않았느냐. 어째서냐고.”

“제 실력으로 검무는 무리입니다. 폐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연회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당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더 이상 웃음거리가 되고 싶지도 않고요.”

더는 설명할 것도 없다는 듯이 이설이 딱 잘라 말한 뒤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검 두 개를 휘두르는 여인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허공을 날아다니다시피 춤을 추고 있었다. 아무렴, 제까짓 게 평생을 해도 저리 될 수는 없을 거다. 가뜩이나 황궁에서 받는 취급을 생각해 봤을 때 검무 따위는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을 테다.

“창피야 좀 당할 수 있겠지만 누가 너를 웃음거리로 여긴단 말이냐.”

제법 낮아진 목소리의 음이 둥둥거리는 북소리 사이로 스며들어 왔다. 귓전을 똑똑히 울린 말소리를 분명 들었지만 이설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고 의미 없는 시선만 멀리 허공에 보냈다. 그런 의도가 아니란 걸 아는 데도, 우찬이 하는 말이 꼭 어느 때라도 제 편을 들어 주겠다 말해 주는 것 같아 괜한 기대감이 들었다.

우찬은 다시 입을 닫았고 곧 여인들의 검무가 끝났다. 그리고 곧바로 가면을 쓴 사내 몇몇이 말을 타고 나타났다. 말 위에서 부리는 진기한 묘기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의복을 보아하니 저들이야말로 북방에서 온 진짜 이민족인가 보다.

보지 않으려고 애썼던 것이 무색하게 슬그머니 돌아간 시선이 멀리 한 여인에게 닿았다. 그리 지루하지도, 즐거워 보이지도 않는 얼굴은 마치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곧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여인은 하염없이 우찬 하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여인의 시선을 따라서 이설도 천천히 고개를 돌려 우찬을 봤다. 우찬은 이설이 고개를 돌릴 때마다 그랬듯 아직도 이설을 쳐다보고 있었다.

“왜. 이제야 대답할 마음이 생겼느냐.”

누가 웃음거리로 여기겠냐고 했던 것이 정말 대답을 바라고 했던 질문이었던 건가. 그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이설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폐하. 존체는 여전히 무탈하시옵니까?”

“뭐라?”

“근래에 존체 무탈하시온지 여쭸습니다.”

때마침 커지는 북소리에 묻혀 듣지 못했나 싶어 이설이 목소리를 키웠다.

“혹 잠이 많아지셨다거나 머리앓이가 더 심해지셨다거나 하는 일은 없으시옵니까?”

“고작 그것이야?”

“무엇이 말입니까?”

“내내 한 소리도 하지 않고 목석처럼 앉아 있다 겨우 묻는 것이라는 게 존체 무탈하시냐고.”

어처구니가 없는 듯 코웃음을 두어 번 치던 우찬이 이내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연거푸 술잔을 비웠다. 쉬지 않고 술을 따르던 상궁은 병이 비자 얼른 손짓하여 다른 궁녀에게 새 술병을 가져오게 했고, 그제야 우찬이 잔을 내려놓았다.

“내게 그리 궁금한 것이 없느냐?”

“가장 궁금한 것을 여쭤본 것입니다.”

“바로 오늘 아침 그 일을 겪고서도 가장 궁금한 것이 내 안부라고?”

“예. 그러니 어서 대답해 주세요. 근래 존체에 아무 탈이 없으셨던 것 맞습니까?”

우찬이 학은 뗀다는 듯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실망을 금치 못하는 그 얼굴에 약간 침울해지기는 했지만 이설은 결연한 눈빛을 거두지 않고 ‘폐하’ 하고 대답을 재촉했다.

“무탈하다. ……네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으면 좋겠군.”

모호한 대답은 저를 비꼬려고 하는 것이다. 이설도 지지 않고 태연하게 되받아쳤다.

“무척 마음에 듭니다.”

“…….”

“제가 괜한 걱정을 했었나 봅니다.”

“무슨 걱정을 했느냐. 혹 내가 단명하여 네가 영영 연국으로 돌아가지 못할까 걱정이라도 한 것이냐?”

순간 이설은 누군가 우찬의 말을 들었을까 싶어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다행히 윤 내관과 상궁은 두 사람의 대화가 길어지자 뒤로 물러난 참이었고 주변이 시끄러웠다. 경험한 바에 따르면 호위군들은 귀가 밝은 편이라 들었을 거라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어차피 저들이야 우찬의 눈과 귀를 공유하는 셈이었으니 논외였다.

“그런 생각, 추호도 한 적 없습니다.”

이설이 우찬을 똑바로 쳐다보며 분명하게 대답했다. 억울하다 못해 원통하기까지 한 그 마음을 억누르며 한 박자 쉬고 떨어지는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우찬도 봤으리라.

“바로 폐하의 그런 오해가 저를……,”

“폐하.”

바로 지금의 이 기분을 설명해 줄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해 말을 잠시 멈춘 찰나, 우찬이 뒤에서 차란이 나타났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듯 느긋한 걸음에 평상시의 여유로운 웃음을 걸친 그대로였지만 미묘하게 일그러진 입술 곡선이 웃는 얼굴에 자연스럽게 어울리지 못했다.

“폐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차란이 부르는 것을 알면서도 이설만 응시하던 우찬이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이설의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던 차에 차란까지 나타난 것이 굉장히 불쾌한 모양이었다.

우찬을 찾은 것이 무척 급한 사안이었는지, 차란은 바로 옆에 있는 이설에게는 인사차 눈길 한 번도 주지 않고 우찬의 귓가로 허리를 깊이 숙였다. 북소리가 울려 짧은 단어조차도 들리지 않았지만 이설은 두 사람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연회 중 차란이 우찬에게 말을 전하는 것이 별로 큰일이라고 여기지도 않는 듯 흘끗거리며 쳐다보기는 했지만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저들 중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보는 것은 사신단 끝자락에 앉은 여인 한 명뿐이었다.

잠시 후 차란이 허리를 세웠다. 웃고 있었지만 주변을 의식한 표정이 확실했다. 우찬은 주변을 의식하여 일부러 애를 쓰는 것인지, 아니면 차란의 말이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었는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리고 잠깐 시선을 아래로 던졌다가 묻는다.

“……증좌는.”

“아직 부족합니다.”

“흑영은 어디에 있지?”

“사체를 수색……,”

“알았다.”

즉각 대답하던 차란이 이제야 이설을 발견했다. 이미 중요한 말은 다 들은 시점이라 말을 끊는 것도 소용없었지만 이설은 모른 척 가볍게 웃으며 눈인사를 했다. 차란도 예를 갖추고는 상궁에게 술병을 건네받아 이설의 잔을 채워 주었다. 멀리서 본다면 이상할 게 전혀 없는 광경이었다.

“일단 자리로 돌아가. 흑영이 일을 마무리할 때까지 괜한 의심 살 만한 짓은 하지 않도록 해라.”

우찬은 빈 잔에 술을 채워 차란에게 주었다. 차란은 단번에 잔을 비운 뒤 아래로 내려가 마련된 자리에 앉아 기마 묘기를 선보이는 사내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 중 아무도 두 사람의 대화를 궁금하게 여기는 것 같지 않았다.

높은 곳과 낮은 곳에 각각 따로 떨어져 앉은 연이설 두 사람만 제외하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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