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167화
연화와 화홍이 번갈아 가며 가마꾼을 재촉한 덕에 소청각에는 제시간에 딱 맞게 도착했다. 연화의 부축을 받아 가마 안에서 내려오자 마침 같은 시간에 도착한 양 소원이 가마에서 내려 인사를 전했다. 적당히 받아주고 먼저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빨라진 보폭으로 양 소원이 가까이 붙어섰다.
“못 본 새에 무척 고와지셨습니다. 옷이며, 머리 장식이며, 이제 어디에 내놓으셔도 폐하께서는 부끄럽지 않으시겠습니다.”
“그거참 잘됐군요.”
“폐하께서 저희 쪽으로 돌릴 시선이 있으시기나 하면 말입니다.”
“뭐, 그러시겠죠.”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으로 생각에 잠겨있는 이설은 일일이 대꾸하기도 귀찮아 대충 비위를 거스르지 않은 정도로만 대답해주었다. 어차피 양 소원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 자리도 아니고 만나게 되면 무슨 소리를 듣게 될지는 진작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이렇다 할 타격도 없는 영양가 없는 말을 듣는 건 이제 일도 아니었다.
“듣자 하니 폐하께서는 이제 숨기실 마음도 없으신가 봅니다.”
소청각 안으로 들어가는 문턱을 넘으며 양 소원이 어처구니가 없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오늘 아침 공식적인 자리에 얼굴을 내비친 누군가의 소식을 기어코 들은 모양이었다. 억장이라도 무너져 내려 이를 갈고 있을 줄 알았는데 보기보다 마음을 단단히 먹었는지 의연하다.
이제 와 포기라도 한 건가 싶어 의아함에 물끄러미 고개를 돌리자 눈이 마주쳤다. 그간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얼굴 살이 홀쭉해져 저도 모르게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동안 왜 사람들이 살 빠진 저를 보면 혀를 쯧쯧 찼는지 알 것도 같다.
“이제야 제 얘기가 귀에 들어오시나 봅니다?”
이설이 그 여인에게 신경을 쓴다고 착각한 양 소원이 피식 웃었다. 이설은 맞다, 아니다 반응도 없이 부지런히 걷기만 했다. 낮 동안 좁은 보폭으로 걸어 다닌 탓에 왼쪽 발목에 더 무리가 갔는지 다시 욱신거려 성가셨다. 다리를 절뚝거리기라도 하면 냅다 달려와 어디 불편하신 곳이라도 있느냐며 수선을 떨 궁녀들 때문에 티도 낼 수 없었다.
“이제 와서 제 얘기에 귀를 기울여 주신들 뭘 어쩌겠습니까.”
“……”
“마마의 한철도 이제 다 끝난 것을요.”
양 소원은 스쳐 지나가고 있던 머리 위의 얇은 나뭇가지를 뚝 분질러 공중에 휘이 흔들다 손을 놓았다. 바닥으로 뚝 떨어지는 나뭇가지는 양 소원을 따르던 상궁의 발에 밟혀 부러졌다.
“그때 제 말을 따르셨더라면 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요.”
양 소원이 턱짓으로 앞을 가리켰다. 애써 못 본 척 외면하고 있던 이설도 이제는 상황을 직시해야 했다. 양 소원이 가리킨 앞에는 아침에 본 여인이 처음부터 제 자리였던 것처럼 꼿꼿이 앉아있었다. 후궁들의 틈바구니도 아니었고, 각국 사절단들 사이에 끼어 앉아있는 터라 유달리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알음알음 황궁에 퍼진 소문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흘끔거리며 구경을 하고 있어 모습이 눈에 더 잘 들어왔다.
“하물며 이제는 그 소의 자리 하나도 보전하기 힘드실 것 같습니다.”
양 소원이 한껏 비웃음을 띤 얼굴로 말했다. 이설을 앞질렀다는 우월감에 도취된 비소가 아니었다. 허망하게 흩어지는 웃음들 너머로 절망에 가까운 비참함을 엿본 이설이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두 사람이 각자의 자리로 갈라서기 전 슬쩍 입꼬리를 올려 고개를 돌렸다. 타인에게 악의를 담아 이런 얼굴을 내보인 적인 거의 처음인 듯했다.
“그래도 아직은 여기가 내 자리입니다.”
“……”
“양 소원 그대의 자리와는 거리가,”
자신의 자리로 마련된 곳 앞에 선 이설이 두어 칸 아래에 준비된 양 소원의 자리를 보았다. 두 자리 사이의 간격을 가늠하듯 왔다 갔다 한 눈빛이 다시 양 소원에게 닿았다.
“꽤나 멀군요.”
뒤이어 사근하게 웃어 보이는 얼굴로 고개를 까딱하자 양 소원이 순식간에 얼굴을 굳혔다.
“모쪼록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때마침 의자를 뒤로 꺼내주는 주 상궁과 눈이 마주쳤다. 무게감 있게 위아래로 끄덕이는 고개가 아주 기특하다 칭찬이라도 해주고 있는 것만 같아 기분이 이상해졌다. 남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고 칭찬을 받은 것도 모자라 내심 속이 후련하기도 하니 나도 참 못된 것 같다고, 어리숙한 생각이 들었다.
우찬이 앉을 자리를 기준으로 오른편에는 태자가, 왼편에는 황후의 자리였다. 그러나 황후가 공석임을 감안하여 내명부 품계의 최고권자이며 실질적으로 우찬의 반려라고 알려진 이설이 앉는 것으로 뜻을 전달받았다. 이설로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공식 석상에 황제의 후궁으로 처음 옆자리를 같이 하는 셈이었다.
“폐하와 태자께서는 아직이신가?”
높은 단상 위에 자리한 곳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있던 이설이 지나가던 궁인을 붙잡고 물었다.
“태자 전하께서는 고뿔로 열이 펄펄 끓으셔서 참석하지 못하신다 합니다. 그리고 폐하께서는 아직 도착하지 않으셨습니다.”
태자가 고뿔이 단단히 걸렸다는 얘기는 낮에 차란에게 듣기는 했지만 열까지 펄펄 끓는 줄은 몰랐다. 그 조그마한 몸으로 버티기 얼마나 힘들지. 측은한 마음에 혀를 차던 이설은 시선에 땅에 처박혀있느라 아래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마마, 어서 자리에서 일어나세요!”
귓가에 속삭이는 소리에 놀란 이설이 영문도 모르고 황급히 의자를 뒤로 밀며 엉거주춤 일어났다. 비틀거리다 옆으로 넘어질 뻔한 것을 주 상궁이 어깨를 잡아 세워주었다. 급히 일어나며 왼쪽 발목에 힘이 들어간 것이 또 뻐근해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렇게 정신이 없던 와중에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화들짝 깜짝 놀랐다.
바닥에 길게 깔린 붉은 비단 위로 긴 행렬이 들어오고 있었다. 행렬의 시작은 금색 장포를 두른 황제였다. 여간해선 평소 잘 쓰고 다니지도 않는 화려한 금관을 쓰고 검은 머리카락은 길게 늘어뜨려 아래의 끝부분만 흐트러지지 않게 금색 띠로 묶어 내렸다.
우찬이 미모와 풍채로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이야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라지만 유독 오늘따라 시선이 쏠리는 것은 뒤이어 함께 들어오는 호위군과 금군 때문이었다. 금군은 그렇다 치지만 호위군까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극히 드문 경우였다. 새까만 의복에 복면까지 뒤집어쓴 모습들을 보는 이들 모두가 지은 죄도 없이 바짝 긴장을 했다.
“비운궁의 루 소의가 위대한 성천자이시며 금의 주인이신 황제 폐하께,”
“도대체 너는,”
우찬이 어디쯤 왔을 때 인사를 올려야 할지 가늠해보던 이설은 어느 순간 코앞까지 가까이 온 우찬에게 허둥지둥 인사를 하려다 말이 끊겼다. 험악한 표정을 지은 것도 아니고 역정을 내는 것도 아닌데 괜히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언제쯤에나 내 손에 순순히 잡혀줄 생각인 거지.”
“……인사 올립니다. 홍복을 누리소서.”
여태껏 우찬의 얼굴을 수도 없이 봐왔지만 한번도 우찬의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불빛에 아른거리는 자신의 모습이 비쳐질 만큼 우찬은 검은 눈동자를 형형하게 빛내고 있었다.
“신첩이 또 폐하의 심기를 거스른 것입니까?”
“짚이는 것이라도 있느냐?”
“없습니다.”
이설이 망설임 없이 대답하며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우찬이 너무 가까이 다가와 있어서 어딘가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사의시는 혼자 왜 다녀온 것이냐.”
벌려놓은 간격이 무색하게 우찬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느닷없이 묻는 질문에 말문이 막혀 얼떨결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단상 아래에는 이미 호기심을 반짝이는 눈들이 모두 이설과 우찬을 향하고 있었다. 우찬의 고압적인 눈빛에 눌린 자신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무슨 오해를 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알아볼 것이 있어 들렀습니다. 그런데 신첩이 사의시에 다녀온……,”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우찬이 이설을 지나쳐 자리에 앉았다. 멍하니 남아있던 이설이 허망하게 고개를 돌려 쳐다봤지만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리고는 주 상궁이 손짓하는 대로 어영부영 자신도 자리에 앉자 집중됐던 시선들이 흩어졌다. 어두워 잘 보이지는 않지만 면면마다 떠오른 비웃음이 어떤 의미일지는 퍽 알 만도 했다.
내관이 연회의 시작을 알리는 글을 모두 읽자 악공들이 주악을 시작했다. 금국 전통악기 특유의 높고 쨍한 현악 소리가 오늘만큼 귀에 거슬렸던 적이 없었다.
가만히 앉아 차례로 이어지는 상연 따위를 보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시작하기 앞서 치르는 의식들이 어찌나 많은지 주악 소리가 없었으면 진작 졸음이 쏟아질 참이었다. 한참이 지나고서야 형형색색의 나풀거리는 옷을 입은 무녀들이 들어와 부채춤을 시작했다. 그제야 한숨 돌린 이설이 슬그머니 고개를 우찬에게 돌렸다.
“……뭘 그리 쳐다보는 것이냐.”
눈이 마주친 순간 바로 피했어도 민망한 건 매한가지였겠지만 그렇다고 계속 빤히 쳐다볼 필요도 없었다.
언제부터였는지 대놓고 고개를 돌려보고 있던 우찬은 그 사실이 무슨 대수라도 되는 양 되레 뻔뻔하게 이설더러 뭘 그리 쳐다보냐며 타박을 줬다.
“폐하께서야 말로 어찌 신첩을 그리 쳐다보고 계십니까?”
“그 신첩 소리, 정말 진절머리 나는군.”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아니면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입에 안 붙어 고생일 때는 언제고 이제는 쓰지 말라는 대도 자꾸 버릇처럼 말이 헛나와 곤욕이다.
깊은 심호흡으로 한 번 머릿속을 정리한 이설이 침착하게 물었다. 어차피 좋은 소리 못 들을 질문인 걸 알지만 못 들은 척 그냥 넘어가는 것도 이상한 노릇이었다.
“할 말이 있으나 하지 않을까 싶어.”
“폐하께서는 제게 말을 가리실 필요가 없으신데요.”
언제 우찬이 자신에게 말을 가려 했다고 이런 같잖은 배려를 했을까. 말을 뱉자마자 아차 싶었지만 다시 주워 담을 수 있는 말도 아니라 이설은 표정을 숨기고 뻔뻔하게 미지근한 물로 목을 축였다.
“알고 있다. 너 따위에게 그럴 필요는 없지”
당연한 얘기를 한다는 듯 비스듬히 기울인 고개로 설핏 웃음을 지었다가 없앤 우찬을 봤다. 그냥 우찬과 단둘이 마주 보고 얘기하는 일만으로도 슬쩍 좋아졌던 기분이 다시 어둠으로 침잠했다.
“그냥 내가 그러고 싶은 것뿐이다.”
“……”
“내가 오늘 네 기분을 망가트리지 않는 방법은 네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듣지 않는 것밖에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