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159화
“그럼 마마께서는 무슨 수로 외출을 하실 작정이십니까?”
“생각 좀 해 봐야지.”
별일 아니라는 듯 눈썹과 어깨를 동시에 으쓱하며 말을 하긴 했지만 사실 이설도 뚜렷한 방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주 상궁 몰래 황궁 법도에 관한 온 서책을 뒤져 찾아보았지만 유용한 정보는 아직 찾지 못했다. 찾아보면 찾아볼수록 황궁이 얼마나 엄격하고 모든 것이 법도에 의해 통제되는 곳인지만 상기될 뿐이었다.
“네게 좋은 수라도 있느냐?”
“글쎄요.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말입니다.”
“역시 정도(正道)로는 어렵겠지? 유강에게 물어봐야겠다.”
“유강은 안 됩니다. 까딱 입을 가볍게 놀렸다가는 마마께서 곤욕을 치르실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유강만큼 계책에 능한 사람이 없는데.”
사실 기연에게 뾰족한 수가 있을 거라 생각하여 털어놓은 것은 아니었다. 대쪽 같은 기연이 제안할 법한 방법은 이미 이설이 수많은 서책을 뒤지고 뒤져 찾아보았지만 허사였다. 방법이 없었다.
이제야 크게 실망하며 기연의 앞자리에 앉은 이설이 탁자 위에 팔을 겹쳐 엎드렸다.
“차라리 주 상궁에게 물으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주 상궁?”
팔 사이에 파묻은 고개를 빼꼼 들어 올린 이설이 기연을 올려다봤다.
“황궁에 오래 살았으니 법도야 빠삭할 테고, 계책이라면 장담하건대 주 상궁도 유강이 못지않을 것입니다.”
“주 상궁이 날 도울 리가 없다.”
이설이 들어 올린 머리를 좌우로 절레절레 흔들었다.
“요즘은 내가 여기 비은궁 궁 밖으로만 벗어나도 어찌나 걱정을 하는지, 영 귀찮아.”
양 볼에 공기를 채워 부풀린 이설은 느닷없이 심통이 났다. 그렇지 않아도 대문 밖을 내다볼 때마다 주 상궁 눈치가 보이던 참이었는데, 어제 아침 일이 있은 뒤로는 담벼락 위로 얼굴만 내보여도 ‘마마’ 하고 무섭게 부른다. 저를 아주 궁 안에 꽁꽁 숨겨 가둬 놓을 생각인지 모르겠다.
하기야 어제 일이 주 상궁에게는 큰 영향을 미치기는 했나 보다. 비은궁으로 돌아오는 길에 송구하다며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아무래도 저라도 이설을 말렸더라면 그런 난처한 상황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듯싶었다.
이설은 어제 일을 누구의 잘못으로도 돌리지 않았다. 어차피 언젠가는, 한 번 정도는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을 뿐이다.
“주 상궁도 걱정이 많을 수밖에요.”
기연이 면포에 칼날을 싼 뒤 바닥에 내려놓으며 무심히 대꾸했다. 그러자 이설이 탁자에 엎어진 몸을 일으켜 세우며 가늘어진 눈으로 기연을 봤다.
“기연이 네가 주 상궁 편을 다 들고, 이제 제법 황궁에 정이 들기 시작했나 보구나.”
웃음 섞인 말에 기연이 코웃음을 쳤다.
“황궁에 들 정 따위 평생을 살아도 없을 겁니다.”
“평생 살게 하지는 않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는 말아.”
이설이 흐뭇하게 웃으며 기연의 굳은살 박인 손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호위 무사 명목으로 함께 온 기연을 평생 옆에 두고 살 생각은 없었다. 적당한 때가 오면 주머니 두둑하게 채워 쫓아내고 궁 밖에 살림이라도 차리는 데에 보태 줄까 싶다. 평생 옆자리를 함께 할 고운 여인을 만나면 그리해 줄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일찍 찾아 다행인 성싶으면서도 아쉬웠다. 그래서 아직 말을 꺼내지 못하는 중이었다.
“그나저나 설령 연국을 다녀오실 방법을 찾는다 하시더라도 가시는 길이 녹록지는 않으실 겁니다.”
“아직 국경의 이민족들은 정리가 되지 않고 있는 건가?”
“금군의 진압으로 좀 나아지기는 했지만 잔당들은 남아 있을 테니까요.”
당장 나갈 생가만 하다 보니 가는 길은 고려해 보지 못했다. 그래도 금군 병력 지원에 기세가 한풀 꺾였다 하니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금국에서 연국까지 가장 길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회국은 이민족에 우호적인 나라다. 금국에서 회국으로 넘어가는 국경만 잘 지나면 된다.
“일단 회국으로 가는 국경만 잘 넘어가면 그 뒤는 걱정 없겠군.”
“회국이야 곳곳에 주둔 중인 연국 병사들이 많으니 그렇긴 합니다만,”
“그럼 됐어.”
“…….”
“이제 어떻게든 여길 나가는 방법만 찾으면 되겠어.”
단호하게 말꼬리를 끊은 이설은 자신도 모르게 탁자 위에 둔 손에 주먹을 꽉 쥐었다. 쓸데없는 활력이라는 것을 알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이대로 다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어제 일을 듣고 온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예고 없이 찾아온 기연은 이설의 침소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이맘때면 이른 새벽 창밖에 얼굴을 내밀고 호 불면 뽀얗게 올라오는 입김이 그립다는 얘기를 공감하는 사람은 역시 기연뿐이었다.
늘 다른 궁녀들이 하는 말을 조용조용히 듣고 있던 평소와는 달리 이설도 오랜만에 고향 생각을 하며 신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곧 먹게 될 수도 있는 연국 음식을 하며 군침까지 다시니 기연이 한바탕 웃어 보이기도 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깔깔 웃으며 이야기 삼매경에 빠졌다가 주 상궁이 석반을 드셔야 한다며 들어왔을 때야 기연이 물러갔다. 함께 석반을 들자는 말에 기연보다도 주 상궁이 먼저 그럴 수 없다 대답했다. 주 상궁의 얼굴을 보고서야 또 자신은 황제의 후궁이며 기연은 그저 외간 사내일 뿐이라는 사실을 다시 상기했다.
연화가 상을 차리는 동안 주 상궁이 기연과 함께 나갔다가 잠시 후 혼자 들어왔다. 보통 식사 수발을 받지 않는 이설인 걸 알면서도 주 상궁이 연화를 내보내고 직접 수발을 들겠다며 옆에 섰다.
“오늘은 정말 안 남기고 다 먹을 테니 나가서 자네 일 봐.”
“소인이 나가면 또 삼설이 밥그릇에 버리시겠죠.”
“……버린 게 아니라 나눠 먹은 거래도 참.”
“마마께서 꾀가 늘어나신 건 무척 반길 일이지만 끼니를 거르시는 건 어림도 없습니다.”
쳇, 하는 소리를 일부러 크게 내며 이설이 숟가락을 들었다.
어제 일은 주 상궁이 머리를 조아린 뒤로 두 사람 모두 함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설도 주 상궁이 그 일을 내심 마음에 담아 두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주 상궁 또한 이설 역시 어제 일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기연에게 귀띔을 주고 오늘 하루 제 기분을 맞춰 주게 한 걸지도 모르겠다.
주 상궁의 배려와 기연의 노력 때문인지는 잘 몰라도 이설은 그런대로 잘 버티는 중이었다. 어제 궁으로 돌아와서도 한 번 울지 않았다. 도월소에서 직접 물을 길어다가 후원에 물을 뿌리는 험한 노동을 수 번이나 반복했고, 점심과 석반도 거르지 않았다. 더 이상 우찬과의 일로 하루 일과는 망치는 짓을 하지 않는다.
“마마.”
“응.”
“사흘 뒤 경미찬 연회가 시작되옵니다.”
잔에 미지근한 찻물을 따라 주던 주 상궁이 조용히 말했다. 먹히지도 않는 기름 진 반찬을 억지로 입에 쑤셔 넣던 이설이 고개를 슬쩍 돌렸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평년보다 많이 늦은 셈입니다.”
탄영당에 모인 다른 후궁들과 경미찬 연회에서 무슨 경연을 선보일지 얘기를 나누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얘기를 나누었다고 하니 무척 화기애애하게 들린다. 실상은 자신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멍하니 앉아 뭣도 아닌 여인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며 비웃음을 사고 있었던 것뿐인데.
대체 그때 자신은 왜 그렇게 미련했을까? 근데 그 뒤로 한참이 지난 지금은 또 왜.
“연회 시작 전 새벽 제를 올릴 때 입으실 옷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한창 품이 넉넉하셨을 때 지은 옷이니 더 이상 살이 빠지시면 태가 나지 않으실 겁니다.”
“그래서 지금 잘 먹고 있지 않아.”
“더 잘 드셔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자네는 날 보면 항상 하는 말이 잘 먹으라는 말밖에는 없어. 알고 있는가?”
“사람으로 태어나 잘 먹고 잘 자는 것만큼 중요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얼른 한술 더 뜨시지요.”
공손히 손짓하는 주 상궁의 말대로 이설이 크게 한술 떠서 입에 넣었다. 우물우물 한참을 씹고서야 꿀꺽 삼키고는 주 상궁을 봤다.
“그런데 새벽 제라니?”
“연회가 시작되기 전 새벽에 제를 올립니다. 말만 새벽 제이지 아침나절 잠깐이면 금방 끝납니다.”
“나도 참석해야 하는가? 보통 그런 제들은 신당에서 따로 한다 들었는데.”
“내명부 최고 어른이신 이상은 마마께서 참석해 주셔야 합니다. 이전 해에는 양 소원께서 하셨고요.”
“그럼 그……,”
젓가락 윗부분을 손톱으로 긁어내리며 이설이 머뭇거렸다. 말 꺼내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주 상궁이 제 의도를 혹시 다르게 해석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에 선뜻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이내 주 상궁이 태연한 어투로 먼저 말했다.
“황제 폐하와 태자 전하께서도 참석하시는 자리이니만큼 좋은 비단으로 정성을 다해 지은 것이라 옷이 참 곱습니다. 식후에 시착해 보시지요.”
“……응, 그러지.”
하기야 자신도 참석하는 제에 황제가 없을 리가 없겠지.
괜한 것을 물었다 자책하며 이설이 입술을 삐죽였다. 차라리 대놓고 묻기라도 했으면 덜 민망했을 텐데.
묵묵히 밥 한 그릇을 비운 이설이 뿌듯한 얼굴로 주 상궁을 올려다봤다. 나물 몇 가지가 남기는 했지만 고기반찬도 아니니, 주 상궁이 크게 나무랄 것 같지는 않았다.
밥상을 한번 쭉 둘러 본 주 상궁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제야 이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주 상궁을 불러 눈을 마주쳤다. 맑게 웃으며 부탁이 하나 있다고 말을 꺼내니 뜬금없는 얘기에 놀란 것도 아주 잠깐이고, 말씀만 하시라 대답했다.
“황궁을 나가고 싶어. 도와주게.”
꿀에 절인 복숭아가 담긴 접시를 막 이설의 앞으로 옮겨다 주던 주 상궁이 멈칫했다. 잠깐 동안 말없이 이설을 바라보는 눈에 혼란함이 가득했다. 눈을 깜빡거리던 이설은 그제야 아차, 하고는 고개를 바로 저었다.
“내 말은, 연국에 잠깐 다녀오고 싶다는 말이었네.”
“아.”
“도와줄 수 있겠나?”
접시 잡은 손 그대로 굳어 있던 주 상궁이 짧게 탄성을 터뜨리며 이해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친정 사가에 다녀오시겠다는 말씀이시군요.”
“엄밀히 말하면 사가는 아니지. 연의 왕궁이니까.”
이설이 장난 진 표정으로 씩 웃어 보였지만 주 상궁은 아직 굳은 얼굴 그대로였다.
“내 아무리 혼자 생각을 해 봐도 다른 방도가 없어서 말이야. 자네라면 뾰족한 수가 있을까 싶어.”
“연국이라…….”
고심하는 주 상궁을 보며 이설이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다. 제 걱정을 끔찍이 하기는 해도 어지간한 청은 다 들어주는 주 상궁이니 무슨 수가 있지 않을까, 괜히 마음이 들떴다.
오래 지나지 않아 주 상궁이 이설과 눈을 마주쳤다. 직감적으로 긍정적인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