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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158)화 (158/300)

달의 황홀경

158화

“좀 나와 봐.”

우찬의 침소를 나와 아무도 없는 복도를 걷던 차란이 허공에 대고 말했다. ‘나와 보라고’ 하는 짜증 섞인 목소리를 두어 번 더 낸 후에야 천장에서 흑영이 뚝 떨어졌다.

“왜.”

상냥함이라고는 티끌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무뚝뚝한 목소리가 복면 안쪽에서 낮게 울렸다. 차란은 가볍게 아랫입술을 물었다가 떼며 고개를 숙여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는 미간 사이를 엄지로 꾹꾹 누르며 하, 하고 짧은 숨을 토해 냈다.

“폐하께서 피우시는 거. 보통 엽초가 아닌 거 같은데.”

“…….”

“넌 뭔지 알고 있지?”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무암궁 앞에서 마마를 만나시고도 여태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유가 뻔하잖아.”

“…….”

“네 말 듣고 오늘 큰일 한 번 나겠구나, 단단히 각오하고 왔는데.”

“별일 없었으니 다행 아닌가.”

차란은 태평한 소리를 하는 흑영의 어깨로 주먹을 퍽 내리쳤다. 미동도 안 하는 흑영이 어깨를 툴툴 털어 낸다. 소리라도 버럭 지르려다가 궁녀 둘이 흑영의 뒤로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잠시 기다렸다가 소리를 잔뜩 죽이고 성을 냈다.

“내내 피우시는 게 대체 뭐길래 저렇게 태평하신 거냐고. 연죽 잘못 피웠다가 인생 골로 가는 거,”

“입조심해. 네가 골로 가고 싶은 게 아니면.”

친구 간의 온정은 눈곱만치도 없는 흑영이 살기 번득이는 눈으로 위협을 했다. 무슨 말을 못 하게 하는 이 융통성 없는 머저리가 제 타는 속을 알까 싶다.

‘폐하께서 급히 승상을 뵙고자 하십니다.’

‘어쩐 일로……? 간밤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간밤에 일은 없었고 방금 전 무암궁에 루 소의 마마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금위대장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신당으로 향하던 차란은 갑자기 불쑥 나타난 흑영이 전하는 말에 아침에 먹었던 음식들을 그대로 게워 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신경 쓸 일들이 벌어지니, 차란은 이제 무엇이 해결해야 할 우선순위에 들어와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당장 오늘만 해도 연회 시작 전 드리는 첫 제사에 대해 지시 내릴 게 수십 가지가 넘었다. 예년 같았으면 욕을 좀 먹더라도 은근슬쩍 우찬에게 넘겨 보낼 일들도 올해는 혼자 다 도맡아 하려니 몸이 열 개라도 모자를 지경이었다.

흑영이 미리 전한 얘기 때문에 황제를 만나기 전부터 겁을 먹었던 건 사실이다. 모르긴 몰라도 황제가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얼굴 보자마자 느껴지는 분위기만 해도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그러나 그 살얼음판 같던 기운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주변으로 연기가 뿌옇게 흩어질수록 황제의 불꽃처럼 타오르는 노여움도 차츰 사그라들었다.

차란은 이를 결코 반기지 않았다. 황제가 적당한 심신의 안정을 위해 장죽을 피우는 것은 자신이 왈가왈부할 게 아니었지만 신하 된 도리로서 적당한 선을 넘지 않도록 지켜봐야 한다고는 생각했다. 그리고 차란이 보기에는 이쯤이 그 선인 것 같다.

“그런 말 하려는 게 아니잖아.”

“난 잘 이해가 안 되는데.”

“폐하가 피우시는 엽초. 분명 뭔가 이상했어.”

“사용하시는 연죽은 네가 봤던 장죽 하나뿐이고, 엽초는 궁녀들이 준비한다. 가끔 독초를 섞어 피우시긴 하지만 크게 해가 되는 것들은 없었어.”

“확실해?”

“물론.”

흑영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해가 뜨고 지는 순간까지 황제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흑영이 이리 확신을 한다면 더는 의심을 할 수가 없다.

대답을 듣고도 차란은 어딘가 찜찜하게 피어오르는 의심 한 줄기를 완전히 지워 낼 수가 없었다. 황제와 수도 없이 독대를 하였지만 오늘만큼 황제가 낯설고 아득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그래서 분명 엽초에 문제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요즘 폐하의 기분은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는데, 그게 꼭 독초에 중독된 증세라고 보기만은 어렵지.”

물론 차란도 알고 있다. 황제의 널뛰는 기분 변화의 근본적 원인이 누구이고, 무엇인지.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이 거슬리는 미묘한 차이를 완전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방금 내가 폐하와 했던 얘기 전부 들었지?”

차란이 묻자 흑영이 짧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관심 없지, 너는?”

흑영이 다시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란이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별로 새삼스럽지도 않다는 듯 ‘그래’, 하고 쉬이 수긍했다.

“넌 폐하의 존체만 무탈하다면야 주변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으니까.”

차란이 대놓고 비꼬는 말에도 흑영은 부정도 하지 않고 묵묵히 듣기만 했다.

“혼자 생고생이지 혼자.”

“…….”

“어디다 털어놓을 곳도 없고 결국 또 나 혼자,”

“확실해?”

“……뭐가.”

“폐하께서 피우시는 엽초. 확실히 이상한 게 맞냐고.”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엽초가 이상한 건지, 아니면 내가 이상한 건지.”

차란이 쓰게 입맛을 다셨다. 기운 빠진 목소리로 ‘간다’ 하고 흑영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쳐 가려고 하니, 그 순간 팔목이 휘어 잡혔다. 차란이 몸을 반 바퀴 돌려 흑영과 가까이 마주 서자 두 사람 다 눈살을 확 찌푸리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차란은 흑영이 놓아준 팔목이 반대쪽 소매에 마구 문지르며 투덜댔다.

“불쾌하게 진짜.”

“엽초는 같이 알아보도록 하지.”

“갑자기 왜?”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잖아. 만약 진짜 엽초에 문제가 있는 거라면 폐하께서 이대로 계속 피우시게 둘 수도 없고.”

흑영이 괜히 선심 쓰듯 거들먹거리는 것도 아닌데 덤덤한 말투가 더 짜증이 난다. 확실히 요즘 감당할 수 있는 정무의 양을 훨씬 넘어선 듯하다. 별것도 아닌 일에 자꾸만 신경질이 나고 사람들은 거슬리고, 매사에 늘 심사가 꼬인다. 어쩌면 그 탓에 오늘 황제가 유독 이상하게 보였는지도 모르겠고.

“그럼 내일쯤 다시 얘기하도록 해.”

언제, 어디서 다시 보자는 말도 없이 흑영이 홀연히 사라졌다. 저래놓고 또 내일 갑자기 기별도 없이 불쑥 튀어나와 사람을 놀라 자빠지게 하려고 그런다. 하여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도 흑영이 도와준다면 황제가 피우는 장죽에서 엽초를 몰래 빼 오는 것 정도는 식은 죽 먹기 일 것이다. 흑영은 무척 싫어하겠지만 그런 짓을 벌이지 않고서야 알아낼 방법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

그나저나 이설도 문제다. 보아하니 황제는 이설을 비은궁에 가둔 채로 말려 죽일 심산인 듯싶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처사다. 군주로서 존경하고, 벗으로서 아끼는 마음과는 별개로 이설을 대우하는 황제의 태도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 대체 이설을 가지고 뭘 어떻게 하고 싶은지, 물어도 대답하지 않으니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

기실 알 만도 한 이유가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납득이 충분히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럼 의문은 다시 새로운 원점으로 되돌아간다. 대체 왜 무암궁의 여인에게 첩지를 내리는 것인지.

그 여인이 진짜 황제의 정인이라면 차란도 그 첩지가 아깝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그대로이고, 정인이라 믿어 의심치 않을 확정적인 증좌도 없는 판국에 첩지라니. 누구를 의식하고 내리는 황명인지 불 보듯 뻔하다.

불쌍한 건 이설이다. 하여간 팔자 한번 사납게 꼬이긴 했다.

정 주지 말걸. 괜히 마음만 싱숭생숭해지게…….

태금궁을 막 벗어난 차란이 터덜터덜 신당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며 멀리 비은궁이 있는 방향을 쳐다봤다.

아무래도 이설이 황궁을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것만 같다.

*

“황궁을 나가야겠어.”

비장한 목소리가 선포했다.

“예?”

칼날을 손질하던 기연이 놀라 기름이 묻은 면포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되물었다. 후원 쪽을 바라보며 서 있던 이설이 빙그르 돌아 기연에게 다가오며 재차 단호하게 말했다.

“황궁을 나가기로 했어.”

“황궁을 나가기로 하셨다니, 그게 무슨……?”

바닥에서 주운 면포와 칼을 탁자에 내려 둔 기연이 당황한 내색을 하지 않으려 애쓰며 물었다. 이설은 여느 때보다도 차분한 언성으로 대답했다.

“연국의 아바마마께서 많이 편찮으신 것 같아. 아무래도 해를 넘기시기 힘든 모양이야.”

“아아.”

그제야 기연이 다소 안도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휴, 하고 길게 내쉬는 숨을 보니 아무래도 뭔가 단단히 착각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마마 말씀은, 잠시 연국에 다녀오시겠다는 거네요.”

“응. 내가 그리 말하지 않았나?”

“황궁을 나가겠다 하시니 오해할 수밖에요.”

기연의 말에 이설이 설핏 웃음을 지으며 아무 이유도 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기연이 제 마음속을 들어가 봤더라면 그런 오해 따위는 할 수도 없었을 텐데.

“전하의 병세가 많이 좋지 않으신 겁니까?”

“아무래도 이번에는 일어나시기 힘든 것 같아.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하오나 마마께서는 황궁을 나가시는 일이 그리 쉽지 않으실 텐데요.”

“듣자 하니 황제의 후궁은 죽어서도 친정에 뼛가루 한 줌조차 남기지 못한다더군. 무척 야박하지?”

쓴웃음을 지으며 이설이 어깨를 으쓱 가볍게 올렸다 내렸다. 별일 아닌 얘기인 것처럼 전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실은 하도 어이가 없어 나온 반응이었다. 황궁 법도가 어찌나 엄격한지, 후궁으로 생을 바친 여인의 아비가 먼저 떠난 딸아이의 머리카락 한 줌이라도 남겨 달라 그리 애원을 했는데도 들은 척조차 안 했다고 한다. 정말 무정하기가 말도 못 할 지경이었다. 꼭 황궁의 주인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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