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157화
“가만 보면 차란 너는 그 계집이 내 정인이기를 바라는 것 같아. 그렇지?”
“그런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오해 마시옵소서.”
의심 가득한 황제의 눈을 차란은 정면으로 부정했다.
“그럼. 네가 바라는 쪽은 이설인 것이냐?”
우찬이 비웃음 가득 실린 말투로 물었다. 돌아올 대답이야 뻔했지만 기실 그게 진심이 아니라는 것 역시 알고 있다. 보기와 달리 그리 냉정하지 않은 차란은 이미 이설에게 인간적인 정을 주었으니 둘 중 하나를 고르라 한다면 고민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제 바람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교묘하게 대답을 넘어가는 속은 이미 이설에게 기울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설령 무암궁의 여인이 제 진짜 정인이 아닐지라도 그 허울 좋은 감투가 이설에게 넘어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설이 절대 제 정인일 리가 없었다.
“폐하, 그러다 다치십니다.”
홀로 고요히 생각을 하는 우찬을 말리며 차란이 한걸음 가까이 왔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 설대가 완만하게 휘어 있었다. 마음먹고 조금만 더 힘을 준다면 쩍하고 갈라지며 손에 생채기가 날 터였다.
“너무 초조해하지 마십시오. 신이 자주 무암궁을 들러 면밀히 알아보겠습니다.”
무암궁의 일로 신경이 쓰여 그런 줄 착각한 차란에게 진짜 이유를 밝힐 생각은 접었다. 이설이 진짜 자신의 정인이 아니라는 게 화가 나 견딜 수가 없다는 말을 했다가는 간언이랍시고 들을 얘기의 내용이 너무 고리타분하다.
간신히 가라앉았던 기분에 불쾌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모두 이설을 생각하면서부터다.
금방이라도 두 동강이 날 것 같은 장죽을 옆으로 치워 버렸다. 처음에는 심신이 완화되는 데에 꽤 도움이 되는 것 같더니 어느 순간부터 정신이 몽롱하고 몸이 무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연기를 너무 많이 들이마시면 가끔 이런 증상이 나타나곤 한다.
“이 일을 논하려고 널 부른 것이 아니었는데.”
“지금 이보다 급한 사안이 어디 있습니까?”
“말했잖느냐. 무암궁에 연이설이 왔다고.”
“자객을 보내신 것도 아니고 직접 찾아오셨다니, 다행 아닙니까?”
딴에는 분위기를 풀려 농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전혀 적절하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이설의 얘기를 피하려고 하는 게 느껴졌다.
차라리 이설이 자객을 보냈더라면 기분은 덜 나빴을 것이다. 이유야 어찌 됐든 치정 갈등 끝에 생긴 투기려니 감안하고 한 번쯤 눈감아 줬을 수도 있다. 아니, 오히려 그랬다면 우찬은 이설을 기특하다 상이라도 내렸을 것이다.
이설이 투기라니. 이 얼마나 대견하고 신선한 반응인가.
그러나 그런 일 따위가 이설에게 일어날 리 없었다. 오늘 이설은 보란 듯이 우찬을 한 방 먹이고 유유히 사라졌다. 대견하지는 않았지만 신선하기는 했다. 뻔뻔하게 제 눈을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지를 않나, 따박따박 말대답을 하지를 않나. 못 본 사이 정신이 어떻게 되어 버린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느닷없이 짧게 웃음이 나왔다. 평소 맹해 보일 정도로 순한 눈에 힘을 잔뜩 주고 올려다보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당장 비은궁이라도 찾아가 난폭하게 이설을 끌어내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씻은 듯이 사라졌다.
“왜, ……웃으시는 겁니까?”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 여긴 것인지, 차란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우찬이 제 농담에 웃었을 거라고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는 듯했다.
“연이설이 무암궁 주변을 얼씬거리는 건 곤란해.”
“오늘 같은 수모를 겪고 또 찾아가실 분이 아니시잖습니까.”
차란이 수모라 칭하는 것이, 대문 앞에서 문전박대를 당한 일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만난 일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다행인데, 그럴 것 같지가 않아.”
“…….”
“연이설 그 맹랑한 것이 슬슬 황궁 돌아가는 순리에 적응을 하고 있단 말이지.”
“폐하께서는 그게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 모양이시고요.”
차란이 대놓고 언짢은 내색을 하며 옷깃을 매만졌다. 별 의미도 없는 행동으로 잠시 시간을 갖는가 싶더니 곧 ‘폐하’ 하고 우찬을 불렀다.
“루 소의 마마를 대체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이설의 얘기만 나오면 쓸데없는 것을 캐묻고, 불필요한 첨언을 하는 차란이 또 낌새를 보냈다.
“여쭙지 않으려고 했는데 폐하께서 먼저 말씀을 꺼내셨으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
“정녕 마마를 황궁에서 내보내실 마음이 없으신 겁니까?”
“일전에 말한 그대로다. 그 일로 할 말이 있어 너를 부른 것이었는데.”
잠깐의 대화만으로도 기운이 빠진 차란은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인지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다 거칠게 머리를 넘겼다. 대놓고 내쉬는 한숨의 소리가 마치 우찬이 들으라는 식으로 컸다.
“정당한 명분 없이는 어림도 없습니다.”
“어떤 명분 말이냐?”
“마마께 금계령을 내리실 명분 말입니다.”
“…….”
“부득불 황명을 내리신다면 못할 일도 아니지만, 폐하께서는 언제나 명분이 중요하신 분 아니십니까?”
눈치가 빠르다 칭찬을 해 줘야 할지, 주제넘다 경을 쳐야 할지 가만히 차란을 들여다보았다. 이렇든 저렇든 차란은 개의치 않을 모양인 것 같았다.
“갑작스럽게 마마께 금계령을 내리시는 연유는 여쭙지 않겠습니다. 어차피 신은 납득하지 못할 테니까요. 다만 신의 사견으로는,”
“네 사견은 듣고 싶지 않다.”
듣기 싫은 소리는 단호하게 쳐낸 우찬이 왼쪽 손목 위를 손톱으로 긁어내렸다. 살이 붉게 오를수록 그 아래 새겨진 이름은 더 선명하게 나타났다.
제기랄.
이설을 비운궁 바깥 모든 것들로부터 고립시킬 생각이었다. 그 시작은 태자였고, 자각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계획에도 없는 창화군을 도국으로 돌려보내는 것부터 이미 이설을 그렇게 만들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도 찾지 않는 궁에 갇혀 언젠가 황궁을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기약 없는 기다림에 결국 말라 바스러지길.
감히 황궁을 떠나겠다 품었던 괘씸한 마음을 평생에 걸쳐 후회하며 그 곁은 오직 자신만이 함께 하기를 원했다.
비은궁을 고립시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미 자신의 걸음이 뜸해지고, 태자가 비운궁 근처는 얼씬도 하지 못하는 황명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황궁 내 궁인들은 비은궁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이설의 입지는 이렇게 한 칸씩 좁아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성에 차지 않았다. 좀 더 두고 보자던 생각이 확신에 찼던 것은 무암궁에서 이설을 만났을 때였다. 설마 직접 찾아갈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다. 이설에게 그런 배짱이 있을 리가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무암궁을 찾아간 것인지 돌아오는 내내 생각해 봐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황제의 정인이라는 짐을 덜어 줄 은인에게 감사 인사라도 전할 참이었던 걸까. 직접 준비해 온 음식이라니. 착한 것도 정도껏 해야 납득을 하지. 이설은 도를 지나쳤다.
“다시 생각해 보니 사견은 아닌 것 같아 말씀드리겠습니다.”
혼자 골똘히 생각을 해보던 것 같던 차란이 복잡한 생각을 하던 중에 불쑥 끼어들어 말했다.
“최근 황궁에 도는 소문입니다만, 발원지는 아마 양화성 내에 주둔하는 군일 것입니다.”
“뭔데 그러느냐.”
“연국이 북방 이민족이 손쉽게 국경을 넘어갈 수 있도록 경비 병력을 국경지에서 모두 철수시켰다는 소문입니다. 암암리에 군수품을 조달한다 하기도 하고, 특히나 식량 지원에 적극적이라 합니다.”
“소문이 사실인지는 확인해 봤느냐?”
“사실 무근입니다. 경비 병력이 주둔지를 옮기는 것은 매년 이맘때면 늘 있는 일이고, 식량 지원 역시 소수 부족에게 구제 차원으로 나누어 주는 일종의 구휼미입니다.”
“이깟 소문을 내가 알아야 할 이유가 뭐냐.”
“문제는 이런 소문이 파다한 가운데 적당한 이유도 없이 연국에서 오신 마마께 금계령을 내리신다면, 다들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
“며칠 뒤면 경미찬 연회이옵니다. 부디 연회가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참아 주시옵소서.”
떨떠름한 눈빛을 했다간 자리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빌며 간청할 게 눈에 선한 차란이 일말의 체면은 있는지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청했다.
차란의 말 중 틀린 것은 없다. 명분도 없이 금계령을 내리는 것은 성미에 차지 않는다. 그래서 차란을 부른 것이었다. 이설을 비운궁 바깥으로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게 할 수 있는 적당한 명분을 만들게 하기 위해.
차란은 황궁 내 이설의 평판을 위해 그러지 않는 게 좋다 여긴 듯하지만 우찬이야 아무렴 상관없는 일이기는 했다.
“연회 준비는 슬슬 마무리 단계인가?”
“예 차질 없이 준비될 예정입니다.”
우찬이 대화 주제를 휙 넘어가자 마음을 바꾸었다 생각했는지 표정이 한결 풀린 차란이 대답했다.
연회 따위는 별 관심 없다. 쓸데없이 국고만 낭비하는 게 한심해 어지간한 연례행사들을 모두 없애고 남은 몇 안 되는 연회 중 하나였다. 우장절이 무사히 지나간 것을 축하하기 위한다는 의미가 무색하게, 우장절이 끝난지도 벌써 한참이나 지났다. 아침나절 하늘에 제를 지나는 것이 끝나고 나면 황궁 어디를 가도 술 냄새가 진동하는 어처구니없는 꼬락서니를 해마다 보고 있다.
“말씀 끝나셨으면 이만 물러가도 되겠습니까? 곧 있으면 제단 쌓을 곳을 정하는 신점을 칠 때가 되어 신이 한번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걸 여태껏 정하지도 않고 있었단 말이냐.”
“신녀도 나이가 드니 신력이 영 예전 같지가 않나 봅니다. 조만간 자리에서 물러날 참이라고 합니다. 남은 신력도 모두 다음 대에 전수할 생각이고요.”
“갈 때가 됐긴 했지.”
백발의 주름이 자글자글한 신녀의 얼굴을 떠올려 보며 우찬이 수긍했다. 아주 어렸을 적 신녀를 처음 만났을 때도 이미 나이 지긋한 노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 정도면 오래 살았지, 싶다.
한시라도 빨리 자리를 떠나고 싶어 하는 차란이 괘씸하였지만 더 마주 보고 싶은 마음도 없었기에 이만 물러가라 명했다.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차란이 잽싸게 자리를 떠났다.
홀로 남은 우찬은 어딘가 마음 한구석의 찝찝함을 남겨 놓은 채 한참을 그렇게 자리에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