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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154)화 (154/300)

달의 황홀경

154화

“마마, 몸이 차시다 들었습니다. 따뜻한 차를 준비해 드릴까요?”

연화가 그새 주 상궁에게 가서 고뿔 기미가 보인다고 고해바쳤나 보다. 그럴 필요 없다 말해 봐야 돌아오는 대답이 뻔할 듯하여 그리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이설의 말 끝나기가 무섭게 주 상궁이 김이 나는 찻주전자를 가지고 안으로 들어왔다. 당황하여 웃음을 터뜨리는 이설에게 아침 인사를 전한 주 상궁은 특유의 근엄한 얼굴로 찻잔을 채웠다.

“내가 차는 필요 없다 하였으면 어쩔 뻔했나?”

“결국은 다 드시게 되셨을 겁니다.”

“이제는 자네도 내 고집을 이기는가 봐.”

찻주전자의 주둥이에 흘러내리는 찻물을 쓰윽 닦아 내며 주 상궁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설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이며 중얼거린다.

“애초에 고집이랄 게…….”

“내 고집이 왜?”

“……마마께서는 아랫것들의 말도 항상 귀담아 들어주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어색한 억지웃음을 짓는 주 상궁이 하는 말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고는 있다.

이설은 아랫입술을 볼록하게 내밀며 고개를 옆으로 젖혔다.

“내가 줏대가 없나?”

“그리 말씀드리지는 않았습니다.”

“줏대가 없으면 모를까 내 눈치도 없는 줄 아나? 솔직히 말해 보게. 내가 그리 줏대가 없어?”

포단을 정리한 뒤 얼른 자리를 뜨려던 주 상궁이 오도 가도 못 하고 이설 앞에 붙들렸다. 찻물에 젖은 면포를 손에 꽉 쥐고 고민하는 얼굴을 하기는 했지만 대답이야 이미 불 보듯 뻔했다. 농담 삼아 하는 말이었지, 상대를 곤란하게 하고 싶은 심술은 없었던지라 이설이 곧 푸스스 웃음을 지었다.

“뭘 그리 심각하게 고민을 하나. 내 고집 없고 줏대 없는 것이야 나도 알고 있지.”

어렸을 때부터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왜 그리 고집이 없냐는 핀잔을 하루 온종일 들었다. 괄괄한 누이들이 제 몫을 탐내도 그러려니, 고집불통 형님들이 아닌 걸 맞다고 우겨도 그러려니. 옆에 있는 사람만 속이 답답해 이설을 붙들고 그러지 말라 핀잔을 주면 또 샐쭉 웃으며 그러겠다, 하고 유야무야 넘어가기 일쑤였다.

나이가 들며 좀 고쳐졌다고는 해도 타고난 천성을 완전히 뒤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만 나가 보라며 손을 젓는 이설을 보고도 주 상궁이 자리에 하염없이 서 있었다. 할 말이 남았느냐 물으니 한숨을 길게 쉰다.

“그래서 걱정입니다.”

무뚝뚝한 얼굴 위에 진 그늘이 새삼 어두웠다.

“뭐가 말인가?”

“가끔은 이유 없이 고집도 부리시고, 아닌 걸 맞다고 우겨도 보시고, 안 되는 걸 되게 하라 화도 내시고 그래야 하는데 마마께서는 통 그런 일이 없으시니 걱정이 될 수밖에요.”

말을 잘못 이해했나 싶었다. 아니면 유약하고 철없는 자신을 에둘러 비난하는 새로운 화법인 걸까. 고개를 갸우뚱 기운 채로 맹한 표정을 짓는 이설을 보고 주 상궁은 다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진 걸 다 양보하시며 너무 착하게 사실 필요 없습니다. 특히나 여기 금의 황궁에서는요.”

주 상궁이 성큼 다가와 이설의 앞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갑자기 무게를 잡고 진지한 얘기를 꺼내는 바람에 당황한 이설이 몸을 뒤로 빼며 물러났다.

“나는, ……나는 자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선한 사람이 아니야.”

“차라리 그랬으면 오죽 좋겠습니까.”

“…….”

“마마.”

“응.”

“혼자 너무 깊이 고민하지 마시고,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일단 결정을 내리신 뒤라면 다른 눈치를 볼 필요 없습니다.”

오랜 세월 고된 일로 거칠어진 손이 이설의 무릎 위에 살포시 포개어졌다. 그저 장난 삼아 농담을 했던 것뿐인데 그 일로 이런 위로와 조언까지 받다니, 이설이 얼떨떨한 얼굴로 주 상궁의 손등을 슬슬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는 이내 따뜻한 온기에 마음이 가라앉으며 새삼 저같이 둔한 백치에게 주 상궁처럼 눈치 빠른 사람이 곁에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네 말 무슨 말인지 잘 알겠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는 마.”

“마마께서 고집이 없고 줏대가 없고 눈치가 없으신지 소인은 잘 모르겠사오나,”

주 상궁도 제가 눈치 없는 줄은 진즉 알고 있었나 보다.

“누구보다 영민하시고 배움이 빠르시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

“뭐든 시키실 일이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이설이 포갠 손 위로 주 상궁이 다른 한 손을 더 겹쳤다. 위로와 조언, 그리고 무한한 신뢰까지 주는 눈빛에 다른 의미가 있다고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이설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난 주 상궁은 곧 평소의 무뚝뚝하던 때로 돌아갔다. 곧 조반을 준비하겠다는 말에 이설이 너무 이르다며 툴툴거리자 자신이 말하던 건 이런 고집이 아니었다 단호하게 잘라냈다.

주 상궁이 나가고 혼자가 된 이설은 멍하니 자리에 앉았다. 미지근하게 식은 차라도 한 잔을 다 비우고 나니 몸이 적당히 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노곤하니 이대로 누우면 잠이라도 금방 들 것 같다.

이설은 손으로 턱을 괴고 팔꿈치를 탁자에 받쳤다. 초점 없는 시선은 멀리 바닥을 향했다. 아침에 일어나는 일만으로도 이미 기진맥진해진 상태로 체념해 있던 이설에게 주 상궁의 말은 정신을 번쩍 깨웠다. 이리 멍하니 앉아만 있을 때가 아니었다.

“주 상궁!”

앉았던 의자에서 튕기듯 밖으로 뛰쳐나간 이설이 텅 빈 복도에 주 상궁을 불렀다. 가뜩이나 궁에 일손도 부족한데 별일이 없어도 항시 제 침소 앞에 교대로 서 있는 아이들을 괜히 물렸나 싶다.

이설의 큰 소리에 가까이 있던 단향이 화들짝 놀라 후다닥 뛰어왔다. 급히 주 상궁을 찾으니 영문도 모른 채 아궁이 방에 있던 주 상궁을 찾아 함께 뛰어 왔다.

“급히 찾으셨다니, 무슨 일이십니까 마마.”

방금까지 함께 있을 때도 별말 없던 이설이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저를 찾아 침소로 당기자 주 상궁이 당황했다. 볼이 붉게 상기된 이설이 주 상궁의 양팔을 꽉 쥔 채로 눈을 깜빡였다.

“잠깐 갈 곳이 있으니 채비해 주게.”

“조반도 드시지 않고요?”

“그래.”

“어딜 가시기에 이리 급하게,”

“무암궁.”

“……예?”

“무암궁에 가 볼 생각이야.”

“무암궁을, 지금……, 말씀이십니까?”

설마 하며 묻는 주 상궁을 똑바로 마주하며 이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바로 채비해야겠어.”

“마마,”

“내 이 꼴을 하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

할 말을 잃은 주 상궁을 내버려 둔 채 이설은 면경 앞에 앉았다. 여인들처럼 찍어 바를 것은 없지만 젖어서 산발이 된 머리를 하고 찾아갈 곳은 아니었다. 빗으로 손수 머리카락을 빗어 넘기며 고개를 돌려 주 상궁을 불렀다.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주 상궁의 의아함 가득한 얼굴이 면경에 비쳤다. 할 말은 많은데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걱정 말게. 무암궁의 여인이 왜 입궁하였는지는 나도 알고 있어. 그보다 난 자네가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게 더 놀라워.”

“마마께 직접 말씀드리지 않은 것은 저 역시 마마께서 이미 다 알고 계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자네 생각에는 내가 무암궁을 먼저 찾아가는 것이 너무 경솔한 것 같은가?”

속내를 정확히 간파했다는 생각으로 주 상궁에게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단호하게 ‘아닙니다’였다. 아직 물기가 남은 머리카락을 면포로 꾹꾹 눌러 말리며 주 상궁은 조곤조곤하게 대답했다.

“마마께서는 충분히 그러실 수 있는 위치이십니다. 자리에 의심을 품지 마세요.”

“그나저나 적당한 구실이 필요한데.”

“양화성 산 깊은 곳에서 오신 분께 황궁의 향신료 가득한 음식은 입에 맞지 않으실 겁니다.”

“그럴 수 있지.”

“황궁 내명부의 큰 어른 되시는 마마께서 다들 꺼려 하는 이민족의 손님을 직접 준비한 음식으로 귀하게 맞아 주시는 것도 꽤 보기 좋은 귀감이 되겠지요.”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지.”

면경에 비친 이설의 창백한 얼굴이 해사하게 웃었다.

*

갈 길이 짧지 않으니 가마를 타는 게 좋다 부득불 우기는 화홍의 말을 들었어야 했나 조금 후회가 됐다. 아무렇지 않게 얼마나 더 가야 하느냐 태연하게 물으니 이제 반쯤 왔다고 하니, 저도 모르게 기함을 토했다. 금의 황궁이 넓은 줄은 알았지만 매번 비운궁에서 조금만 멀리 벗어나도 놀랄 일이 많았다.

“힘드시죠, 마마?”

걸음이 점점 느려지는 이설을 보고 화홍이 물었다. 바리바리 싼 짐을 들고도 연신 씩씩하게 잘만 걷는 화홍에게 힘들지 않다 말하기도 민망했다.

“지금이라도 가마를 부를까요?”

“아니다, 됐다. 조금만 더 걸으면 되는데 뭘.”

“조금만이 아니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놀리는 건지 걱정을 하는 건지 새침하게 말하는 화홍이 짐보따리를 한 손에 쥐고 이설 이마에 흐르는 땀을 꾹 눌러 닦아 주었다. 이른 새벽 스며들었던 한기가 그리워질 정도로, 늦은 아침의 햇살은 뜨거웠다. 금의 겨울은 늦은 밤 찾아와 새벽이 지나면 사라지는 게 틀림없었다.

“그나저나 우리 마마께서는 마음씨도 고우시지. 황궁에 초대받은 것도 감지덕지하는 오랑캐 먹을 음식까지,”

“화홍아.”

“앗, 네! 송구하옵니다, 마마. 입버릇이 돼서……,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그런 말 하면 못쓴다.”

“앞으로 더 조심하겠습니다. 어휴, 저도 생각 없이 말하다 보니…….”

황궁 내의 대부분의 사람이 이민족들 천하게 여기고 낮잡아 본다. 그들 중 소수의 부족이 지난 수십 년간 벌여 온 행태가 있으니 좋게 볼 이유가 없다는 건 알고 있다. 그래도 개개인을 향해 오랑캐라 손가락질하는 것은 옳지 않다. 자신이 우 미인과 친하게 지낸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런 말을 입에 담는 것은 아무리 물러 터진 이설이라도 그냥 두고 보지는 않았다.

기가 팍 죽은 화홍에게 몇 차례 더 이설이 따끔하게 혼을 냈다. 과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제가 이렇게 혼내지 않으면 아마 저 없는 곳에서 주 상궁에게 눈물이 쏙 빠지게 꾸중을 들었을 것이다. 화홍이도 아마 주 상궁보다야 자신에게 맞는 매가 더 낫다고 생각할 것이다.

혼쭐이 난 화홍이 풀이 죽어 입을 닫았다. 이제는 인적도 드물어진 황궁의 사이 길을 한참 지나자 멀리 낡은 궁이 보였다. 담 안쪽으로 우거진 나무들을 보니 비운궁에 처음 입궁했을 때가 생각이 났다.

“저기가 무암궁입니다.”

일러 주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대문 앞을 지키는 금군이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왔다.

“잠시 여기 계세요. 제가 가까이 가 보겠습니다.”

궁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설과 화홍을 두고 주 상궁이 다가갔다. 금군이 그 앞을 지키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왜 하지 않았을까. 너무 성급했던 것은 아닌지 제 행동에 약간 회의감이 들었다.

대문 앞에 선 금군은 금군대로 이설을 보고 당황한 눈치였다. 주 상궁이 가까이 다가서자 창으로 문의 출입을 막았지만 흘끔거리며 이설의 눈치를 살폈다. 이설은 그게 단순히 황제의 명으로 자신을 막아야 하는 껄끄러운 상황에 놓인 것을 불편해하는 것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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