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151화
새벽녘 동이 막 트기 시작할 무렵 이설이 눈을 번쩍 떴다. 이불을 둘둘 말아 웅크린 몸은 땀이 흥건했고 얼굴을 파묻은 베갯잇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깜빡깜빡. 눈을 뜬 자세에서 몸이 굳어 움직이지도 못했다. 한참 동안 눈만 깜빡이며 숨을 몰아쉬던 이설은 몸을 누인 장소가 제 침소라는 걸 깨닫고 나서야 온몸에 힘을 풀었다. 부드러운 비단 포단 위에 몸이 녹아내리며 긴장이 풀렸다.
어젯밤 우찬이 다녀간 이후 멍하니 앉아 있다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어질러진 술상 주변을 치우며 제 눈치를 살피는 궁녀들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모든 게 꿈처럼 비현실적인 일로만 느껴졌다.
혼절하듯 잠이 든 이설이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는 분명 비운궁이 아니었다. 하얀 꽃잎이 흩날리며 멀지 않은 곳에 달을 비춘 호수가 보였다. 수면에 뜬 달 위로 꽃잎이 사뿐히 내려앉는 것을 조용히 쳐다보던 이설이 한참이 지난 뒤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다. 생각해 보자면 너무 이상하지만 그리 낯설지도 않은 무언가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하면 제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걸까. 붉은 불꽃이 타오르는 봉황을 보고도 이제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꿈이로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게 다였다.
꿈이라는 걸 깨닫자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추한 몰골로 목이 터져라 울어 대도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이설은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어 젖히기 시작했다.
눈가를 훔치는 소매가 흠뻑 젖기 시작할 때쯤 스산한 바람에 시렸던 목덜미에 훈훈한 공기가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봉황이 근처까지 다가와 멀뚱히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가까이서 본 봉황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몸집이 컸다. 선명히 타오르는 불꽃은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오면 살가죽이 다 녹아 버릴 것처럼 강렬했다.
하지만 슬픔이 목전까지 차오른 이설이 지금 걱정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빤히 제 얼굴을 들여다보는 봉황의 눈빛조차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는 것 같아 더 서러워졌다. 다시 눈물이 와락 쏟아지는 이설에게 봉황이 천천히 다가왔다.
“……가.”
훠이 저은 손이 일렁이는 불꽃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뜨거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설의 손짓을 무시하고 봉황이 가까이 다가와 이설에게 몸을 숙였다. 이설의 쪼그린 다리에 머리를 부비적거리는 게 꼭 삼설이가 하는 짓 같았다.
눈물을 멈춘 이설이 머뭇거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봉황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살가죽이 녹아내리는 일은 없었다. 적당한 온기가 손바닥에 스미자 안심하며 천천히 불꽃 위를 쓰다듬었다.
이설의 손길에도 얌전히 머리만 비벼 대던 봉황이 갑자기 한쪽 날개를 펼쳐 들었다. 몸집보다 더 큰 날개가 펼쳐지자 놀란 이설이 손을 내렸다. 그러자 봉황이 제 부리를 써 날개에 꽂힌 타오르는 깃털을 뽑아 이설에게 내밀었다.
아직 무서운 마음이 드는 한편 얼마 전 태자가 당부했던 말이 생각나 잠시 망설였다. 역시 받는 게 좋을까 싶어 손을 내밀려고 하던 찰나 오래 기다릴 수 없었던 모양인지 봉황이 부리로 물고 있던 깃털을 이설의 발에 뱉듯 던져 놓았다.
풀 위를 밟고 있던 하얀 맨발에 붉게 타오르는 불꽃이 비현실적일 만큼 느린 속도로 떨어져 내려왔다. 그리고 발 위에 닿는 순간 불구덩이에 맨살을 밀어 넣은 듯 끔찍한 고통과 함께 이설은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하아.”
가만히 누운 채로 간밤의 꿈을 짚어 나간 이설이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텅 빈 속을 눈물로만 채울 정도로 슬펐던 감정이 한 번에 날아갈 만큼 끔찍한 고통이었다. 뜨거운 찻잔에 손이 덴 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꿈에서 깬 아직까지도 감각이 생경하다.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킨 이설이 바닥에 두 발을 내렸다. 지난밤 깨진 사기 조각을 밟고 살이 찢어지는 바람에 급한 대로 주 상궁이 무명천으로 한쪽 발부터 발목까지를 동여매어 놓은 상태였다. 약간 따끔한 느낌은 있지만 불에 덴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저 꿈이었다는 걸 눈으로 확인한 이설이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괜히 태자의 말을 들었다는 생각을 했다가 이내 혼자 피식 웃고 말았다. 이깟 걸로 지금 누굴 원망하는지 스스로가 딱할 지경이다.
하여간 별 괴상한 꿈을 꾸었다. 태자가 오거든 모두 말해 줄 생각이다. 발등에 떨어진 불꽃 조각에 하마터면 발이 다 녹아 버릴 뻔했다 하면 태자는 아마 세상 누구보다 안쓰러운 얼굴로 저를 걱정해 줄 터였다. 고작 열 살 남짓 어린아이에게 걱정과 위로를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한심한지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우찬이 완전히 멀어진 이제는 누구라도 옆에 있지 않는다면 더 이상 버텨 낼 자신이 없었다.
자리에 누워도 다시 잠이 들 것 같지 않은 이설이 바람을 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화염에 휩싸인 듯 왼쪽 발목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전에 우찬에게 떠밀려 침상 위로 넘어지며 다친 발목이 어제 일로 다시 안 좋아졌나 보다.
제 몸은 어디 하나 성한 구석이 없다 자조 섞인 생각을 하며 이설은 대수롭지 않게 후원으로 저는 걸음을 떼었다.
*
연회가 닷새 앞으로 다가왔다. 비운궁 밖에서는 연회 준비로 한창 바쁠 때라고 하지만 이설의 하루는 여느 날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더 한가해진 기분이다. 며칠째 찾아오는 이도 없는 궁은 고요하고 쓸쓸했다.
“마마, 볕이 이리 따가운데 여기 앉아 무얼 하십니까?”
“그냥. 저기 핀 금잔화가 볕 아래에서 매일 같이 무슨 생각을 할까 따라 앉아 보았다.”
“……예?”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은 채로 앉아 있는 이설에게 말을 건 단향이 당황했다. 아무래도 이설이 저와 얘기를 나누고 싶지 않아 어려운 말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는지, 적당히 대답한 뒤 물러나려는 것을 이설이 붙잡았다.
“연화는 아직 안 돌아왔느냐?”
“슬슬 돌아올 참입니다.”
“그래, 알았다.”
어깨가 축 늘어지는 이설을 단향이 걱정스럽게 내려다봤다. 그러다 이내 총총총 궁 안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오래 지나지 않아 꽃잎을 띄운 냉차를 내왔다. 시큼 달달한 붉은 냉차는 제 입맛이 아니지만 땀을 뻘뻘 내 즙을 내어 왔을 단향을 생각해 군말 없이 마셔 주었다.
되도 않는 금잔화 핑계를 대고 멍하니 앉아 있던 시간은 곧 연화과 궁에 돌아오며 끝이 났다. 볕에 뜨끈해진 이마를 젖은 면포로 닦아 내며 연화와 마주 앉았다.
“태자 전하의 일은 알아보았느냐?”
“예, 마마.”
급하게 오느라 숨을 헐떡이는 연화에게 이설이 남은 냉차를 건네주었다. 이설이 남긴 찬거리는 모아서 잘도 나눠 먹지만 직접 입이 닿았던 잔을 사용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한사코 사양했다.
“다행히 태자 전하께서는 무탈하시다 합니다.”
“그래?”
“저, 다만…, 그게……,”
노곤해진 얼굴에 비로소 화색이 도는 이설을 보고 연화가 말끝을 흐렸다.
며칠째 찾아오지 않는 태자가 걱정돼 연화를 보내 태자의 안부를 알아 오게 했다. 걱정과는 달리 존체 무탈하다는 소식을 전하며 ‘다만’이라고 말끝을 흐려야 하는 것을 보니 제게 좋은 얘기를 전하려는 것은 아닌 게 분명하다.
“얼마 전 폐하께서 소봉궁을 다녀가셨다 합니다.”
우물쭈물하며 연화가 들은 얘기를 전했다.
“원래는 학운관에 전하를 뵈러 가셨는데 하필 전하께서 그날 글공부를 거르시고 소봉궁에서 민가의 서책을 읽고 계셨나 봅니다. 그 일로 폐하께서 심히 노하시고……,”
“해서 전하께 다시 금계령이라도 내리셨다는 게냐.”
다시 말끝을 흐리는 연화를 재촉하며 이설이 물었다. 연화는 차라리 그런 거라면 더 나았을 것 같다는 얼굴로 말했다.
“……비운궁의 출입만을 금한다 명하셨답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이설은 입을 꾹 다물었다. 태자가 사정이 있어 찾아오지 않는 줄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 뒤에 황명이 버티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우찬은 아무래도 자신을 비운궁 안에 가두고 아무도 만나지 못한 채로 쓸쓸히 죽기를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아닌 게 아니라, 우찬이 떠난 뒤로 아무도 비운궁을 찾지 않고 있었다. 가뜩이나 찾아오는 이도 없는 궁이었는데 그나마 안부나 묻고 지내던 태자와 차란이 없으니 마치 궁에서 아예 존재가 지워진 듯했다.
하물며 아침마다 궁 앞뜰에 쌓이는 진상품도 뚝 끊겼다. 그게 아쉽지는 않았지만 황궁 내에서 제 입지가 다시 얼마나 하찮아졌는지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는 걸 깨달아 씁쓸하던 참이었다.
“전하께서 글공부를 게을리하시는 게 마마 탓도 아닌데, 폐하도 참.”
이설이 대단한 죄책감이 충격이라도 받았다 생각한 모양인지 연화가 괜히 혼잣말로 툴툴거렸다. 이설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사실 제 탓도 반은 있었다. 태자가 글공부를 빠지고 저를 찾아온다는 걸 알았으면서도 내쫓지 않았다. 곤란하다는 얼굴로 결국 받아 주고야 마는 이설은 태자에게 충분히 쉬운 상대였다.
“뭐 그래도, 그리 오래 갈 일은 아닐 테니 걱정 마세요, 마마. 우리 태자 전하께서 잠자코 계실 분도 아니잖습니까?”
아직 시무룩해 있는 이설을 위로하며 연화가 활기차게 말했다. 태자 고집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우찬이야말로 쉬이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다. 황명은 태자에게 내려졌으나 고립되어 괴로울 사람은 자신이었다. 마치 태자를 통해 제게 하는 경고처럼 느껴졌다.
“…그래. 아침부터 수고했다. 그만 가서 쉬거라.”
“아, 맞다.”
자리를 툴툴 털고 일어나려던 연화가 손뼉을 마주치며 다시 앉았다. 무슨 일인지 묻기도 전에 품을 뒤져 비단 겉싸개에 접힌 서신을 내밀었다.
“오는 길에 차란 님을 만났는데 마마께 전해 드리라 하였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접합부를 묶은 끈에 찍힌 인장이 익숙하다. 연국에서 온 답신이었다.
“제깟 것은 감히 열어 보지도 않았으니 걱정 동여매시고, 차란 님께도 꼭 그리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마마!”
차란이 서신을 전해 주며 절대 열어 보면 안 된다 신신당부를 한 모양이다. 이설이 알았다 대답하며 연화를 궁 안으로 들여보냈다. 어차피 열어 보았다 한들 읽지도 못했을 테니 별 의심도 없었다.
항간에 연국 왕의 지병이 악화되어 자리에 몸져누웠다는 소문이 떠돈다 들었다. 이따금 궁 밖에 나가 이설의 보약을 지어 오는 주 상궁이 전해 준 얘기였다. 아바마마가 오랫동안 지병으로 고생한 것은 사실이지만 앓아누울 정도의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 괜한 소문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걱정이 안 되는 것도 아니라 부득불 차란에게 부탁하면서까지 답신을 받고자 했다.
끈을 풀고 안에 든 서신을 꺼내 들었다. 답신은 이설이 떠날 때 가장 서럽게 울어 주었던 누이가 쓴 것이었다.
글의 서두는 누이와 함께 키운 나무에 꽃이 피고 지며 열매가 열린 것부터 날씨가 무척 쌀쌀해졌다는 내용이 주를 이었다. 그 뒤로는 이민족들이 연에서 금까지 향하는 길목들을 막아선 탓에 서신을 주고받는 것이 당분간은 어려울 것 같다는 아쉬움과 막내 누이의 회임 소식을 전하는 기대감 등 전하고 싶은 여러 이야기가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었다.
그리고 긴 글을 한참이나 읽어 내려간 후에야 이설은 가장 궁금하게 여기는 것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 있었다.
「아바마마는 곧 달로 돌아가실 거야. 너를 무척 보고 싶어 하셔, 이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