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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150)화 (150/300)

달의 황홀경

150화

황제는 동이 트기 전 황궁에 남아 있는 호위군을 모두 집결하여 새벽 사냥을 갔다. 뒤늦은 보고에 금군들이 뒤를 따라붙으려 하였지만 따라오지 말라 모두 내치고 최소한의 인원만이 동행했다.

오랜만에 찾은 나덕산은 이전 우장절 때 생긴 작은 산사태로 경치가 조금 변했다. 평소 이용하던 산길도 군데군데 끊겨 길을 돌아야만 했다. 흙이 사람 높이만큼 쌓인 길에서 말 머리를 돌릴 때마다 우찬은 낮게 욕지거리를 뱉었다.

그래도 사냥 수확은 좋은 편이었다. 우찬 혼자 사슴 두 마리와 여우 한 마리 그리고 토끼 한 마리를 잡았다. 오랜만에 목표물을 겨냥하여 활시위를 팽팽히 당기니 하산하는 길에 어깨가 좀 뻐근했다.

“오랜만에 새벽 사냥은 어떠하셨습니까?”

궁으로 돌아와 씻고 궁녀들이 개복을 돕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던 윤 내관이 물었다. 어젯밤 궁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은 일로 다들 우찬의 눈치를 살피며 말조심을 하는 것에 비해서는 꽤나 여유가 있었다.

소매에 팔을 넣으며 우찬이 별스럽지 않게 대답했다.

“썩 즐겁지는 않았다.”

“그러셨습니까.”

“말 못 하는 네발짐승을 쫓아다니는 건 아무래도 좀 시시하지. 살려 달라 소리치는 비명도 없고.”

우찬의 머리를 만져 주던 궁녀가 흠칫 놀라 떨어트린 빗을 냉큼 집어 올렸다. 곁에 함께 있던 노련한 궁녀들은 겉으로 내색은 안 했지만 손길이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우찬을 모시는 데에는 누구보다 경지에 다다른 윤 내관조차도 순간 입술을 오므라뜨리며 할 말을 잃은 듯했지만 금세 표정을 풀었다.

“하온데 폐하, 어젯밤 비 승상으로부터 한 가지 말씀을,”

“황명이 맞으니 들은 대로 준비하라.”

괜한 것을 묻더라니, 이 얘기를 쉽게 꺼내기 위한 구실이었다. 윤 내관이 일말의 의구심도 내비치기 전에 우찬이 딱 잘라 말을 끊었다. 어젯밤 얼이 빠진 채로 궁을 나서던 차란이 윤 내관을 붙들고 하소연이라도 한 모양이다.

“따로 예식은 준비할 필요 없고 적당히 구색만 갖추는 걸로 하지.”

“하여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경미찬 연회가 끝난 뒤에 봉호를 내리시는 것이 어떠하십니까?”

옷을 다 갖추어 입은 우찬이 스르륵 뒤를 돌아섰다.

“노신의 짧은 생각으로는 큰 연회를 코앞에 둔 시점에 정1품 첩지를 내리시는 것은 시기상 맞지 않는 듯합니다.”

큰 연회를 앞두고 이제 막 첩지는 받은 여인에게 세간의 관심이 쏠릴 것을 염려하는 것이라면 납득할 만하다. 이러나저러나 어찌 되어도 상관없는 우찬은 고민도 하지 않고 좋을 대로 하라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세간살이 어느 것 하나 멀쩡한 게 남아나지 않았던 침소는 새벽 사냥을 나갔다 온 사이 말끔하게 정리가 되었다. 다만 부서진 벽이나 너덜너덜해진 창을 수리하기에는 모자란 시간이었는지 아직 군데군데 지난밤의 난폭했던 감정이 남아 있었다.

흠집 난 벽의 모서리를 보고 있자니 어제의 기분이 다시 가슴께를 파고들었다. 아직 머리 장식이 한참이던 궁녀와 윤 내관을 모두 내보내고 우찬이 혼자 자리에 앉았다.

차란의 충고를 듣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랬다면 비운궁을 찾아가는 일도, 이설의 속마음을 굳이 들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내 부질없는 짓이라 여긴 것은 어차피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설이 제 약조만 믿고 하루하루를 견디는 이상 오래도록 모를 일도 아니었다.

그래. 무난한 듯 보였던 이설의 지난 시간들은 그저 견디고 버텨 낸 노력의 산물일 뿐이었다. 애틋하게 정을 주었던 보답은 끝내 받아 보지도 못한 채 손에서 놓치게 될 일이었다.

이 극도의 배신감으로 휩싸인 감정이 지난밤 궁을 소란스럽게 만든 건지는 확신할 수 없다. 이설이 언젠가 이 황궁을 나가겠다는 일념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는 걸 직감한 순간 머릿속에 무언가가 뚝 끊어져 나갔다는 것만 기억한다.

“폐하, 조례까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사근사근하게 우찬을 재촉하는 윤 내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답을 미룬 우찬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활짝 밀려 열리는 문 앞에 여러 궁인들이 머리를 조아렸다.

“태자에게 가 봐야겠다.”

잠자코 이설이 원하는 대로 시간이 흘러가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생각이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조례를 거르고 태자를 만나러 가겠다는 우찬을 의아해하면서도 윤 내관은 내색하지 않았다. 이 시간이면 학운관 뒤편에 있는 전각에 계실 거라며 의연하게 길을 나섰다.

윤 내관의 말과는 달리 태자는 학운관 근처 그 어디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전각에서 혼자 서책을 읽던 태자의 늙은 스승만이 우찬을 보고 놀라 사색이 되었다. 당장이라도 졸도할 듯 벌벌 떠는 노승을 보니 대충 알 것도 같았다.

좋은 일로는 태자를 직접 찾아오는 일이 없는 우찬이 소봉궁에 나타나자 궁인들이 모두 혼비백산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우찬을 보자마자 냅다 달려오는 그네들의 처신에 조심성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태자는.”

“저, 전하께서는 지금 후……, 후원에 계시옵니다.”

“먼저 들어가 있겠다 전해라.”

쩍하고 벌어지는 궁인들이 만든 길을 지나 태자의 처소에 다다랐다. 안으로 들어가니 앙증맞게도 작은 의자와 탁자 위에는 글자도 그림도 아닌 것들을 아무렇게나 낙서해 놓은 종이들과 민가에서 유행하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을 한데 엮은 서책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태자가 글공부를 하려 읽는 종류의 서책들은 없었다.

“태자 해도원. 살아계신 성천자이시며 금의,”

“안으로 들어오거라.”

“……아바마마를 뵙사옵니다. 존체 평강하신지요.”

문이 열림과 동시에 문 너머에서 납작 엎드려 인사를 드리는 태자의 말을 끊고 간결히 명령했다. 종종걸음으로 태자가 들어온 뒤 문이 닫혔다. 허리만 가볍게 숙여 안부를 묻는 태자는 갑자기 찾아온 우찬 때문에 약간 당황한 눈치이기는 했다.

“평강은 하나 그게 네 덕은 아니지.”

“아무렴 아바마마께서 존체 평강하시다니 그걸로 다행인 거지요.”

제법 능숙하게 받아치는 태자가 맹랑하다 생각할 법도 하겠지만 지금 같은 기분에는 그런 감상이 생기지 않았다.

탁자에 비스듬히 걸터앉은 우찬이 탁자 위에 있던 서책과 종이를 천천히 바닥으로 밀어냈다. 책들은 후두둑 떨어지고 낱장들은 좌우로 이리저리 휘날리며 바닥에 쌓였다.

“이게 다 무엇이냐.”

“소자가 가끔 취미 삼아 읽는 민가의 서책들입니다. 내용이 세속적일 뿐 금서는 없습니다.”

“누가 네게 민가의 서책을 읽어도 좋다 하였느냐.”

“스승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태자는 제 대답이 무슨 질문도 무탈하게 넘길 수 있는 패라도 되는 양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우찬이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네 스승이라 하면 지금 학운관에서 홀로 너를 기다리고 있는 노승을 말하는 것이냐?”

“……소자에게 민가의 서책을 읽어도 좋다 허락하셨던 분은 단 가(家)의 소운 공자이셨습니다.”

태자가 툴툴거리는 말투로 쥐어짜 내듯 말했다. 어른스럽다고는 해도 아직 제 잘못을 뉘우치고 정정하는 데에는 서툰 어린아이가 분명했다.

우찬은 삐딱하게 걸터앉은 자세로 태자의 까만 머리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선대 황제와 황후를 반반씩 섞어 놓은 얼굴은 어릴 때는 그래도 황후 쪽으로 좀 더 기우는가 싶었는데 점점 자랄수록 선황의 모습을 닮아 갔다.

무표정한 태자가 슬쩍 눈을 치켜뜨며 우찬을 봤다. 그 모습이 마치 어릴 적 선황이 저를 훈계하며 엄히 쳐다볼 때의 모습 같았다. 선황이 살아생전 자신에게 당부했던 그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우찬이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웃음을 지워 낸 뒤 다시 태자를 바라봤다.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무척 낮았다.

“소운은 태자 너를 가르치기에 너무 큰 그릇이었다.”

“……소자, 아바마마의 말씀을 잘 듣지 못하였습니다.”

태자가 살짝 찌푸린 얼굴로 귀를 우찬 쪽으로 기울이며 대답했다. 우찬은 또렷하고 분명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태자 너를 천자에 올리기 위한 밑받침으로 쓰기에 단소운은 너무 큰 그릇이라 말하였다.”

“…….”

“소운이 계속 너를 가르쳤다 한들 네가 그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할 수나 있었겠느냐.”

태자에게 이렇게까지 냉정한 독설을 퍼부은 적이 없었다. 여태껏 따뜻한 말 한마디는 못 해 줘도 관심을 두고 눈에 담아 주었다. 누구에게나 한결같이 무심하고 냉랭한 우찬이 가장 애틋하게 돌본 한 사람이었다. 이설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우찬의 말에 태자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은 난생처음 느껴 보는 모욕감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간 배운 게 아주 쓸모없던 것은 아니었는지 곧 간신히 화를 참은 앳된 목소리가 낭랑하게 대답했다.

“그 그릇에 담길 만한 이가 하늘 아래 있기는 하겠습니까?”

“…….”

“단 공자가 앉은 자리에서 서책 일곱 권을 모두 외우시는 걸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건 노력해서 따라갈 수 있는 재주가 아닙니다.”

“네까짓 게 지금 노력을 운운하느냐? 글공부는 뒷전이고 비운궁으로 도망이나 다니는 해도원 네게 노력이라는 말이 얼마나 우스운지 스스로 느끼지 못하냔 말이다.”

“…….”

“네가 대체 천자가 되기 위해 하는 노력이 무엇이 있느냐?”

“왜 노력을 해야 합니까?”

기가 차서 헛웃음을 뱉는 우찬의 앞으로 태자가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왔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에 아이 특유의 오만방자한 자신감이 가득했다.

“소자는 이미 아바마마의 뒤를 이을 천자로 태어난 것을요. 천명은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놀랍구나. 그리 맹랑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속마음을 드러내는 일이 거의 없는 태자가 근간에 이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됐다. 놀랍다는 말은 태자의 태도를 비꼬기 위해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우찬이 웃음기 없는 날 선 시선으로 태자를 내려다봤다.

“네 말대로라면 나 역시 천자가 될 천명을 타고났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선황께서 그리 급히 하늘로 돌아가신 것도 모두 내 천명 탓이라, 이 말이냐?”

“그런 뜻이 아니오라…….”

허점을 찔린 태자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우찬이 한걸음 성큼 태자에게로 다가갔다. 태자가 한 발짝 가까이 다가온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넓은 간격이 한 번에 좁혀졌다.

“세 치 혀 놀리는 법을 배우고 싶거든 소운이 아니라 차란을 가까이했어야지. 그간 아까운 소운의 시간만 축냈어.”

“아바마마 소자는,”

“천명은 네게 아무것도 장담해 줄 수 없다. 나의 자리가 탐나거든 가만히 앉아 기다릴 게 아니라 네가 먼저 손을 뻗어야 할 것이다.”

“…….”

“천명은 그리 얻는 것이다.”

우찬이 다시 태자의 옆을 비껴 한 걸음 크게 내디뎠다. 그리고 다시 두 걸음 째 간격이 벌어졌을 때 태자가 원망스러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소자는 아바마마의 자리를 탐내지 않습니다!”

그간 우찬에게 갖은소리를 다 들었어도 큰소리로 한 번 대들어 본 적 없던 태자가 처음으로 원망 어린 소리를 내뱉었다.

“소자는 그저……, 그저, 아바마마의……,”

눈시울이 붉어진 태자가 기어이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흘려보냈다. 울먹이는 어린 목소리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끅끅 울음 참는 소리만 울렸다.

소리를 참으며 서럽게 우는 태자를 우찬은 두어 걸음 떨어져 가만히 쳐다만 봤다. 달래 주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태자의 원망은 받을지언정 자신은 옳은 길을 택한 것이었다. 어차피 이로 인해 짐을 지게 되는 것은 태자가 아니라 자신이다.

우찬의 퍼석하게 마른 입술이 움직였다.

“금일 이 순간부터 태자 해도원의 비운궁 출입을 금한다.”

그리고 이렇게 치러진 대가는 마침내 이설로 돌려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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