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149화
“폐하 이게 다 무슨 일……,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가까이 다가가려 한 발 내딛은 아래에 나무판자가 우지끈 소리를 내며 반으로 뚝 부러졌다. 이 난장판을 만들어 놓고 몸이 성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곳곳에 놓아두었던 등잔도 거의 다 깨진 터라 시야가 무척 어두웠다. 가까이 가서야 자세히 보게 된 황제는 흐트러진 의복을 빼고는 낮에 봤을 때와 별반 다를 게 없는 모습이었다. 미약하게 술 냄새가 풍기기는 하지만 술주정으로 이 꼴을 만들어 놨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폐하?”
주변이 어두워 자신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황제에게 철저히 무시당했다.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난 황제는 차란을 스쳐 지나갔다. 발 디딜 틈 없는 바닥을 그냥 마구잡이로 밟으니 걸음걸음마다 소름 끼치는 파열음이 생겼다.
침소 한쪽의 턱을 오른 황제가 커다란 비단 방석에 앉았다. 뒤를 따른 차란은 발치에 잔해들을 툭툭 밀어내고 아래에 앉았다.
자리에 비스듬히 누워 앉은 황제가 한 팔로 문갑을 뒤적거렸다. 장죽을 찾는 모양이었다. 몇 해 전 황제가 장죽 피우는 것이 뜸해졌을 무렵 차란과 윤 내관이 작당하여 냉큼 치운 터라 아마 찾지 못할 것이다. 화라도 벌컥 내면 어쩌나 노심초사하는 차란의 걱정과는 달리 황제는 찾는 물건이 없자 곧바로 손을 거두었다.
“신을 찾으셨다 들었습니다. 하명하시지요.”
더는 기다려도 황제가 먼저 입을 열 것 같지가 않아 차란이 공손히 재촉했다. 못 들었을 게 아닌데도 황제는 그러고도 한참을 침묵하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연회가 얼마나 남았지?”
침묵이 길어질수록 근심만 쌓이던 차란이 황제 몰래 이맛살을 찌푸렸다. 긴장했던 것에 비해 시시한 첫마디였다.
“보름 남짓 남았습니다.”
“준비는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느냐.”
“예년보다 준비 기간이 길어 꽤 여유 있게 진행되는 듯합니다. ……송구하오나 올해 연회는 신이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하였습니다.”
까닭까지 설명하자니 너무 구차해 보여 이만 말을 줄이겠지만 올 한 해 맡은 일이 너무 많았다. 자고 일어난 황제는 돌연 사내의 이름을 가지지를 않나, 그리하여 입궁한 사내 후궁은 가만두면 보기 딱하여 절로 마음이 쓰이지를 않나. 거기에 황제는 난데없이 습격을 당하는가 하면, 내내 잠잠하던 북방 이민족들의 침입은 무시할 수준을 넘어섰다.
그리고 화룡점정으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무암궁의 연이설까지. 수습되지도 못하는 일이 계속해서 터지기만 하는데 이 와중에 그깟 연회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래?”
무능하고 쓸모없다 핀잔이라도 쏟아 낼 줄 알았던 황제는 ‘그래?’ 한 마디에 이해와 수긍을 한 번에 담고는 차란을 탓하지 않았다.
“무암궁에 대해서는 어디까지 알아봤지?”
“그, ……아직 말씀드릴 수 있을 만큼 알아낸 것은 없습니다만…….”
황제가 무암궁의 연이설을 의심한다는 것을 알게 된 지 이제 막 반나절이 지났다. 믿을 만한 사람을 추려 도화성에 보내도 시일이 걸리는데, 그걸 벌써 물으니 의미 그대로 말문이 막혔다.
“퇴궐하기 전에 무암궁 상궁에게 잠깐 듣자 하니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은 없다 합니다. 종일 침소에 있거나, 혼자 후원에서 나무를 가꾸는 일로 시간을 보내시는 모양입니다.”
‘……자기가 꼭 루 소의 마마라도 되는 양 말입니다.’
차란은 무암궁 상궁에게 말을 그대로 전하면서도 마지막 말만은 확실히 함구했다. 못마땅한 시선을 무암궁 쪽으로 흘기며 말하는 상궁은 출신도 불분명한 이민족 여인을 윗전으로 모시는 게 썩 달갑지가 않은 모양이었다. 상궁의 말로는 몇 안 되는 궁인들 모두가 그녀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하였다.
“폐하께서 허락하여 주신다면 신이 직접 이설 님을 만나뵙,”
“듣기 싫다.”
내내 나른하던 황제가 날카롭게 차란의 말을 끊었다. 황제의 불편한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은 차란이 잽싸게 입을 닫았다.
“다들 하나같이 누굴 더러 이설이라 부르는 것이냐. 황궁에 연이설은 유일하다.”
묻지 않아도 그게 누구인지 알 것 같은 차란은 끙, 하고 속으로 신음만 뱉었다. 슬슬 골치가 아파 온다 싶더니, 곧이어 황제가 퇴궐하는 저를 붙잡아 데려온 이유를 알게 됐다.
“무암궁 안주인을 정1품 숙비에 봉한다. 황궁 어느 누구도 감히 그 이름을 올리는 자가 없게 하라.”
“폐하!”
상상도 못 한 황명에 놀란 차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비명처럼 터지는 목소리가 지금 차란이 얼마나 당황스러운지 알려 주었다. 어지간해서는 당황하는 법이 없는 차란이 놀란다 싶으면 그 원인은 늘 황제였다.
“이후로 이설의 이름을 함부로 올리는 자가 있다면 엄히 처벌할 것이다.”
“폐하, 그 뜻은 알겠사오나 첩지를 내리신다니요. 이 무슨……!”
차란이든 윤 내관이든 다른 이가 무암궁 이설의 이름을 올릴 때면 황제가 눈살 찌푸린다는 것을 진작 눈치채기는 했다. 그래도 그렇지 갑자기 첩지를 내리는 건 납득하기 어려운 처사다. 심지어 정1품 숙비라니, 금국에서 가장 명성 높은 무가 출신 양 소원도 정2품 소원에 그쳤고 하물며 왕족 연이설도 소의 첩지가 고작이었다.
그런데 출신도 불분명하고 그것마저도 의심스럽기 짝이 없는 여인에게 정1품 숙비 첩지라니. 사정을 아는 차란도 이 정도인데 다른 대신들이 반발을 일으키지 않을 리가 없었다.
“신이 다른 방도를 찾아보겠습니다.”
“황명은 번복하지 않겠다.”
여간해서는 마음을 바꿀 것 같지 않은 황제를 직감한 차란이 눈을 질끈 감았다.
“루 소의 마마를 생각하신다면 절대 이러실 수 없습니다, 폐하.”
뭐가 날아와도 진작 날아왔었어야 했다. 숨까지 멈추고 기다리던 차란이 슬쩍 눈을 떴다. 뿌옇게 흘린 시야에 들어온 황제는 미동도 없었다. 표정까지는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딱히 좋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얼굴인 것 같다.
이런 결정을 내리시라고 오늘 낮 목이 댕강 날아갈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고 간언을 드린 게 아니었는데. 차란은 속이 다 썩어 문드러져 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곧 무례한 말을 성급하게 뱉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차란이 자리에 부복하여 이마를 바닥에 조아렸다.
“송구하옵니다. 신이 감히 폐하께 주제넘은 말씀을 드리,”
“약조를 기억하고 있었어.”
“……무슨, 약조 말씀이십니까?”
조아린 고개를 빼꼼 들며 차란이 물었다.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차란 더러 들으라며 하는 소리인지도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작았다.
황제가 비스듬히 눕힌 상체를 일으켜 세워 자리에 꼿꼿하게 앉았다. 평소보다 나른해 보이더라니, 풀어 헤친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로 검은 먹물처럼 흘러내렸다.
머리 색과 대비되는 하얀 피부는 근래 사냥을 가지 못하며 더 환해진 느낌이었다. 게다가 오늘따라 낯빛이 더 창백한 것이, 지하에서 올라온 아름답고 난폭한 야차라도 마주한 기분이다. 확실히, 이설의 이름을 꺼내고 난 뒤 분위기가 더 무거워졌다.
“내가 상황으로 물러나면 연국으로 돌려보내 주겠다는 약조를 연이설이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그야…….”
‘그날이야말로 마마께서 손꼽아 기다리시는 날이 아니겠습니까‘ 하며 자연스레 나오려던 말을 가까스로 삼켰다. 입궁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야 그랬을지 몰라도 아직도 이설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을 거라는 장담은 자신이 할 수 없었다.
“기억만 하고 있는 게 아니야. ……그날만 아주 염원하고 있더군.”
“염원이라니…….”
“그 순해 빠진 천치가, 내가 약조를 지키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지 손까지 부들부들 떨며 물었다.”
“…….”
“정녕 저를 돌려보내 줄 생각이 있기는 하냐고.”
붉은 입술 한 쪽 끝이 삐뚜름하게 상승 곡선을 탔다. 황제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저게 좋은 징조를 보이는 웃음은 아니라는 걸 뻔히 알만한 분위기였다. 차란은 비로소 궁이 난장판이 된 이유를 정확하게 알아차렸다.
“하여 뭐라 답하셨습니까?”
“없다 대답하면 당장 내일이라도 도망칠 기세더군.”
“그럼 약조를 지키겠다 답하신 겁니까?”
“때가 되면 연국으로 돌려보내 주겠다 하였지.”
황제가 덤덤히 대답하자 차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겉보기에만 아름다울 뿐 속이 시커먼 야차가 이리 순순히 손에 쥔 것을 놓을 리가 없었다.
“정말 루 소의 마마를 연국으로 돌려보내실 생각이십니까?”
차란이 조심스레 물으며 허리를 폈다. 허공에서 황제와 눈이 마주치자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처음 보는 것도 아닌 황제의 미소지만 이만큼 거짓 없이 진심인 적도 없었다.
“아니.”
“…….”
“연이설은 그 머리카락 한 올조차도 이 황궁 밖을 벗어날 수 없다. 설령 그 몸이 죽고 닳아 백골이 된다 해도 황궁을 떠날 수 없어.”
“…….”
“평생을 헛되이 기다려도 연국으로 돌아가는 날 따위는 오지 않을 것이다.”
할 말을 잃은 차란이 자리에 앉은 채로 굳었지만 황제는 차란이 제 말을 듣는지도 별 상관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려면 적당한 명분이 필요하겠지.”
“무슨 명분 말씀이십니까.”
“약조한 것은, 내가 상황으로 물러나면 이설 역시 황궁을 떠나게 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부디 지금 하는 신의 생각이 틀리기를 바라옵니다.”
문득 스쳐 지나가는 황제의 예상 가능한 말을 부정하며 차란이 대놓고 황제에게 애원했다.
“비차란. 내가 너에게 약조했던 기간이 몇 년이었느냐.”
“……12년. 길어도 15년을 넘기지 않겠다 하셨습니다.”
차란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이제는 기억도 안 나는 오래전 어느 날 밤이었다. 지금보다 조금 더 앳된 얼굴로 막 즉위한 황제가 차란을 불러 말했다. 아무리 길어도 15년 안에는 황위에서 물러날 테니 그때까지만 승상 자리를 지켜 저를 보좌해 달라고.
그때쯤이면 이미 황명이 되어 차란이 거절할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황제가 처음으로 제게 청을 하였다. 벗으로서 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이라는 말에 덜컥 승상이 되었다. 장사치의 아들이 나랏일을 맡아 돌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지만 잘 버틴 세월이 몇 년, 그리고 잘 버텨 볼 세월이 앞으로 몇 년이었다. 슬슬 끝날 기미가 보인다 생각했는데 이 무슨 청천벽력같은 소리인지 차마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네게 하명할 것이 있어 부른 게 아니다, 차란.”
황제가 처음으로 차란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차란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다시 이마를 바닥에 박았다.
“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네게 사과하마. 그때의 약조는 지키지 않겠다.”
“…….”
“나는 결코 이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
“그리하여 연이설은 절대 나와 이 황궁을 못 벗어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