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146화
“서고에 새로운 서책이 많이 들어왔다 하는데, 요즘은 통 가지 않으시는 모양입니다.”
“그러고 보니 서고에 가지 않은 지도 꽤 오래된 것 같네요.”
무슨 일이 그렇게 많았는지 그 좋아하는 서고에 가본 지도, 마음 편히 서책을 쌓아 놓고 읽은 지도 오래됐다. 잡생각이 많을 때는 의미 없는 노동이 최고다. 잡초를 뽑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우찬의 명으로 제 동태를 살피러 온 건 아닌지 의심이 됐던 차란은 이설의 얘기는 안부나 잠깐 묻고는 순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바다 건너 해국에만 산다는 크기가 집채만 한 동물, 기이한 재주를 가진 사람들, 항간에 떠도는 등골이 오싹한 괴담 등 차란은 찻주전자 하나를 다 비울 때까지도 쉬지 않았다. 다 이웃 나라들과 교역을 하며 얻은 이야깃거리라고 한다.
“저, 근데 요즘 국경을 넘는 일이 무척 어렵다고 들었습니다만 상단의 교역에는 피해가 없으십니까?”
“저희 상단조차 국경을 넘지 못하는 때를 바로 전시라고 합니다.”
차란이 장난스럽게 말하며 웃기는 했지만 농담은 아닐 터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이설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혹시 연국의 국경을 넘는 일은……?”
“다소 시간이 걸릴 뿐, 아직까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차란의 말을 듣자 금세 이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좀 염치가 없긴 해도 당장 그런 것을 따지고 들 때가 아니라 ‘그럼,’ 하고 신중하게 말을 꺼내려는 그때, 차란이 기분 좋게 웃으며 먼저 말했다.
“연국으로 보낼 서신이나 물건이 있으면 편히 말씀하십시오.”
이설이 수고스럽게 먼저 청하기 전 눈치 빠른 차란이 부담을 덜어 주었다. 인사치레처럼 불필요한 거절은 집어치우고 이설은 기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차란에게 거듭 고마움을 전한 뒤 곧바로 탁자 위에 종이를 펼쳤다. 고이 모셔 두었던 목탄필을 꺼내 드는 걸 보고 차란은 꼭 제가 준 것처럼 흐뭇하게 웃었다.
“급한 사안이신가 봅니다.”
“예 조금……. 잠시만 시간을 내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꼼짝 않고 기다릴 테니 그리 서두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서신을 준비하느라 허둥지둥하는 걸 보고 차란이 여유롭게 하라며 진정시켰다. 이설의 글을 예의상 보지 않으려고 하는지 괜히 찻잔을 들어 각인으로 새긴 문양을 구경하는 게 좀 어색해 이설이 작게 웃었다.
“아바마마의 안부를 묻는 글일 뿐이니, 편히 눈 두셔도 됩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리고 보신다 한들, 내용을 알기도 어려우실 겁니다.”
반쯤 쓰다 만 서신을 차란에게 쓱 밀어 보여 주었다. 천자도 금의 글자도 아닌, 그렇다고 그림도 아닌 검은 것들이 한 줄로 빼곡했다. 종이를 반 바퀴 돌렸다가, 그리고 다시 반 바퀴를 돌려가며 유심히 들여다보던 차란이 생각났다는 얼굴을 하며 이설에게 되돌려 주었다.
“폐하와 함께 나덕산에 고립되었을 때 보내신 밀서도 이리 적으신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마마의 호위무사가 아니었다면 날을 새도 해독하지 못했을 겁니다.”
“기연이와 함께 입궁한 게 천만다행이지 않았겠습니까.”
싱긋 웃는 이설에게 차란이 마저 쓰시라며 입을 다물었다. 눈을 편히 두라 한 것에 마음이 놓였는지 이제는 빤히 쳐다보는 것이 아마 해독이라도 하려 애를 쓰는 모양이었다. 무시하려는 의도는 절대 아니지만 이설은 사실 차란이 몇 날 며칠을 들여다본다 한들 한 줄도 해독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다.
규칙만 알면 이보다 더 쉬울 게 없겠지만 혼자 배열 규칙을 알아낸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기연은 이설이 직접 알려 줬음에도 혼자 암어를 해독하는 데에 꼬박 반년이 넘게 걸렸다.
그리 길지 않은 글로 채운 서신을 접어 비단 주머니에 넣고 끈으로 단단히 동여맨 뒤 차란에게 건넸다. 차란이 받아 소매에 챙기는 것까지 확인하니 이번에는 제대로 답신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안심이 들었다.
“이틀 뒤 연국으로 떠나는 행상인에게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겉에 싼 비단을 보여 주면 행상인이 궁 안까지도 별 탈 없이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비가랑 상단씩이나 되는 큰 상단이니 굳이 왕족의 서신을 증명할 비단이 아니더라도 궁을 출입하는 데에 크게 문제는 없을 것 같다.
일단 마음이 놓이고 나니 괜히 염치없는 부탁을 한 건 아닌지 영 민망해졌다. 차라리 차란의 상단으로 사람을 따로 보내 일을 시키는 편이 낫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이설의 신분을 밝히고 상단을 통해 밀서를 보내자니 다른 이의 오해를 살까 염려됐고, 신분을 감추고 보내자니 거대 상단이 일개 백성의 서신을 연국 궁으로 전달해 줄 이유가 없었다. 결국 기댈 건 차란뿐이라는 거다.
“번번이 부탁만 드려 죄송합니다. 혹시라도 제 도움이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 말씀하시지요.”
“제가 비록 이득 없는 선심은 주지도, 받지도 않는 장사치의 아들이기는 하나 마마께만은 그리 박하지 않습니다.”
“승상께서는 제게 참 친절하십니다.”
“제가 마마를 무척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훈훈하게 오가던 대화에 난데없이 저가 좋다 고백을 해 오자 이설이 당황하여 말문이 막혔다.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며 뭐라 대꾸해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는데 차란은 그저 담담했다.
“관계에 득실을 따지지 않고, 어려운 이를 등한시하지 않으며 아랫사람에게 대가 없이 선의를 베푸는 이는 황궁에 몇 없습니다.”
“…….”
“선한 성품을 가지신 마마께서 부디 이 황궁에 오래 남아 계시길 바랄 뿐입니다.”
좋다는 말을 오해하여 들었을 때보다 더 당황했다. 저더러 선한 사람이라니.
“그러니 황궁 생활에 어려움이 있으시거든 주저 말고 제게 말씀하십시오.”
거짓 없이 선하게 웃어 보이는 얼굴이 이설을 빤히 쳐다봤다. 평소 차란이 장난이 많고 이설이 이해 못 할 농담을 할 때도 여러 번 있었지만 선한 자신이 황궁에 오래 머물렀으면 좋겠다 말하는 것은 진심이다.
웃고 있는 말끔한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던 이설이 갑자기 힘없이 피식 웃었다. 좀 전까지 후원에서 하던 생각을 알면 차란도 이런 말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저는 선한 사람이 아닙니다. 저도 마음속으로는 온갖 악한 것들을 생각하기도 하는걸요.”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행동입니다.”
“제가 행동으로 나서지 못하는 것은 그저 나약하고 용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선한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자신 때문에 누군가 다칠까 걱정하는 마음을 나약하다 표현하시면 안 됩니다, 마마.”
한마디도 질 생각을 않고 꼬박꼬박 대꾸하는 차란은 한 치도 물러날 기색이 없는 모양이었다. 더 변명을 해 봐야 제 입으로 한심한 모습만 줄줄이 읊어 주는 것일까 싶어 더는 말을 아꼈다. 이설이 말을 관두자 차란이 의기양양하게 미소 지었다.
화제를 돌린 차란은 태자가 저를 미워한다며 툴툴거렸다. 태자는 몇몇을 제외하고는 황궁에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 위로를 해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사실 이설이 봐도 태자는 차란을 대놓고 무시하고 싫어했기 때문에 뻔한 위로의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태자 얘기를 한참 하던 차란이 곧 너무 오래 앉아 있었다며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기를 청했다.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더니 정말 시간이 많이 흐른 뒤이기는 했다. 요 며칠 중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다른 사람과 얘기했던 적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초반부터 해괴망측한 얘기로 혼을 쏙 빠진 것이 잡생각을 떨치는 데에 도움이 되기는 한 모양이다.
차란이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석반을 대충 먹으니 해가 금세 졌다. 해가 지기 이르다 생각했는데, 연국에 비하면 한참 늦은 시간이긴 했다. 겨울을 목전에 두고도 금국은 늘 푸르고 따스했다.
“마마 연화이옵니다.”
“들어오거라.”
“쉬고 계셨습니까? 내일 다시 올까요?”
“괜찮으니 말하거라.”
낮에 양 소원과 있었던 일 때문인지 오늘 내내 궁인들이 이설의 눈치를 봤다. 우당탕탕 복도를 뛰어다니는 소리도 오늘은 잠잠했다.
살금살금 안으로 들어온 연화가 탁자 위에 비단 보자기를 내려놓았다. 조심스레 펼쳐 보니 검은 비단으로 지은 옷이 정갈하게 접혀 있었다. 군데군데 은사로 수를 놓은 것이, 한눈에 봐도 연화나 다른 궁인들이 놓은 수가 아니었다.
“황궁 밖으로 수를 맡겨 놓았던 의복을 좀 전에 찾아왔습니다. 보세요, 예쁘죠?”
얌전을 떨려던 연화였지만 이설에게 보여 주는 의복에 자기가 먼저 흥분해서는 목소리가 들떴다. 의복을 빤히 내려다보던 이설도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 대답했다.
“그런데 이게 갑자기 무슨 오……,”
갑자기 새 옷을 지어 온 이유를 물으려던 이설이 말끝을 흐리다가 ‘아!’ 하고 낮게 탄성을 뱉었다. 생전 입지도 않는 흑색 비단이기에 이런 걸 내가 청했던가 고민했던 방금이 허무해졌다.
경미찬 연회에서 검무를 출 때 입을 옷이었던 게 뒤늦게 생각났다. 우 미인의 조언에 따라 검은 비단에 은사로 수를 놓기로 결정한 것도 떠올랐다. 지나치게 눈에 띄는 화려한 은사보다는 백사가 낫지 않겠냐는 이설의 제안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우 미인의 궁녀들까지 입을 모다 은사가 좋다 고집했던 것이다.
“여기 소매부터 치마 밑단까지……, 보십시오, 마마. 이게 전부 금에서 내로라하는 장인이 며칠 밤낮을 새워 놓은 것입니다.”
“예쁘구나.”
“금붙이를 몇 개나 삯으로 주었는지 마마는 아마 모르실 겁니다.”
제 옷이라도 되는 것처럼 헤벌쭉 웃으며 좋아하는 연화는 이설이 지금 당장이라도 시착해 보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달리 싫다 할 이유도 없는 것 같아 이설이 흔쾌히 그러겠다 했다. 연화는 도리어 이설이 군말 없이 그러마, 하니 더 놀란 눈치였다. 옷을 펼치며 주절주절 괜한 이유를 늘어놓았다.
“아무래도 마마께서 처음 옷을 지었을 때보다 살이 더 빠지기도 하셨으니……,”
“알았다, 알았어. 암말 않고 입어 볼 테니 잔소리 좀 그만하거라.”
그간 살이 빠져 큰일이라는 잔소리를 하도 들은 탓에 살 빠졌다는 얘기만 들어도 진절머리가 난다. 연화는 제 걱정을 잔소리로 치부하는 것이 서운한지 이설의 개복을 도와주며 툴툴거리다 곧 갓 지은 새 옷을 입혀본 뒤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활기를 띠었다.
“세상에, 우리 마마께서는 어쩜 안 어울리는 색이 없으실까!”
“옷이 너무 가볍구나. 안이 비칠까 싶은데…….”
“검무복이 무거우면 몸을 어찌 움직이시려구요.”
“허리도 좀 헐렁한데 연화야.”
“마마께서 살이 빠지신 건 제 탓이 아닙니다. 허리끈을 좀 더 바짝 메는 수밖에 없는걸요.”
“옷이 흘러내릴 것 같은데…….”
“이제 와 수선이 될까 모르겠습니다. 상궁 마마를 모셔올 테니 잠시만 기다리고 계세요.”
이설이 채 붙잡기도 전에 연화가 후다닥 침소를 뛰어나갔다. 어떤 모습인지 보게 체경이라도 좀 꺼내 주고 가지. 고개를 내려 옷을 훑어본 이설이 소매를 들어 등불에 이리저리 각도를 바꿔 비춰 보았다. 금붙이 몇 개가 아깝지 않은 좋은 실에 좋은 실력이다.
검무를 배우는 것은 잠정적 중단이다. 당장 추라고 하면 못 출 것이야 없겠지만 실력이 형편없었다. 아쉬운 건 둘째 치고 우 미인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일단은 건강이 좋지 않아 연습을 할 수 없을 거라 언질만 주었는데 아무래도 함께 검무를 추는 건 어렵다 말을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요 며칠 들었다.
그런데 막상 곱게 지어진 옷을 보니 마음이 들뜬다. 새 옷이 뭐라고, 설레기까지 할까.
이설이 자리에서 일어나 양손을 한쪽 끝으로 뻗었다. 춰 본 지 오래되긴 했지만 우 미인의 감독하에 엄격하게 배운 동작이 아직 몸에 남아 있어서 다행이다.
오른쪽 위로 길게 뻗은 두 손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가, 왼팔을 아래로 넓게 포물선을 그리며 무릎을 모아 굽혔다 피며 왼쪽 다리를 든다. 이 동작을 하며 왼손에 든 칼이 무릎을 베지 않게 하느라 무던히도 노력을 했다. 이제 좀 잘할 수 있을까 싶은데…….
같은 동작을 다시 반복하며 이번에는 좀 더 과감하게 오른쪽 팔을 돌리며 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았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연습하는 건 처음이었는데, 누가 봐 줄 때보다 왠지 더 창피했다.
탁―
맨발로 바닥을 밟는 소리만 울리던 곳에 장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연화가 주 상궁을 데려온 모양이었다. 두 사람에게 몇 번이나 보여 준 동작이지만 혼자서 이런 짓을 하고 있었다는 게 괜히 민망하여 ‘주 상궁 왔는가’ 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애쓰며 뒤돌아 말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