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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145)화 (145/300)

달의 황홀경

145화

딴에는 회심의 일격이라도 되는 것을 물은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쳐다보는 차란은 이미 단정 지은 바가 있는 듯했다. 우찬은 고민할 여지가 없는 것처럼 담담히 답했다.

“일이 성가시게 되는 것을 피했을 뿐이다.”

“그러니까, 일이 어떻게 성가시게 될 거라는 말씀이십니까?”

“…….”

“이설 님의 입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는 것보다 간단한 방법이 대체 무엇입니까?”

한층 높아진 목소리로 거세게 추궁하는 차란이 우찬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우찬은 조용히 눈만 감았다 뜨길 반복하며 차란의 물음을 곱씹다 픽 하고 헛웃음 소리를 짧게 뱉었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관자놀이를 엄지로 꾹꾹 누르는 느긋한 동작에서 한계까지 치달은 불편한 심기가 그대로 드러났다.

곧 긴 목이 꼿꼿하게 바로 서며 얼굴이 드러났다. 좀 전 같은 실없는 조소조차 없이 완전한 무표정이었다.

“내가 설이에게 사실대로 말했어야 한다는 것이냐?”

언성을 높이지 않기 위해 참느라 말 마디마디에 간격이 원래보다 더 길게 생겼다.

“폐하께서 잘못 대처하셨다는 게 아니라 어째서 마마께 사실대로,”

“내 이름을 가진 진짜 정인이 입궁하였으니 이제 설이 너는 필요가 없다, 이리 말했어야 한다고?”

“그렇게까지 말씀하실 필,”

“네가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은 아니겠구나.”

말 사이사이 끼어드는 차란의 변명은 들을 가치가 없다. 우찬은 음산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차란의 목구멍을 쥐어짰다.

차란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이 우찬은 방금 했던 그 말을 실제로 이설에게 했을 때 벌어지는 상황을 혼자 생각해 봤다. 여러 개로 나뉘는 이설의 반응 중 마음에 들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생각만 해도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걸 어떻게 눌러야 할지 몰라 힘을 주고 참다 나무젓가락을 한 짝만 부러뜨렸다. 딱, 하고 반으로 부러지는 나무 막대기를 보고 차란이 한숨을 토해 냈다.

“루 소의 마마의 얘기만 나오면 폐하께서 이리 동요하시는 것이 이제는 별로 놀랍지도 않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자포자기라도 한 듯한 차란의 말에 기운이 없었다. 비어 있는 술잔을 흘끔 보고는 차란이 술병을 들며 우찬을 봤다. 잔을 직접 채워 마셔도 되겠냐는 허락을 구하는 눈빛을 무시하자 결국 차란이 병을 내려놓았다.

“신 역시 마마께서 오랫동안 궁에 남아계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

“폐하께서 상황으로 물러나시면 마마를 고향으로 돌려보내 드린다 말씀하셨을 때 아쉬워한 것이 솔직한 신의 마음입니다. ……물론 신이 마마를 연모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우찬의 표정이 험상궂게 찌푸려지는 걸 눈치챈 차란이 급히 덧붙였다. 우찬이라고 그런 오해를 한 것은 전혀 아니었지만 차란의 말을 듣는 순간 기분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그래서 마마께 이설 님의 입궁을 알리지 않겠다는 폐하의 결정을 따랐습니다. 혹여 마마께서 궁을 일찍이 나가시게 되는 일이 생길까 봐 말입니다.”

차란이 이설을 잘 따른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이설에게 지금 같은 유대감이 없었을 적 자신이 상황으로 물러나면 이설을 연국으로 돌려보낼 것이라는 말을 전했을 때도 차란은 무척 아쉬워했다. 이름을 나눈 인연은 항시 가까이 지내야 서로 해가 되지 않는다며 우찬을 설득하려 하기도 했다.

“이설 님의 존재를 마마께 숨긴 신의 이유는 이러하온데, 폐하께서는 어떠하십니까?”

“…….”

“폐하께서도 마마를 궁 밖으로 내보내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신이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으신 겁니까?”

당장의 대답을 바라지 않는 게 확실한 듯 차란은 우찬의 앞에서 고집을 피우는 대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로 한 걸음 물러나 의복을 정돈하고 우찬을 보았다. 반으로 부러진 나무젓가락을 아직 손에 쥔 우찬은 이쯤 거리라면 차란의 이마를 정확히 꿰뚫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자란 언변으로 폐하의 심기를 거스른 벌을 내리신다면 뭐든 달게 받겠습니다. 허나 신이 폐하께 여쭙고자 하였던 게 무엇인지만은 알아주실 줄 믿사옵니다.”

벌을 달게 받겠다던 차란은 그 말을 뒤로하고 황급히 자리에서 물러났다. 멀어지는 뒤통수를 빤히 바라보던 우찬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손에 힘을 잔뜩 주었다가 이내 힘을 풀었다.

젠장.

차란이 완전히 틀린 말을 한 게 아니라는 점이 우찬을 더 화나게 했다.

*

쾅- 하고 울리는 난폭한 소리가 제 문에서 나는 소리인가 싶었다. 놀라 몸을 움찔하여 쳐다보니 뒤이어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다 멀어졌다.

왔던 모습 그대로 양 소원이 소란스럽게 사라졌다.

탁자 옆 빈터에 덩그러니 서 있던 이설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서화를 그려 넣은 종이들이 바람을 만나 바닥 위를 어지럽게 나뒹굴었다. 하필 수통이 함께 떨어지는 바람에 종이는 모두 못 쓰게 되어 버렸다. 막아 볼 수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다짜고짜 침소로 들어와서는 지금 이깟 것들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며 패대기를 치는 양 소원의 행패를 예상이나 했을까.

‘폐하께서 어젯밤 무암궁의 계집과 하룻밤을 보내셨습니다.’

순서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 같았다. 양 소원은 침소에 들어오자마자 악다구니를 쓰며 이설의 세간살이를 망가뜨리고 온갖 행패를 부렸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 흥분이 조금 가라앉은 뒤에야 이설에게 여기 온 사실을 털어놓았다.

무암궁은 처음 들어보는 곳이었지만 어차피 양 소원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 본능적으로 직감하기는 했다.

‘마마께서 그날 저와 뜻을 같이하겠다는 말씀만 하셨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별안간 자신에게 비난을 퍼붓는 양 소원의 악담을 가만히 듣던 이설은 속으로 양 소원을 책망했다. 어째서 양 소원이 그 여인과 우찬이 만나지 못하도록 미리 손을 쓰지 않은 것인지, 그게 너무 원망스러웠고 동시에 그런 마음이 든 자신에게 혐오감이 들었다.

양 소원의 아비는 일찌감치 양 소원과의 끈을 잘라 낸 듯싶다. 발 빠른 그 아비는 쓸모없는 차녀 대신 머지않아 금의 황후가 될 게 뻔한 여인을 양녀로 들이기로 마음먹었단다. 이설은 양 소원이 머리끝까지 화가 솟구친 까닭이 제 가문에서 버림을 받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영영 우찬의 총애를 꿈도 꿀 수 없다는 투기 때문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이설은 제 머릿속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차고 힘들었다.

“마마, 괜찮으십니까?”

양 소원이 들어올 때 밖으로 내보냈던 궁녀들이 걱정스레 들어왔다. 다들 난장판이 된 주변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설을 위로해 주려다가 주 상궁 눈짓에 입을 다물고 소매를 걷어붙이는 아이들은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궁금한 눈치였다.

“소인과 함께 바깥바람이라도 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멍하니 선 채로 굳어 있는 이설을 추스른 주 상궁이 함께 후원으로 나갔다. 이설이 서화에 그림을 그릴 때 발치에서 꾸벅꾸벅 졸던 삼설이는 양 소원의 횡포에 놀라 후원 구석에 몸을 숨겼다. 다시 꾸벅꾸벅 졸던 하얀 목화솜뭉치가 이설과 주 상궁의 인기척에 또 잠이 깼지만 안전한 사람이라는 걸 확인한 건지 다시 몸을 웅크려 잠이 들었다.

바람결에 나뭇잎이 흔들리며 나는 소리에 정신이 반쯤 돌아왔다. 머릿속이 선명해지니 이제는 가슴에 짐이 얹힌 듯 무거워졌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판판한 돌 위에 주 상궁이 면포를 깔아 주며 말했다. 자리에 앉은 이설은 무릎을 세우고 팔을 얹은 다음 고개를 숙여 이마를 댔다. 온몸에 힘이 쭉쭉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양 소원에게 처음 이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싶더니 결국 이렇게 될 일이었다.

“마마 편찮은 곳이 혹시 있으십니까?”

“……다친 곳은 없네.”

혹 양 소원이 소란을 피울 때 다치기라도 한 건 아닌지 돌려 묻는 주 상궁에게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가뜩이나 요즘 기운도 없는 터인데 잠깐의 일로 힘이 쭉쭉 빠져나가고 나니 웃는 것도 힘이 들 지경이었다.

머리가 너무 아프다. 자신에게 일어날 일 중 무엇을 가장 먼저 걱정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이대로 궁에서 쫓겨나게 되는 건 아닌지, 궁에 남아 있는 채로 황제의 정인이라는 자리를 내려놓아야 하는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애초에 자신에게 선택권이라는 게 있기나 한 걸까.

그리고 우찬은 왜 여태껏 한 번도 찾아 주지 않는 걸까.

“마마 일전에 연국으로 보낸 서신 말입니다.”

꼬리의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불안한 생각들을 차단하며 주 상궁이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답신이 오고 있는 중이라 들었는데, 왜 그러는가?”

“서신을 전달하기로 한 자와 연락이 수일 째 되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국경을 넘는 중에 변고를 당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제 할 일을 하다 변을 당한 무고한 이에게 안타까움이 먼저 들었을 텐데 제 코가 석 자이다 보니 실망감이 더 먼저 들었다.

“다시 사람을 보내 볼 테니 좀 더 기다리시는 게 좋겠습니다.”

“어쩔 수 없지 뭐.”

모진 황궁 생활을 견딜 때는 연국 소식 듣는 낙이라도 있었지. 이제는 황궁에 낙이라고 여길 게 없다. 어여쁜 태자도 머지않아 못 보게 될 날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매 순간이 아쉬웠고, 손수 가꾸던 화초들도 곧 남의 손에 떠나보내야 된다 생각하니 전 같은 정성을 쏟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요즘은 소일거리에도 모두 손을 놓고 안에 틀어박혀 늘지 않는 그림만 줄곧 그리는 중이었다.

기운 없이 앉아있는 이설을 옆에서 묵묵히 지키던 주 상궁이 안에서 부르는 소리에 잠시 사라졌다 돌아왔을 때는 차란과 함께였다. 못 뵌 지 오래되어 잠깐 들렸다는 쾌활한 목소리에 부응하려 이설도 억지로 반가운 티를 내며 맞았다. 마지막으로 본 지 열흘도 채 되지 않았다는 걸 서로 잘 알면서도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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