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144화
***
“……할 말이 있거든 얼른 하고 썩 꺼져라. 술맛 떨어진다.”
늦은 아침. 조례가 끝난 뒤 쫄래쫄래 뒤를 따른 차란이 머리를 식히러 나온 금원에까지 쫓아와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은 어떤 궁금증을 한껏 품고는 어쩌다 한 번씩 ‘흐음’ 하는 소리를 내지만 먼저 말을 꺼낼 생각은 없어 보였다. 웬일로 여태껏 참고 버텨 준 우찬이 짜증을 눌러 담아 말했다.
우찬의 뒤편에 서 있던 차란이 그제야 느릿하게 걸어와 앞에 섰다. 비어 있는 술잔을 채워 준 뒤 별로 조심하지도 않는 목소리로 묻는다.
“조례에는 왜 늦으셨습니까?”
“네가 지금 나를 꾸짖는 것이냐?”
“이제껏 조례에 늦으셨던 적이 없지 않으십니까. ……차라리 아예 나오지 않으셨다면 모를까.”
듣고 나니 즉위 이래로 조례에 늦어 본 적이 아마 없었던 듯싶다. 앉은 위치에 따른 성실함이나 책임감 따위는 아니었다. 어차피 새벽 사냥 말고는 달리 할 것도 없는 이른 아침이었다. 늦을 정도로 일이 생기면 차라리 하루쯤 건너뛰고 느긋하게 일을 마무리하는 게 더 능률적이었다. 그래서 우찬은 가끔 이설에게 오늘은 조례가 없다는 등의 거짓으로 안심을 시킨 뒤 비은궁에 머무는 시간을 늘렸다.
차란이 눈을 가늘게 뜨며 술병을 슬며시 내려놓았다. 눈동자만 휙 움직여 우찬의 표정을 살폈지만 평소에 늘 보아오던 얼굴 그대로다.
“태금궁에서 기침하지 않으셨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윤 내관도 그렇고, 흑영도 그렇고 신에게까지 쉬쉬하니 의심이 아니 들 수가 없습니다.”
“의심?”
우찬이 코웃음을 치며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던지듯 내려놓은 사기 술잔이 나무 상과 부딪히며 험악한 소리를 냈다. 멀리 떨어져 있던 궁인들이 화들짝 놀라 쳐다봤지만 차란만 개의치 않아 했다.
“무암궁(霧暗宮)에 다녀오셨습니까?”
“무암궁?”
“황궁 서편에 있는 그 궁 말입니다.”
“아아. 그래 다녀왔다.”
우찬이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즉답했다. 별 대수롭지도 않은 얼굴로 차란을 쳐다보다가 자리에 앉아 마저 얘기하라 한 뒤 마시던 잔을 차란에게 넘겨주었다.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궁녀 하나가 빈 잔을 가져와 우찬 앞에 내려놓았다.
할 일을 마친 궁녀가 멀리 제자리로 돌아갈 때까지 기다린 차란은 주변이 고요해지고 나서야 입을 뗐다.
“동침하셨습니까?”
“…….”
“폐하께 충성을 맹세한 자로서 신도 폐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내 뜻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네 충성도 끝이 나는 것이냐?”
“신의 마음을 바꿔야지요.”
“…….”
“신의 충심에는 여부가 없습니다, 폐하. 그러니 부디 거짓 없이 말씀해 주시옵소서. ……동침하셨습니까?”
평소 술상 앞에 앉던 자세와 달리 공손히 무릎을 모아 꿇어앉더라니, 쓸데없이 결연하다.
오래 앉아 있지도 못할 자세를 하고서 비장한 눈빛을 보내는 차란을 유심히 바라보던 우찬이 짧은 한숨을 토해 내듯 조소를 터뜨렸다.
“동침하지 않았다.”
우찬의 단호한 대답에 차란은 대놓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후, 하고 길게 빠지는 한숨 속에 온갖 걱정과 근심이 다 빠져나왔다.
차란이 술잔을 손으로 감싸 쥐고 우찬을 봤다. 우찬이 고개를 짧게 끄덕이자 고개를 돌려 단숨에 들이켜고 자리에 놓았다.
“피곤했던 모양이야. 차를 마시다 몸이 노곤해져 그대로 잠이 들었어.”
“…….”
“……그래 알고 있다. 무척 이상하지.”
“새벽달이 한창일 때도 잠들지 못하시는 폐하께서 차를 마시다 잠이 드셨다 하는데 그냥 넘어가면 그게 더 이상할 테지요.”
허공에 맞부딪힌 두 눈이 의미심장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한숨으로 뱉어 낸 걱정의 양만큼 다시 다른 걱정을 들인 차란이 근심 어린 얼굴로 우찬의 잔을 채웠다.
우찬은 곰곰이 어젯밤의 일을 생각해 봤지만 특별한 일은 없었다. 차란이 무암궁이라 했던 그곳에 가서 여인이 준비한 차를 마시다 쏟아지는 졸음을 견디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제 발로 침상까지 걸어간 기억도 온전하고 자고 일어났을 때 누군가 일부러 몸을 뒤진 흔적도 없었다. 단지 해가 중천에 뜬 너무 늦은 시간에 일어났다는 게 문제였다.
“무암궁에서 드신 것이 있으십니까?”
“평범한 차 한 잔이었다.”
“북쪽에는 폐하께서 구분 못 하시는 독초도 많습니다.”
“마시자마자 바로 잠이 드는 것도 말이 안 돼.”
“알려지지 않은 독초 중 하나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 독초는 아니었어.”
독초에 중독되어 강제로 수면에 들었다기에는 일어난 직후 몸이 너무 개운했다. 익숙한 머리앓이조차도 없었다. 그래서 그게 더 의아했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우찬의 말 하나하나에 대꾸하는 차란은 이미 한 방향으로 마음을 굳힌 모양이었다. 우찬은 의심의 눈초리를 쉽게 거두지 못하는 차란을 빤히 들여다봤다.
“무엇이 그렇게 네 마음에 걸리더냐?”
“정신을 차려 보니 모든 게 다 그렇습니다.”
“…….”
“하필 이 시국에 폐하의 이름을 가진 여인이 양화성 근방에서 나타났는데, 천지명관에 이름도 올리지 않은 이민족의 여인인 것부터가 이상합니다.”
“그리고 본서원 출신 궁녀의 일도 이제는 그냥 넘어갈 수 없었겠지.”
“예. 근래 일어난 모든 사건들이 양화성으로 모여들고 있지 않습니까?”
사냥대회가 열렸던 그날, 황제 금우찬의 이름을 알고 있었을 게 분명한 태금궁 궁녀가 산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당시 우찬은 무심히 넘어갔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별일 아닌 우연으로 치부하기는 어려웠다.
“뭐 하나 명쾌하게 밝혀진 건 없이 골치 아픈 일만 쌓이는군.”
“송구합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운이 좋으면 그 귀찮은 목숨을 단칼에 쳐 낸다 해도 크게 문제 될 일이 없을 수도 있다는 거지.”
“그걸 어찌 운이 좋다고…….”
차란이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고시랑거렸다.
“폐하께서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뭐가.”
“이설……, 님 말입니다.”
입에 붙지 않은 이름을 어색하게 언급하는 차란은 그 이름을 입에 담는 것 자체가 영 껄끄러운 모양이었다. 사실 우찬도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묘하게 미간이 구겨져 불쾌한 심기가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서로 이름을 나눈 인연이 처음 마주하면 뭔가 다른 기분이 든다 하던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기분 말이냐.”
“그걸 신이 어찌 알겠습니까? 다들 그렇다 하니, 여쭙는 거지요.”
본인조차 뭔지 모르는 것을 있었느냐 묻는 차란은 오히려 우찬이 답답스러운 듯했다. 대충 묻는 의도를 파악한 우찬은 딱 잘라 고개를 저었다.
“특별할 것 없는 하찮은 여인이다.”
어제 무암궁에 도착하기 전 자신이 올 거라는 걸 알고 문 앞에 기다리고 있던 모습이 잠깐 스쳐 지나가긴 했지만 굳이 언급할 생각은 없었다. 의도 없는 우연이었을 수도 있고, 치밀한 계획이었을 수도 있었다.
“뭐, 일단은 다행인 것 같습니다.”
차란은 대놓고 그 여인이 황제의 정인이 아니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허락해 주신다면 이설……, 님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본격적으로 뒤를 캐 보기라도 할 참인지 차란이 우찬의 허락을 구했다. 안 그래도 어젯밤 일이 있은 뒤로 찜찜하던 차라 허락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잠시 대화가 멈추고 우찬이 연거푸 서너 잔을 마시는 동안 차란은 한 잔을 채 못 비웠다. 그래도 물러나지 않는 걸 보면 하고 싶은 말이 아직 남아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폐하.”
조금 전보다 더 긴장된 태도로 술잔을 감싸 쥔 차란이 마른침을 삼키며 우찬의 눈치를 봤다.
“오는 길에 양 소원 마마를 뵈었사온데, 향하시는 걸음이…….”
흘리듯 사라지는 뒷말은 더 들어볼 필요도 없다.
“화가 단단히 나신 듯합니다.”
“황궁에 입이 가벼운 쥐새끼들이 이리 많아서야.”
“폐하께서 좀 더 조심하셨어야지요.”
질책하는 의도가 분명한 어투로 차란이 우찬을 보고 분명히 말했다. 술을 따르던 우찬이 눈동자만 움직여 싸하게 노려보는 데도 물러날 기색이 없이 단호했다.
“변복도 없이 궁인들이 오가는 길로 윤 내관을 대동하여 가셨으니 모를 사람이 누가 있었겠습니까? 모처럼 황궁에서 가장 눈에 안 띄는 곳에 거처를 마련한 제 노력도 다 허사가 되었습니다.”
괜한 불만을 토로하는 차란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우찬은 술잔만 손에 꽉 쥐었다.
여인이 궁에 머무는 내내 이설에게 절대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생각보다 시기가 너무 빨랐다. 안일하게 생각한 제 탓이 크다. 도를 넘어서는 차란의 태도에 당장 경을 치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갑자기 무슨 일로 화가 쌓인 건지 짐짓 심각한 얼굴을 한 차란과 달리 우찬은 그저 무심히 술잔에 담긴 맑은 술만 들여다봤다.
이설과 나눠 마시려고 차란을 들들 볶아 구해 온 각 지역의 특주들 중 이게 마지막이다. 좋은 술이 빚어지는 때는 이미 지났다. 가장 맛이 좋은 시기의 술들을 맛보기 위해서는 한 해를 또 견뎌야 한다.
우찬은 이따금 내년 이맘때쯤의 이설을 상상해 봤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이설은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비운궁 후원에 쪼그려 앉아 잡초를 고르다 흙 묻은 손으로 저를 반길 것이다. 회백색 옷에 무심히 손을 닦아 더럽히고 은회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종종걸음으로 달려오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때쯤이면 머리카락도 허리께를 지나 한참 길어졌을 것이다.
슬쩍 입꼬리가 올라가는 그 순간을 즐겨 보기도 전에 별안간 차란의 목소리가 산통을 깼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폐하, 신은 루 소의 마마를 바라보시는 폐하의 마음을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그걸 네가 알 필요가 있느냐?”
삐딱한 시선으로 넘겨 본 우찬이 술병을 나무 상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술잔과 안주를 담아 놓은 사기 그릇들이 위로 튀어 오르며 불안한 소리를 냈다.
대답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분명한 것은 물론 위협적으로 태도를 바꾼 우찬은 심기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신은 알 필요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허나 루 소의 마마께서는 알고 계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차란이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말을 끼어든 우찬과 차란의 말이 한데 뒤섞였다. 차란은 우찬의 말을 가로막은 결례에 곧바로 머리를 조아렸지만 우찬의 눈에는 들어오지도 않았다.
“마마께서 폐하를 얼마나,”
“…….”
“……애틋하게 여기시는지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생각해 뒀던 단어가 아직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차란이 말을 멈췄다가 이어 끝마쳤다. 감정에 호소하는 간절한 눈빛은 차란의 평소 행실과 퍽 어울리지 않아 기가 막혔다. 그리고 동시에 말문이 막혔다.
이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있었다 한들 그리 진중한 고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 말문이 막힐 일이 없었다.
“부디 루 소의 마마의 마음을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내가 왜 그리해야 하지?”
“마마를 아끼시지 않습니까.”
“…….”
“폐하께서도 그렇지 않다 단정 지어 말씀하실 수는 없으실 겁니다.”
우찬은 간혹 차란이 세상만사에 대하여 통달이라도 한 듯 아는 체를 하는 게 무척 싫었지만 크게 노하여 본 적은 없었다. 그저 심사가 꼬이는 정도에 그칠 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도가 지나쳤다.
“네놈이야말로 무슨 이유로 그리 단정 지어 말할 수 있느냐?”
노기를 꾹꾹 눌러 담은 음산한 목소리가 차란의 귓전을 때렸다. 차란은 차라리 물어봐 주기를 기다린 것처럼 고민 없이 바로 대답했다.
“애초에 이설 님의 존재를 루 소의 마마께 숨기신 이유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