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143화
무암궁 (霧暗宮).
황궁의 서편 끝이라더니 대련장에서부터 한참을 걸어서야 도착했다. 해는 이제 슬슬 저물어 가고 있고, 왔던 길을 되돌아 태금궁으로 향해야 하는 윤 내관은 벌써부터 숨이 넘어갈 듯 지쳐 보였다.
우찬은 황궁 한구석에 초라하게 숨겨져 있던 궁의 대문 앞에 섰다. 황궁에서 평생을 살았지만 이런 궁이 있었는지는 몰랐다. 담은 낡았고 오래된 나무 대문은 삐그덕 경첩이 닳는 소리를 내며 무겁게 열렸다.
적당히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치워 버리라고 했던 명이 무색하다. 하필 골라도 이런 폐가를 골랐는지 모르겠다.
“안으로 드시지요.”
활짝 열린 대문 앞에 서서 못마땅한 눈초리로 주변을 훑는 우찬을 흑영이 안내했다. 숙위 중인 금군과는 별개로 궁에 수상한 것은 없는지 따로 흑영을 보내 주변을 살펴보게 한 적이 몇 번 있었다. 흑영은 꼭 제 궁인 것처럼 익숙하게 길을 찾았다.
담이 낡은 데에 비해 궁 안 쪽은 생각보다 관리가 잘되어 있었다. 사람 흔적이 별로 없을 뿐 상태는 나쁘지 않다. 하기야, 황궁 어딜 뒤져 봐도 이설이 입궁할 때의 비운궁만 한 폐가가 있을까.
그래도 썩 기분 좋은 궁은 아니다. 비운궁처럼 나무가 빼곡한 것도 아닌데 궁 전체가 너무 어두컴컴했다. 해가 잘 들지 않는 방향인 것 같다. 이래서 사람들이 잘 찾지 않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온다고 따로 기별은 받지 않았느냐.”
“송구합니다, 폐하. 따로 기별 받은 것은 없었습니다. ……아직 궁이 어수선하여 폐하를 모실 만한 상태가 아닌지라…….”
부랴부랴 달려 나온 상궁이 우찬의 뒤를 졸졸 따르며 더듬더듬 변명했다. 우찬이 주변을 둘러보는 눈빛이 사나우니 겁을 먹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등불 하나 없는 길고 어두운 복도를 지나 침소 앞에 멈췄다. 곧장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옆에 선 상궁이 안절부절못하기에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고하라’라고 이르자 내심 안도했다.
“이설 님”
나긋나긋한 중년 여인의 목소리가 이설의 이름을 불렀다. 옷깃에 낀 머리카락을 무심히 빼던 우찬이 한쪽 눈썹을 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별안간 기분이 확 상했다.
“지금 폐하께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폐하.”
문 가까이에 서있던 상궁이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을 치고 다른 곳에 시선을 두고 있던 우찬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반쯤 열린 문 너머로 단정하게 잘 차려입은 여인이 서 있었다. 우찬과 눈이 마주치자 다소곳이 바닥을 향해 앉았다.
“무언산 연주학의 차녀 연이,”
“됐다.”
인사를 막은 우찬이 바닥에 부복한 여인을 지나쳐 들어갔다. 곧 문 닫히는 소리와 치맛단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침소는 시골뜨기 처녀에 분수에 딱 알맞을 정도로만 쓸 만했다. 적당히 넓고 적당히 단출하다. 늙은 고목의 오래된 나무 향이 날 만큼 물건들은 모두 빛이 바랬지만 굳이 더 채워 줄 만한 것은 없어 보인다.
“황궁 생활은 할 만한가?”
“일하지 않아도 세 끼 따뜻한 밥이 나오는데, 이보다 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여인이 살포시 웃으며 사뿐사뿐 다가왔다. 하물며 후궁조차도 우찬이 허락하지 않으면 오 보 안으로는 들어오지 못하는 법인데 황궁 법도에 무지한 탓인지 여인은 잘도 우찬의 앞까지 가까이 왔다.
가까이서 다시 들여다본 얼굴은 금국의 일반적인 귀족 여인들보다 피부가 까무잡잡하고 모난 데 없는 이목구비를 적절하게 갖추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와 다른 감흥은 들지 않았지만 묘하게 분위기가 달라졌다. 머리를 단정히 틀어 올렸기 때문인지, 새 옷을 차려입었기 때문인지는 잘 알 수 없다.
“꼴을 보니 잘 적응한 것 같군.”
“…….”
“내내 나를 기다리고 있었나?”
우찬은 여인이 서 있었던 문 앞을 손으로 휙 가리키며 물었다. 여인이 우찬의 손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앞으로 향했다.
“이상하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조금 전부터 소인은 폐하께서 오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무척 이상하게 들리는데.”
“…….”
“내가 올 걸 미리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예.”
“기별 받지 않았다 들었다.”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소인은 그냥……,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습니다.”
희미하게 진 미소가 사라진 여인이 본인도 도통 모르겠다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이걸 믿으라고 하는 소리인가.
우찬이 여기까지 찾아온 것은 다분히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궁인들의 눈에 쉬이 띄지 않기 위해 호위군과 같은 검은 의복을 입은 그대로 윤 내관만 대동하여 온 것이었다. 그러니 따로 기별을 받았을 리도 없다.
“이상하게 들리신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에게도 이런 적이 있었나?”
“절대 없었습니다. 소인은 그저 무언산의 평범한 처녀일 뿐이옵니다.”
“계속 그런 신기를 보인다면 거처를 신당으로 옮겨도 되겠군.”
“뜨신 밥 세 끼 잘 나오는 곳이면 소인은 아궁이방에 장작 때는 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 끼 밥 잘 나오는 것이 그리 중한지 말끝마다 밥 타령이다. 아닌 것 같으면서도 뻔뻔하기 그지없는 성정은 대놓고 빈정거려도 태연하게 맞받아친다. 그간 보아 온 여인들과 비교하니 더 어이가 없다. 다짜고짜 황궁에 끌려와 갇혀 지내는 신세가 됐는데 억울함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더는 묻지 않고 말을 돌리긴 했지만 정말 이 여인이 자신이 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고 하니 영 찝찝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고작 이름 서로 나눈 것 가지고 하늘이 내려 준 정인 같은 헛소리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이따위 설명하기 어려운 일들이 계속 일어난다면 마냥 무시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폐하, 한 가지 여쭤볼 것이 있사옵니다.”
말은 공손한 척하면서도 기세는 당당하게 물을 것이 있단다. 우찬이 물어도 좋다 허락하며 의자에 앉았다. 정말 자신이 곧 올 거라는 걸 알았는지 준비한 차가 아직 따뜻했다.
“소인은 언제까지 이 궁에 머물러야 하는 것이옵니까?”
“생각 중이다.”
“나갈…… 수도 있는 것이옵니까?”
“왜? 뜨신 밥 세 끼가 나오는 궁을 떠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미련이 생기느냐?”
코웃음을 치며 우찬이 차를 한 모금 입에 담았다. 냉차를 즐겨 마시던 우찬이었지만 이설의 습관을 따라가다 보니 요즘은 펄펄 끓는 뜨거운 차만 아니면 그럭저럭 잘 마시는 편이었다.
같은 이름에 차 취향까지 비슷한지 차 맛이 이설이 내어 준 것과 흡사하다. 차의 온도는 몰라도 사실 이설의 차 맛은 아직 입맛에 맞지는 않았는데 이건 제법 마실 만하다.
“차 맛이 어떠하십니까?”
“달군.”
“고향에서 기르던 약초를 말려 빻은 것입니다.”
“…….”
“입맛에 맞지 않으십니까? 다른 차를 내어 드리겠습니다.”
순간 우찬이 찻잔을 입에 댄 채로 멈칫하며 미간을 찡그렸다. 타인이 주는 음식을 아무런 경계 없이 먹었다는 사실을 방금에서야 깨달았다.
약초 향이 많이 나는 차는 독초를 태워 달인 물을 섞기에 가장 적합하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아무 차나 마시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받았다. 윤 내관이나 차란 같이 믿을 만한 사람이 내어다 주는 차가 아니면 습관처럼 경계를 하고 마시곤 했는데, 이렇게까지 무방비하게 느슨해졌던 것은 이설과 있을 때 이후로 처음이다.
은연중에 뒷배도 없는 시골뜨기가 이런 대범한 짓을 할 리가 없다고 여긴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곳에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쯤부터 몸에 긴장이 풀렸다. 대련을 하며 몸을 쓴 직후에 찾아오는 노곤함 때문인가.
우찬이 말없이 찻잔을 내려놓자 여인이 다가와 잔을 들었다. 그럴 필요 없다며 손목을 확 잡으려고 하니 가느다란 비명과 함께 여린 손목이 휙 뒤로 빠졌다.
제 손을 거칠게 쳐 낸 이의 얼굴로 시선을 올렸다. 그새 볼이 발갛게 된 얼굴이 금방 눈물이라도 쏟아 낼 듯 울먹였다.
“소, 송구 하옵니,다. 소인도 모르게…….”
“아픈가?”
“이름이 새겨진 손목. 아프냐 물었다.”
“……예.”
“지난번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소인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 궁에 온 뒤부터 갑자기 손목이 불에 데인 것처럼 뜨겁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고…….”
울먹이는 목소리가 제게 무례하게 군 뒤에 찾아오는 불안함 때문인 건지 아니면 단순히 손목이 아프기 때문인 건지 모르겠다. 하여간 여인들이 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우찬은 무례했던 행동도 문제 삼지 않고 별 말 없이 그냥 넘어갔다. 어차피 이름을 보기 위해 손목을 잡으려는 것도 아니었다. 우찬은 아직도 저 손목에 새겨진 제 이름을 떠올리면 속이 메스껍고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나갈 수도 있느냐 물은 것을 보니 내심 나가고 싶어 하는 마음이 드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찬이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궁에서 내보내고 싶은 마음은 우찬이야말로 더했으니까.
당장 송장으로라도 내보내면 좋겠는데.
정말 아픈 건지 엄살인지 울상이 된 여인이 손목을 슬슬 매만진다. 우찬은 느긋하게 차로 혀를 적시며 차란이 뜯어 말릴 생각을 태연하게 했다. 어제 문득 들었던 생각은, 빌어먹을 저 손목이 문제가 되는 것이니 어깨 아래를 잘라 버리는 것은 어떨까 싶은 것이다. 흑영에게 물으니 몸이 약한 여인들은 잘린 부위를 지혈 중에 숨이 꼴깍 넘어가는 경우도 있으니 위험부담이 크다 하였다. 이러나저러나 처리하기 곤란한 건 마찬가지였다.
“폐하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몸이 노곤해지니 금세 피로가 몰려왔다. 무겁게 감겼다 열리는 눈꺼풀을 눈치챈 여인이 슬금슬금 가까이 다가왔다. 입궁하며 기본적인 법도조차 배우지 않았느니 함부로 몸에 손을 갖다 대려고 하기에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저으면서 몸이 무거운 듯한 기분이 들었다.
“폐하.”
한동안 잊고 살았던 느낌을 이제야 깨달았다. 보통 사람은 이런 기분을 ‘잠이 온다’라고 한다.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저쪽에 누울 자리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나긋한 목소리가 귓가에 나풀거린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소리다.
“……이설?”
“예, 연이설이옵니다.”
아, 이설이었나.
우찬이 피식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포단이 곱게 정돈된 침상이 있었다.
그쯤 우찬도 잠이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