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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142)화 (142/300)

달의 황홀경

142화

“연회가 시작되기 전 각국에서 사절단이 찾아오는 건 해마다 으레 있는 일입니다. 걱정하시는 일이 아니실 수도 있습니다.”

아닌 척 감추고는 있지만 역시 초조한 기색이 분명한 이설을 위로하며 주 상궁이 인자하게 말했다.

“폐하의 이름을 가지신 분이 정말 입궁을 하였다면 궁이 이리 조용할 리도 없지 않겠습니까?”

“…….”

“소인이 좀 더 면밀히 알아볼 테니 아직은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양 소원이 다녀간 날 밤. 넋이 나가 문이 열리고 닫힌 것도 구분하지 못하는 이설의 상태를 알아챈 주 상궁이 한 시진을 넘게 이설을 붙들고 혼이 빠진 이유를 물었다. 평소와 달리 주 상궁이 악착같이 묻는 것에 진이 빠지기도 했고, 사실 하소연을 할 곳이 필요하기도 했던 이설은 양 소원에게 들은 사실을 더는 숨기기 어려웠다.

황궁에 속마음을 털어놓을 마땅한 이가 없었다. 믿을 만한 사람일수록 속마음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만일 기연에게 이 일을 털어놓았다간 당장에 확인을 해 보겠다며 뛰쳐나갔을지도 모른다. 이설은 아직 이 일을 아무도 알아서는 안 된다고 여겼기 때문에 우찬이 그 여인을 서편 구석 궁에 숨겨 놓은 것은 적절한 조치라고 생각했다.

“자네는 내가 괜한 걱정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직 확실치도 않은 일에 미리 걱정을 하실 필요가 없다는 말씀을 드릴 뿐입니다.”

“그럼 그 여인이 정말 폐하의 이름을 가진 것이라면?”

“…….”

“나와 같은 이름을 쓰는 연이설이라는 여인이 그 몸 어딘가에 정말 폐하의 이름을 가진 게 맞다면 그때는 내가 이렇게 걱정을 해도 될 것 같은가?”

이설이 처연하게 웃으며 주 상궁을 봤다.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하는 난처한 고민의 흔적이 주 상궁 얼굴 주름 사이사이에 아로새겨졌다.

제 걱정을 덜어 주려 이렇게 말하는 거겠지만 기실 주 상궁도 뭔가 이상한 낌새는 눈치챘을 것이다.

하례를 위해 온 사절단에게 하필 그런 구석진 낡은 궁을 내주었다는 것을 으레 있는 일이라고 우기기는 어렵다. 그 낡은 궁을 금군이 밤낮으로 삼엄한 경비를 설 필요도 없고, 궁 밖으로 볼일을 보러 나온 궁인들이 금군과 함께 다니며 입도 뻥긋 열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분명 그 안에서 은밀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틀림없다.

“오늘 아침 사의시에 의녀를 하나 보내 달라 청한 모양입니다. 다행히 사의시에 소인과 인연이 있는 의녀가 하나 있사온데, 그 아이가 들러볼 참입니다. 진맥을 받고 나면 확실해 알게 되겠지요.”

“그럼 부탁하네. 한 가지, 내 이 일을 은밀히 알아보고 있다는 사실을 다른 이들이 알아서는 안 되네.”

“명심하겠사옵니다.”

사의시가 아닌 다른 곳에서 잠시 그 의녀를 만나 당부할 게 있다며 주 상궁은 그만 자리를 떠났다. 혼자 남은 이설만 주 상궁의 위로가 무색하게 불안한 생각에 잠겼다.

일단 입궁한 여인이 우찬의 진짜 정인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그 여인이 왜 숨어 지내고 있느냐는 것이다. 존재를 드러낼 만한 적당한 때가 아니라는 우찬의 결정인가? 그럼 그 적당한 때는 언제지? 그리고 그날이 오면 나는……?

궁에서 쫓겨 날 것이다.

아직 박탈되지 않은 연국의 왕족 신분을 참작하여 홀몸으로 쫓겨나는 수모는 당하지 않더라도 더 이상 궁에 남아 있을 수는 없다. 애초에 황제의 정인이라는 명분으로 입궁했던 게 아닌가. 정인도 아닌 이설을 쥐고 짜내고 흔들어도 우찬에게 이용할 만한 가치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마! 유강이옵니다!”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가 크게 들리더라니 문 앞에서 급박한 목소리가 이설을 찾았다. 들어오라 이르니 복도를 뛰었던 속도 그대로 한달음에 달려왔다.

“한창 훈련 중일 시간에 여긴 무슨 일이니, 강아?”

“요즘 훈련대 분위기가 뒤숭숭해서 저 하나쯤 빠져도 아무도 모릅니다. 그보다 마마,”

“힘들게 들어간 곳인데 훈련을 게을리하면 안 되지.”

비슷한 대답을 들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기연이었던가?

유강은 검술에 특별한 재능이 없어 남들보다 배로 노력을 해야 겨우 쫓아갈까 말까 한 정도라는 기연의 엄격한 평가가 있었다. 노력을 안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원체 뺀질거리는 성격이라 요즘은 틈만 나면 잔꾀를 부리고 훈련을 빠지는 것 같다.

그래도 훈련을 하다 말고 갑자기 처소로 찾아오는 일은 없었는데. 등을 굽혀 무릎을 짚고 숨을 고르다 다시 이설을 불렀다.

“마마 제가 방금 훈련대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고 오는 길입니다!”

“무슨 소리 말이냐?”

“저희 연국이 북방 이민족을 도와 금국에 반역을 도모한다는 소문이 훈련대에 파다합니다.”

“……반역?”

“예! 달포 전에 북방 경계에 섰던 연국 군사가 남하하면서 이민족들이 도국의 국경선을 넘기가 쉬워진 모양입니다.”

“군사 이동은 해마다 있는 일인데 어찌…….”

북방 경계를 지키는 군사 이동은 해마다 있는 일이다. 지친 병사들을 교대로 쉬게 해 주어야 하기도 했고, 이맘때 경계 지역 주변으로 눈보라가 심해 경비를 서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어차피 눈보라 때문에 국경을 넘는 사람도 거의 없다시피 하여 경비를 서는 것이 무의미했다. 연국이 군사를 남쪽으로 재배치한 것이 이민족의 침략을 돕기 위해서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어디서 이상한 소리를 듣고 왔는지 제 말은 도통 들을 생각도 않고 아주 답답해 미치겠습니다.”

“소문의 시발점이 어딘지도 알고 있느냐?”

“도국 양화성에서 온 호위대 금군들이 그러더랍니다. 연의 군사들이 국경을 비우는 바람에 오랑캐들이 전부 양화성을 통해 들어온다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걸 알고 있는 유강만 속이 답답한지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연국은 매해 하던 대로 군사를 재배치한 것뿐이다. 하필 이 시기에 양화성과 북방의 국경을 넘어 침입하는 이민족이 늘어난 게 화근인 것 같다.

어차피 금군 사이에 도는 유언비어일 뿐이고 제가 나선다고 소문을 막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그냥 내버려 두겠지만 찝찝한 마음은 쉽게 떨쳐 버리기가 힘들었다.

“요즘 이민족 침략이 잦다 보니 그냥 하는 소리일 테야.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얼른 가서 훈련이나 하는 게 좋겠다.”

화가 나서 씩씩거리는 유강을 겨우 달래 내보냈다. 떠나기 전에서야 이설을 보고는 그간 잘 지내셨는지 안부를 묻기에 ‘못 지냈다.’ 대답하니, 농을 하는 줄 알고 그저 웃고 돌아섰다.

혼자 남은 이설이 침상에 널브러지듯 몸을 던져 눕혔다. 얼굴 위에 헝클어져 있던 머리카락은 절로 나오는 한숨에 날려 아래로 떨어졌다. 상체를 세워 일어나 면경에 미춰 보니 머리카락은 이제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길어져서 어깻죽지를 지났다. 잘라야겠다 마음은 늘 먹지만 막상 우찬을 보면 입이 떨어지지가 않는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이 얘기를 꺼낼 기회가 더욱 없을 것 같다.

*

새벽 사냥을 못 간지 몇 달이 지났다. 찌뿌둥한 몸을 달래러 해가 질 때쯤이면 대련장을 비우고 호위군들과 일대일로 대련을 했다. 무작위로 패를 뽑아 호위군 중 한 명이 우찬을 상대하는데, 우찬과 대련한 다음 날은 임의로 호위 교대에 빠지는 특혜가 있음에도 다들 꺼려 하는 일이었다. 가뜩이나 서로들 눈치를 보며 기피하는 일이었는데 며칠 전 호위군 중 하나가 우찬의 팔꿈치에 맞아 어금니가 깨진 뒤로는 더했다.

호위군들의 마음이야 어찌하든 우찬은 오늘도 대련장에 나서 호위군 하나를 곤죽이 될 때까지 몰아붙인 뒤 검을 내려놓았다. 터덜터덜 모래밭을 걷는 검은 복면의 사내는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앓는 소리 내다가 심기 불편해 보이는 흑영과 눈이 마주치자 곡소리를 단번에 멈췄다.

“엉망진창이야.”

우찬이 바닥에 내동댕이친 검이 굴러 흑영의 발치에 섰다. 얕게 퍼지는 모래 먼지가 주변에 깔렸다.

“여태 뭘 믿고 너희들에게 내 뒤를 맡겼는지 모르겠군.”

건장한 사내 하나를 서 있지도 못할 만큼 몰아붙여 놓고는 황제 본인은 숨만 조금 가쁘게 쉬는 정도라는 게 보고도 믿기 힘들었다. 황제의 검술에 특출난 재능이 있다는 건 일찌감치 알고 있던 흑영도 요 며칠 우찬의 대련을 볼 때마다 감탄을 금치 못했다.

“송구합니다, 폐하.”

윤 내관에게 젖은 물수건을 받은 흑영이 우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흑영에게 신랄한 악담이라도 퍼부으려던 우찬은 이내 쓸모없는 짓이라 여기고 말을 아꼈다. 하루 이틀 보던 실력도 아닌데 오늘따라 눈에 거슬리는 이유가 기실 호위군의 실력과는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싱겁게 끝난 대련으로 아직 해가 다 지지도 않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우찬을 보고 윤 내관은 저를 찾는 거라 생각했는지 종종걸음으로 모래밭을 가로질러 오다가 우찬이 가볍게 손짓을 하니 의미를 알아듣고 냉큼 뒤돌아 사라졌다.

“태금궁으로 돌아가시는 게 아니십니까?”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일러. 차란은 어디에 있는지 아나?”

“소청각에서 회국 사신들을 접대하고 있습니다.”

“금방 끝날 일은 아니겠지?”

“그럴 것 같습니다. 필요하시면 데려오겠습니다.”

“아니. 비차란은 없는 게 낫다.”

아닌 척 건방지게 훈수를 두며 신경을 거슬리게 할 차란을 굳이 데려올 필요는 없다. 어제오늘 만날 때마다 ‘절대 죽이시면 안 됩니다. 폐하’ 하며 가까이 붙어 중얼거리는 통에 없던 살의도 생길 지경이었다.

새로 입궁한 연이설은 우찬은 있는 줄도 몰랐던 황궁의 어느 구석에 일단 처소를 마련하였다. 밤낮으로 금군을 세워 두고 있으니 이상하게 여기는 궁인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차란의 말로는 이런저런 헛소문을 뿌려 놨기는 했으나 그리 오래 갈 소문은 아니라고 했다.

우찬의 생각도 그랬다. 당장이야 어떻게 숨겨 볼 수는 있어도 길어야 한 달. 경미찬 연회가 시작될 즈음이면 황궁 전역에 소문이 파다할 것이다. 황궁 서편 저 끝에 황제의 진짜 정인 연이설이 살고 있다고.

그리고 이 얘기가 비운궁의 이설에게만은 닿게 하지 않을 방법이 없다.

존재를 지울 방법은 죽이는 것 하나 뿐인데, 그 여파로 자신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 섣불리 행동에 옮길 수가 없었다.

젠장. 이쯤 되니 애꿎은 여인을 발견해 낸 양화성의 병사들을 먼저 죽이고 싶은 심정이다. 평생 모르고 살면 좋았을 것을.

“어디로 모실까요.”

우찬이 쓰고 난 젖은 수건을 받으며 흑영이 물었다. 은근슬쩍 대련장 밖을 쳐다보는 방향에 높이 솟아오른 나무 하나가 선명했다. 우찬은 문득 저 나무를 본지도 꽤 오래됐다, 생각이 들었다.

“연이설에게 가지.”

“예. 비운궁으로 모시겠습니다.”

어쩐 일인지 얼굴에 안도하는 감정을 여실히 드러내며 흑영이 담담히 말했다. 머리를 고정해놓은 띠를 풀어 막 흑영에게 건네려던 우찬이 허공에 손을 멈췄다. 서늘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붉은 머리끈이 하늘하늘 휘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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