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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141)화 (141/300)

달의 황홀경

141화

그렇게 하는 것이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라는 어투였다. 잘못 들었나 싶었는지 차란이 뭔가를 되물어 보려다가 다시 입을 닫고 음, 하고 생각을 하다가 그래도 안 되겠는지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비운궁의 루 소의 마마를 말씀하시……,”

질문을 채 끝내기도 전에 우찬의 눈빛을 알아차린 차란이 입을 잽싸게 다물었다. 그리고는 근처에 장식용으로 꽂아 둔 단도라도 날아오는 것은 아닌지 어깨를 바짝 오므라트렸다. 평온한 얼굴이 분명하지만 그리 너그러워 보이지가 않는 표정이 오늘따라 더 무서웠다.

“허면 새로 입궁하신 이설 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은밀히 데려왔으니 죽일 명분은 따로 만들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명분이고 뭐고 애초에 죽일 수가 없습니다. 그리 쉽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폐하.”

기가 막혀 언성이 높아진 차란이 황급히 목소리를 낮추긴 했지만 턱하니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은 모습에서 우찬의 말이 얼마나 당황스러운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설 님이 폐하의 진짜 정인이시라면, 두 분께서는 앞으로 생과 사의 연도 함께 하시는 겁니다. 만일 이설 님께서 잘못되시기라도 하는 날에는……,”

“나도 좋은 꼴 보기는 힘들겠군.”

“전부터 신이 그리 입이 닳도록 일러드렸는데도 참.”

한숨을 푹푹 내쉬며 가슴께를 두드리는 차란을 슬쩍 흘겨본 우찬은 느긋하게 다리를 꼬며 의자에 깊숙이 기대어 앉았다. 미묘하게 일그러진 얼굴이 피곤에 지쳐 보였다.

일이 좀 귀찮게 된 거 같은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분명 차란이 저런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올 초여름 이설이 사내라는 걸 알았을 때 농담 삼아 던진 말에 낯빛이 새파랗게 질려서는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저리 말을 했다. 앞으로 자신과 이설은 생과 사의 연을 함께 하게 될 거라고.

그런데 알고 보니 정작 생과 사의 연을 나눈 이는 따로 있었고, 그자야말로 우찬이 지금 이 순간 가장 죽이고 싶은 대상이 됐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죽이는 건 절대 안 됩니다.”

“그럼 적당한 곳에 가두고 죽지 않을 정도로만 네가 잘 신경 쓰도록 해라.”

“그게 다입니까?”

“뭐가 말이냐.”

우찬의 명쾌한 명령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차란이 꺼림칙한 태도로 턱 아래를 슬슬 긁었다.

“아니 그러니까 지금, 그……, 폐하의 진짜 정인이 나타나셨는데 뭔가 좀…… 상황이 개운치가 않아서 말입니다.”

“그럼 나더러 비운궁의 설이를 내쫓고 그 여인을 황후로 봉하기라도 하라 이 말이냐?”

“꼭 그리하셔야 한다 말씀드리는 건 아닙니다만…….”

다소 확신이 떨어지는 목소리가 힘없이 작아졌다. 말로는 그렇지 않다 하면서 표정은 딱 그런 모양새다. 내쫓기를 누굴 내쫓아? 우찬이 사납게 노려보는 눈을 거두지 않고 차란에게 고정했다. 차란은 제 말을 다시금 되짚어 보다가 말의 헛점을 찾아냈다.

“비운궁 마마를 쫓아내셔야 한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었습니다. 설령 폐하께서 그러시겠다 하셔도 제가 말렸을 겁니다.”

우찬을 달래려는 건지 설득하려는 건지 의도가 불확실한 말이 길게 이어졌다. 우찬은 듣는 둥 마는 둥 쳐다보지도 않고 차란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새로 입궁한 여인에게 황후 내줄 마음은 없다. 황후라니, 얼토당토않은 소리지. 황후는커녕 존재 자체를 전면에 드러낼 생각이 없는 여인이다. 조금 더 일찍 발견됐더라면 대우가 확연히 달랐을지는 모르겠으나 이제 와서 큰 기대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차마 죽이지 못해 데리고 있는 여인에게 우찬이 베풀 인정은 썩 너그럽지도 못했다.

“그런데 폐하, 가둬 두라 하시는 말씀은 진심이십니까?”

우찬이 말없이 고개를 쓱 돌리자 차란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농을 하실 분이 아니시지’라는 혼잣말이 우찬에게까지 크게 들렸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모실 곳은 황궁밖에 없사옵니다.”

“상관없다. 어디든 사람들 눈에 안 띄는 곳이 좋겠지.”

“그게 제일 어렵,”

“특히 이설은 절대 몰라야 할 것이다.”

우찬이 오늘 했던 말 중 가장 단호한 목소리로 차란의 오금을 저리게 했다. 차란은 버릇처럼 말대꾸를 하려다 흠칫 놀라 머뭇거리더니 결국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그게 바로 사실상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겁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속마음이 차란의 얼굴에 그대로 쓰였다.

이설의 안일한 황궁 생활을 볼 때 그 여인의 존재를 알기란 쉽지 않다. 자기 사람을 곳곳에 심어 두는 치밀함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이들을 돈 몇 푼이나 하급 관직 몇 자리에 부릴 수 있는 노련함도 없으니 이 사실 알 확률은 매우 희박했다.

하지만 언제나 예상치 못하는 변수가 있다. 여인을 황궁까지 호위한 호위대장이 초간궁 양 소원의 오라비이니 양 소원이야말로 저보다도 빨리 이 사실을 알았을지 모른다. 태세를 전환한 양 소원이 이설에게 이 사실을 다 알렸다면?

양 소원이 아니면 손조익? 손조익에게 이 여인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기회가 될까, 아니면 저처럼 덮어 두기 급급한 걸림돌이 될까. 손조익 쪽은 아직 잠잠하다.

이설에게 감시를 좀 더 바짝 붙여 뒀어야 했다. 그간 비운궁에 누구 오고 갔으면 이설이 누굴 만나고 다녔는지 알 길이 없다. 이설이 이 사실을 알기라도 하는 날에는…….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폐하.”

“……이설의 얘기라면 다음에 하지.”

“지금 하셔야 합니다.”

차란은 자리에 막 일어서려던 우찬을 단호하게 막아섰다. 언짢은 기색을 잠시 내비친 우찬이 이내 고갯짓을 하자 차란이 맞은편에 가 앉았다.

“상황이 복잡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신은 이해가 잘되지 않습니다. 진짜 정인은 숨겨 두고 가짜……,”

차란이 말끝을 흐리며 우찬의 눈치를 보다 결국 말을 바꿨다.

“루 소의 마마를 황궁에 계속 남겨 두시는 게 폐하의 결정이십니까?”

“일단은.”

“그러니까 그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차란이 드디어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뜨릴 지점을 잡아챘다.

“폐하의 정인도 아닌 마마께서 대체 왜 계속 황궁에 남아 계셔야 하는 겁니까?”

순간 싸늘해지는 분위기를 감지한 차란은 잔뜩 심각하게 찌푸렸던 미간에 힘을 풀었다. 하지만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생각은 없는 듯 대답을 듣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담은 눈이 황제를 똑바로 직시했다.

차란의 이해하지 못하는 요점이 뭔지 우찬도 잘 알고 있다. 문제는 우찬조차도 이 껄끄러운 질문의 해답을 명쾌하게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상황을 고려해 봤을 때, 차란의 제안보다 나은 것이 없었다. 여인 연이설을 정인으로 인정하여 황후로 추대하고 비운궁의 연이설은 폐위 후 연국으로 돌려보내면 그만이다. 나무랄 데 없이 깔끔하다. 약조를 운운하는 손조익을 처리하는 게 가장 큰 걸림돌이지만 해야겠다 생각하면 못 할 일도 아니었다. 우찬은 그저 손조익이 관련된 일에 구태여 복잡한 일을 만들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새로이 올라선 황후는 그 존재만으로도 손조익을 곤경에 빠뜨릴 것이다. 큰 손해는 아니겠지만 세상만사가 모두 제 뜻대로 돌아가지만은 않는다는 참 교훈을 알려 줄 수 있음에 만족할 수 있다.

“그게 폐하와 마마 두 분 중 누구에게 득이 되는 일입니까?”

이설이 황궁에 계속 남아 있는다고 해서 황제에게 득이 될 것은 없다.

그리고 그건 이설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그래도 연이설은…….”

감정 없이 메마른 눈동자가 창밖을 응시하며 작게 혼잣말을 했다.

“예? 뒤에 하신 말씀을 신이 잘 듣지 못하였습니다.”

황제가 제게 직접 하는 말인 줄 알고 차란은 의자를 당겨 앉으며 우찬 가까이 다가갔지만 황제는 두 번 반복하지는 않았다.

반달에서 약간 더 차오른 달은 오늘도 밝다. 이런 날의 이설은 자태가 더 곱다. 골치 아픈 이 일만 없었더라면 어김없이 찾아왔을 이설과 달구경이라도 나섰을 텐데.

역시 계획에 없던 불청객은 일찌감치 죽이는 게 제일 간단하지 싶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든, 그래도 연이설은 절대 황궁을 떠날 수 없다.

*

“마마, 주 상궁이옵니다.”

“들어오게.”

장지문 너머의 목소리를 안으로 들이며 이설은 탁자 위에 펼쳐 놓았던 그림 족자를 조심히 들어 올렸다. 여기저기 구겨지고 찢어지며 성한 곳이 남지 않은 그림을 되살려 내는 데에만 열흘이 넘게 걸렸다. 이제 풀을 먹인 그대로 잘 말리기만 하면 되니 겨우 한시름 놓았다.

볕이 잘 드는 곳에 족자를 펼쳐 둔 뒤 이설이 자리로 돌아왔다.

“부탁한 건 좀 알아보았는가?”

“예. 마마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제 낮부터 황궁 서편 궁으로 사람 하나가 들어왔다 합니다.”

“여인, 이라던가?”

“예. 곱게 단장한 여인이라 하였습니다.”

“…….”

“마마, 괜찮으십니까?”

자리에서 휘청 몸이 흔들린 이설이 양손으로 탁자 위를 짚고 고개를 푹 숙였다. 서둘러 다가오려는 주 상궁에게 손을 뻗어 막고는 길게 심호흡을 했다. 어차피 모르고 있었던 일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동요할 필요는 없었다.

“일단 자리에 앉으시지요.”

요동치는 마음을 조금 가라앉히고 주 상궁의 말대로 자리에 앉았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덮어쓰고 앞으로 주 상궁이 무슨 말을 하든 흔들리지 않겠다 다짐했다.

“폐하는 물론 다른 이가 드나든 적은 없고 한밤중에도 금군이 숙위를 서며 지키고 있다 합니다.”

“소문은 어디까지 퍼진 것 같나?”

“서편 구석 궁에 새로 사람이 들어왔다는 것을 다들 알음알음 알고는 있습니다. 문제는 그 여인이,”

“누구이며 왜 입궁했냐는 거겠지.”

“……알아본 바로는 북쪽 이민족을 대표하여 경미찬 연회를 하례하기 위해 입궁했다 알려진 듯합니다.”

그럴듯한 핑계였지만 쉽게 수긍이 가지는 않는다. 차라리 이 얘기를 믿으면 좋으련만, 이설이 장담하건데 그 여인의 입궁 목적은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살며 그 어느 때에도 지금만큼 자신의 직감에 확신이 든 적이 없었다.

여인의 존재를 알게 된 이래로 이설은 하루하루 불안감에 말라가고 있는데 우찬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초조함을 못 이긴 이설이 어제 오후 태금궁으로 찾아가겠다 기별을 넣었지만 아직 답신이 오지 않았다. 황궁에서의 무답은 관대한 불허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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