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140화
“가만히 있어 보아라.”
굳은살투성이에 손톱이 닳은 거친 손과 달리 여인의 가녀린 손목이 한 손에 잡혀 들었다. 슬쩍 당겨 소매를 위로 걷은 순간 상처와 같은 흔적이 선명히 드러났다.
“읏―.”
저도 모르게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는지 여인의 입술 사이로 짧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황제는 곧 뿌리치듯 손목을 놓아준 뒤 준비해 놓은 자리에 앉았다.
팔걸이에 양 팔꿈치를 걸친 황제가 조용히 여인의 전신을 훑었다. 짙은 밤색의 머리 색을 보니 금국인이 아닌 것은 확실히 알겠다. 산에서 발견됐다는 말을 뒷받침하듯 손은 온통 굳은살이 박여 있고, 피부색은 보통의 금국 귀족 여인들에 비해 어두웠다. 키와 체격은 적당하나 유독 손목만은 가늘었다.
입궁하며 새로 갈아입었는지 의복은 보통의 금국 여인들이 입을 법한 모양새다. 머리의 장신구는 적당했지만 황제의 취향은 아니었다. 흔한 가락지나 귀걸이는 하나 없고 목에 건 향갑은 낡고 오래된 싸구려다.
여인의 전체적인 모습을 훑어본 뒤에야 황제는 시선을 위로 올렸다. 눈코입 어디 하나 모난 구석은 없다. 저보다 먼저 만나 본 차란이 흘리듯 ‘우려했던 것보다는 무척 곱더이다’ 하고 윤 내관에게 슬쩍 말한 것이 그냥 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곱고 아리땁다는 소문이 자자한 여인들은 저 여인이 아니더라도 수없이 많이 보았다. 여인뿐 아니라 사내도 보았다. 허나 그중 황제의 마음을 동하게 만든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 여인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네 이름이 뭐라 했지?”
“연 가(家)의 배꽃 리(梨)와 눈 설(雪)자를 쓰는 연이설이라 하옵니다.”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다시 묻는 이유는 없다. 백 번을 더 묻는다 해도 대답은 한결같을 것이다.
“언제부터 그 이름이었느냐?”
“태어……, 날 때부터입니다.”
여인이 처음으로 당혹스러운 기색을 보이며 대답했다. 별 말 같지도 않은 것을 질문이랍시고 들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여겼다.
“천지명관에서 찾은 연이설이라는 이름에 너는 없었다.”
“소인의 아비가 따로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들었습니다.”
“그게 진짜 네 이름이라는 것을 증명할 호패는 있느냐?”
“없습니다.”
“헌데도 네 이름이 연이설이라 고집을 부리는구나.”
“고집이 아니옵니다.”
슬쩍 비웃듯 올라간 황제의 입꼬리를 보고서도 여인은 강직하게 대답했다. 우찬을 마주하고도 겁먹은 기색이 일절 없는 얼굴이 그저 태연하기만 했다.
“비록 제 아비와 언니만이 불러 주는 이름이었지만, 연이설이 소인의 이름이 아니라면 대관절 소인의 이름이 무엇이란 말이옵니까?”
“…….”
“병상에 누우신 어머니께서 몇 날 며칠을 고민하여 지어 주신 이름입니다. 부디 이 이름마저 부정하지는 말아 주시옵소서.”
돌연 여인이 바닥에 무릎을 대고 부복하며 간청했다. 바닥으로 스르르 흐트러지는 밤색의 머리카락을 내려다보는 우찬은 가볍게 실소했다.
먼저 만나 본 차란이 말하기를, 여간 보통내기가 아니라 하였는데 그 말이 사실이었다. 황제 앞에서도 이 정도 강단을 보여 준 여인이니 차란에게도 보통 당차지는 않았을 것이다.
“네 부모는 북쪽 출신인가?”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소인의 아비는 도국에서 도망친 노비셨고, 어미는 부족에서 추방당한 서녀이셨습니다. 천지명관에 이름을 올리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인 줄로 알고 있사옵니다.”
여인의 아비가 정말 도망친 노비였다면 천지명관에 이름을 올리지 않은 이유는 납득할 수 있다. 여인의 말이 정말 모두 사실이라면 말이다.
“그 이름은 언제부터 나타난 것이냐.”
“첫 글자가 보이기 시작한 것은 무언산의 마지막 눈이 내리고 한 달 여쯤이 지난 뒤였습니다.”
황제는 여인이 말한 시기를 적당히 가늠해 보았다. 무언산이라 하면 북쪽의 악명 높은 설산들에 비해 기후가 제법 따뜻하여 금국 기준으로 여름의 초입부터는 눈이 거의 오지 않는 지역이다.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얼추 우찬이 이름을 가졌던 시기와 비슷하다.
“손목에 그런 흔적이 나타났는데 여태껏 이상하다 생각해 본 적도 없었느냐?”
“평생을 산 중에서만 살아온 소인에게 이 흔적은 누군가의 이름보다는 벌레에 물린 상처에 더 가까웠습니다.”
“하여 약초를 찧어 발라 꽁꽁 싸매고 다녔다고?”
산어귀를 수색하는 군병들에게 발견될 당시 여인은 손목을 꽁꽁 싸매고 있었다고 한다. 근래에 산 깊은 곳에서 불법 시술을 받는 사람들이 늘어난 터라 군병들도 처음에는 그렇게 오해를 했다. 무슨 일인지 자신들을 보고 죽기 살기로 도망치는 여인을 잡아 몸수색을 한 군병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여인의 손목에 붉은 상흔처럼 금(金)이라는 천자가 선명하였다.
“예.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 때문에 나머지 두 글자가 늦게 나타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여인의 말대로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우찬의 경우에는 세 글자가 동시에 나타난 데에 반해 사람에 따라서는 한 글자씩 간격을 두고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고, 그 간격 역시 사람마다 천차만별이었다.
사실 우찬도 제 손목에 연이설이란 이름을 가지기 전까지는 달리 관심도 없던 것이었다. 어느 게 맞는지, 무엇이 더 일반적인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네 손목에 흔적은 벌레에 물린 상처 따위가 아니라 내 이름이다.”
“하찮은 소인에게 더없는 영예이옵니다.”
“영예?”
우찬이 코웃음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영예가 너를 어떻게 묶어 둘 줄 알고 그리 태평한 소리를 하느냐.”
황궁에 발이 묶인 어느 한 사람을 생각해 볼 때 여인의 방금 이 말이 얼마나 태평한 소리인지 비웃음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소인의 어미와 언니는 모두 일찍이 하늘로 돌아갔고, 남은 아비마저도 얼마 전 귀천하였습니다. 더는 소인의 곁에 남은 이가 아무도 없다 생각하였는데 여기……,”
여인이 납작 엎드렸던 허리를 살짝 들어 올려 우찬에게로 고개를 꺾어 들었다.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황제에게 홀리기라도 한 듯 넋 없이 황홀했다.
“……하늘이 점지해 주신 평생의 반려를 만나지 않았겠습니까.”
여인이 기뻐 마지않는 눈으로 황제를 올려다봤다. 순간 저를 보는 여인의 눈빛에서 까닭 없이 불쾌함이 든 우찬이 고개를 돌려 눈을 피했다.
여인을 자리에 가만히 내버려 둔 채 우찬은 말없이 주위를 거닐었다. 공간을 왔다 갔다 몇 번이나 반복하며 걷다 한참이나 흐른 후에 다시 여인의 앞에 섰다.
“밤이 늦었으니 오늘은 이만 쉬어라. 필요한 것이 있으면 밖에 궁인들에게 일러라.”
“예.”
“단, 다른 이들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 너를 따르는 자들 외에 그 누구와도 말을 섞지 말고, 허락된 장소를 벗어나지도 말라.”
자리에서 일어나 배웅하려는 여인을 뒤로하고 우찬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별궁을 빠져나왔다. 밤바람이 서늘한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고서야 깨달은 것이지만, 여인과 함께 있는 동안 달큰한 꿀 향 같은 것이 미약하게 났다. 향갑을 목에 걸고 있더라니, 그 때문인가 싶다.
“해가 뜨기 전 거처를 옮기고 아무도 만나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하라.”
“거처는 어디가 좋을까요?”
“어디든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예, 분부대로 하겠나이다.”
호위대장이 믿음직스럽게 대답하며 물러났다. 양 소원의 작은 오라비라고 하였던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호위대장은 다른 이로 임명해야 한다는 차란의 말을 아직은 더 두고 보는 중이다. 양 소원의 아비이며 금의 사장군 중 하나인 원후연 장군이 여차하면 저 여인을 수양딸로 데려갈 생각인 것 같은데 그렇게 될 경우 벌어질 일들을 아직 계산해 보지 못했다. 요 며칠 상황이 무척 극단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본궁으로 향하는 걸음 뒤로 윤 내관이 바짝 쫓아와 붙었다.
“비 승상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피곤하여 돌려보낼까 하다 이미 망친 하루의 끝을 차란으로 마무리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하여 군말하지 않았다.
침전 문을 열자 차란이 여느 때보다 초조한 얼굴로 우찬을 맞이했다.
“만나 보셨습니까?”
“보고 오는 길이다.”
“어떠십니까?”
“무엇이?”
“전에 없는 마음이 드신다거나 뭔가……, 그, 상대적으로 좀 다른 느낌이,”
“연이설을 보았을 때와 다른지 묻고 싶은 것이냐?”
“…….”
“이제 이름도 멋대로 못 부르겠군.”
“루 소의 마마라 하시지요.”
하필 같은 것이 이름이라 앞으로 부르기도 성가시게 생겼다. 차란의 말대로 비운궁의 이설을 루 소의라 부르면 그만이긴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내심 탐탁지가 않았다. 연이설이라는 버젓한 이름을 두고 뭣 하러 루 소의라 부른단 말인가. 하물며 누더기 옷을 걸친 루(褸:누더기 루) 소의라며 여기저기서 손가락질받던 그 이름을 이설이 좋아할 리도 없고 말이다.
배꽃 리에 눈 설 자를 쓰는 ‘이설’이다. 연이설은 그 이름 그 자체였다.
뒤틀리는 마음을 억누르느라 애쓰는 그 잠깐을 참지 못하고 차란이 대답을 재촉했다.
“하여 만나 보신 느낌이 어떠하십니까, 폐하?”
“별거 없다. 그냥 평범한 여인이었어.”
“가슴이 두근거린다거나, 손발이 저린다거나, 숨이 달아오르신다거나 하지는 않으셨습니까?”
“…….”
“없으셨다니 다행입니다.”
미간을 구기는 우찬을 보고 차란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무엇이 차란으로 하여금 걱정을 덜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굳이 물어 알아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리하면 폐하, 앞으로의 일은 어떡하실 생각이십니까?”
우찬이 흐음, 하는 가벼운 한숨 소리를 내며 턱을 감싸 쥐었다. 어딜 봐도 진지하게 생각하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일부러 차란을 초조하게 만들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시간을 길게 끌고는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그냥 죽일까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