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139화
“녹염각에 금잔화 꽃봉오리가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구경이라도 한번 다녀오시는 게 어떠하십니까?”
양 소원이 다녀간 이후로 거의 모든 시간 동안 안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지만 주 상궁은 이번에는 낌새가 조금 이상했다고 느낀 모양인지 넌지시 외출을 권했다.
다시 봉오리가 터지는 금잔화라니 내심 보고 싶은 마음이 들긴 한다. 하지만 거기까지 걸어갈 여력이 없었다. 마음을 추스르려고 노력은 하는데 별 효과는 없다. 가만히 눕거나 앉아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렇게 시간이 계속 흐르면 곧 우찬의 귀한 손님이 입궁할 것이다. 무슨 수를 써도 그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잠자코 돌아간 양 소원은 지금쯤 다른 수를 찾고 있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의 성공을 바라는 마음과 실패를 바라는 마음 중 어느 쪽에 더 진심이 더 쏠리는지 알 길이 없다. 이설은 아예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주 상궁을 돌려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기연이 찾아왔다. 방금 주 상궁에게 들었는지 걱정스레 안부를 묻기에 대강 둘러대며 어물쩍 넘어갔다.
“그런데 지금 한참 훈련할 시간이 아닌가?”
“요즘 군병들 훈련 분위기가 어수선하여 저 하나쯤 빠져도 아무도 모를 겁니다.”
“국경 쪽으로 차출되는 군병들이 많다 들었는데, 그 때문인가?”
“예. 맞습니다.”
“생각보다 상황이 많이 심각한가 보군.”
“아직 직접적인 무력 충돌은 없지만 일단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건 맞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연국에도 이 상황을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
“일단 사람은 보내 놓았는데 아직 답신이 없어. 가는 길목이 모두 막힌 상태라 그렇다고는 하는데…….”
기연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두건을 벗었다. 펄럭이는 검은 천에서 흐릿한 땀 냄새가 났다. 이설이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잔기침을 하자 기연이 겸연쩍게 사과했다.
“훈련은 할 만하고?”
“네, 배울 것도 많고 재미있습니다.”
입는 옷마다 땀 냄새가 배도록 종일 뛰고 흙바닥을 구르는 것이 어째서 재미있는 건지 모르겠다. 사내로 태어났으면 응당 저렇게 살아야 하는 게 맞는 걸까? 모르긴 몰라도 꽃밭에 심어 놓은 꽃처럼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고 누가 물 주기만을 기다리는 저보다는 나은 것 같다.
우찬이 찾아와 주지 않으니 뭘 해야 하는 줄도 모르고 멍하니 누워 있기만 하는 삶이란 그저 허무하고 한심하다.
“마마?”
“…….”
“……이설 님?”
멀뚱히 기연의 굳은살 배긴 손을 쳐다보던 이설이 ‘응?’ 하고 대답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기연과 눈이 마주치자 배시시 웃더니 부끄러운 듯 볼을 만졌다.
“그 이름 오랜만이네.”
“이제는 루 소의 마마님이 더 익숙하실 테죠.”
“꼭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아. 이제는 그냥…… 나도 내가 뭔지 잘 모르겠어. 내가 진짜 연이설이 맞는 건지도 헷갈려.”
기연이 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이설을 봤지만 이설이라고 딱 떨어지는 설명을 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기연이 더 묻기 전에 이설이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훈련까지 거르고 갑자기 찾아온 이유가 있을 텐데?”
군병 훈련 분위기가 어수선하건 말건 개의치 않을 기연이 아침부터 찾아오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기연이 어려운 얘기를 꺼내려는지 자세를 고쳐 잡았다.
“여기 후궁들 중 이설 님과 가까이 지내시는 마마가 한 분 있지 않습니까?”
“허 미인을 말하는 건가?”
“도국 양화성 근방의 이민족 출신이라던데, 알고 계셨습니까?”
“출신 지역은 최근에 알았지. 헌데 왜?”
“지금 그 근방 부족들이 모두 지난번 수렵제 일의 배후 세력으로 의심되고 있다는 것도 알고 계십니까?”
이설은 아무 대답하지 않았지만 동요하지 않는 눈빛을 읽은 기연이 낮은 한숨에 근심을 담아 뱉었다.
“허 미인의 출신 부족은 그 근방에서 세력이 가장 큰 것은 물론이고, 자체 군병 훈련을 허락받은 유일한 부족이라 합니다. 그렇다 보니 흘러가는 정황이 좀……,”
“다들 허 미인을 의심이라도 하고 있는 건가.”
“일단 군병들 사이에서는 그렇습니다.”
“…….”
“그러니 당분간은 허 미인과 거리를 좀 더 두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괜한 오해를 살 만한 일은 미리 조심하는 게 좋으니까요.”
허 미인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지만, 기연은 이설의 말을 단호하게 부정했다. 본래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라며, 특히나 이설처럼 남에게 잘 속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만에 하나 이 일로 연국까지 연루된다 생각해 보십시오, 마마.”
쓸데없는 걱정이라 부인하고 싶었지만 기실 틀린 말은 아니다. 연국은 위치는 물론 날씨에 따른 생활 방식이나 관습, 문화 등이 다른 나라들보다 이민족과 더 가깝다. 그 탓에 연국 자체를 이민족으로 치부해 버리는 일도 종종 있었고 이민족들과 생기는 갈등에 덩달아 피해를 보기도 했다.
기연의 말대로 허 미인과의 일에 잘못 연루되었다가는 자신은 물론이고 연국에까지 피해를 입힐 수 있다. 하지만 아직 허 미인 쪽으로 혐의가 완전히 드러난 것도 아닌데…….
“마마께서 폐하의 정인이신 데다가 이리 총애를 받고 계신 이상 큰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않겠습니까?”
순간 할 말을 잃은 이설이 대답을 머뭇거리는 사이 기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오랜만에 같이 석반이라도 들지 않고?”
괜히 붙잡는 척하면서도 기실 이설도 기연이 얼른 물러가 주길 바랐다.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갈 기분이 도저히 아니었다.
“해가 지면 황궁 밖으로 나갈 일이 있어서 몇 가지 준비할 게 있습니다.”
“왜? 또 화홍이와 저잣거리라도 나가느냐?”
아닌 걸 알면서도 괜히 놀리는 말투로 이설이 아무렇지 않은 척 장난을 걸었다. 두건을 주머니에 챙기며 당황하던 기연은 이내 벌겋게 달아오른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그건 아니고……, 주안 밖에서 들어오는 호송대를 황궁까지 호위하러 나갈 일이 생겼습니다.”
“황궁까지?”
“예. 아마 이번 일과 관련된 자인 거 같은데 황제께서 직접 문초하실 생각이신가 봅니다.”
기연이 언제 어떻게 나갔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텅 비어 있던 머리에 정신이 든 것은 주 상궁이 석반을 들이겠다며 들어왔을 때였다. 그제야 잠에서 깬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오늘 밤, 황제의 진짜 정인이 입궁할 것이다.
*
달이 훤히 비추는 깊은 밤, 우찬이 평소보다 훨씬 늦게 태금궁으로 들어섰다. 곧장 본궁으로 향할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우찬은 윤 내관을 포함하여 모든 궁인들을 뒤로 물리고 홀로 태금궁 한편에 있는 별궁으로 향했다.
모두들 우찬이 무슨 생각인 건지 궁금해하는 눈치였지만 어제, 오늘 내내 심기가 불편했던 우찬인지라 그 앞에서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여간해서는 우찬도 잘 찾지 않는 별궁은 오늘따라 금군들의 경비가 삼엄했다. 다들 영문도 모른 채 금위대장의 명을 따를 뿐이었다. 오늘 밤 쥐새끼 하나도 이 별궁 안으로 들여보내서는 안 된다는, 지극히 상투적인 명이었다.
“……안에 있느냐.”
“예. 폐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찬을 보고 호위대장이 급히 자리를 이탈하여 달려왔다. 우찬을 바라보는 눈에 한없는 경외심이 가득하였으나 우찬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
“존명.”
호위대장을 지나쳐 우찬이 별궁으로 들어섰다. 진상품으로 받았으나 우찬의 흥미를 끌지 못한 모든 물건들은 별궁 곳곳에 장식되어 있어 그 화려함이 본궁 못지않았다. 한걸음 건너 한 걸음마다 깔려 있는 장식품들을 보면서도 우찬은 감흥 없이 생각이 잠겼다.
조금 전 해가 지나고 한참 뒤 양화성에서 호송대가 도착했다. 일단 황궁에 알려진 얘기로는 황제 피습 사건과 관련된 중죄인을 호송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저 명목상의 소문일 뿐이었다.
복도 끝에 방 앞에 멈춘 우찬은 잠깐의 망설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복도 못지않게 화려한 장식품들이 즐비한 커다란 방 한가운데 바닥에 웬 여인 한 명이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문 앞에서 지긋이 여인을 내려다보던 우찬이 느리게 걸음을 떼며 다가갔다.
“고개를 들라.”
낮은 목소리가 촛대에 켜진 촛불처럼 주위를 일렁였다. 여인이 곧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무언산 연주학의 차녀 연이설, 살아 계신 성천자 봉황의 현신이시며 모든 것의 주인이신 황제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홍복을 누리소서.”
급히 배우고 외운 티가 나는 영락없는 시골뜨기다. 바닥을 짚은 손은 손톱이 다 부러지고, 손가락 마디마디에 굳은살이 선명했다. 농사일을 한다 했던가. 아니, 아마 산에서 생활하던 것을 발견했다 들은 것 같다.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먼 길 오느라 수고가 많았다.”
마땅한 대답이 없어 의례적으로 해 준 말에 여인이 수줍게 미소를 지으며 한쪽 볼을 감싸 안았다. 아마 손에 익은 버릇인 듯 했다. 우찬이 빤히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으니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손을 바닥으로 내렸다.
우찬의 시선이 여인의 손을 따라 바닥으로 향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보거라.”
우찬의 말에 여인은 머뭇거리는 기색도 없이 자리에서 다소곳하게 일어나 손을 모았다. 앞에 서 있는 이가 황제이니만큼 행동거지를 조심히 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긴 했지만 겁을 먹은 기색은 전혀 없었다. 시골뜨기치고는 담이 제법 있었다.
“네가 내 이름을 가졌다던데.”
“그렇다 들었습니다.”
“몰랐던 것이냐?”
“아뢰옵기 부끄럽사오나, 소인은 배움이 짧아 천자를 읽지 못합니다.”
천자를 모른다는 사실이 부끄러운지 여인이 다시 볼을 감싸 쥐었다. 다시 선명하게 드러나는 손목을 놓치지 않고 우찬이 빠르게 다가가 붙잡았다. 놀란 여인이 반사적으로 힘을 당겨 빼내려다가 코앞에 선 우찬을 보고 맥없이 힘을 탁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