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138화
“어찌 그리 확신을 하십니까.”
“폐하를 연모하시지 않습니까, 마마.”
“…….”
“폐하의 진짜 정인이 나타난다면 마마께서 어찌 되실지는 잘 알고 계시겠죠.”
쫓겨날 것이다. 본래 황제의 정인이라는 명목으로 후궁 첩지를 받아 입궁한 것이었다. 그러니 우찬의 진짜 정인이 나타난 이상 더는 황궁에 살 수는 없었다. 정말 운이 좋아 황궁에 남아 있는다 해도 더 이상 우찬의 총애는커녕 관심조차도 기대할 수 없을 게 불 보듯 뻔했다. 이쯤 생각하니 차라리 황궁에서 쫓겨나 연국으로 돌아가는 게 더 나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대답 없이 입을 꾹 다문 이설의 머릿속을 읽은 양 소원이 거보라는 듯 턱을 치켜올렸다.
“제 앞에서까지 그리 선한 척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마마야말로 누구보다 그 여인이 사라지기를 바라실 테니까요.”
이설은 그런 게 아니라고 고개를 흔들고 싶었다. 자신은 그 여인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고. 하지만 실상은 묵묵히 양 소원의 얘기를 듣기만 할 뿐이었다.
“저는 마마가 그리 탐탁지는 않습니다.”
별안간 자신을 향한 속마음을 털어놓는 양 소원이 허심탄회하게 웃었다가 곧 표정을 굳혔다.
“허나 그 여인에 비할 바가 아니지요. 적어도 마마께서는 어엿한 왕가의 적통이신 데다가 사내가 아니십니까?”
“양 소원 마마께서도 제 속으로는 폐하의 적통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높이 쳐주시나 봅니다.”
누구와 대화하나 결국 자신이 황후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사내인 자신은 후사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허탈한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말투에도 양 소원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폐하의 후사를 이은 황후의 권력은 아마 상상도 하실 수 없으실 겁니다.”
“폐하의 이름을 받은 것도 모자라 그 여인이 황후가 되어 후사를 이을까 걱정되십니까?”
“물론입니다.”
한번 속마음을 드러낸 양 소원은 더 이상 거리낄 게 없는 지 한 번 고민 없이 즉답했다.
“제가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왔는지 아신다면 그리 쉽게 말씀하지 못하실 겁니다.”
“…….”
“그러니 더 잠자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더 듣고 있기에 지친 이설이 급하게 말을 막았다. 단호하게 떨어지는 말끝에 초조함이 느껴지지 않도록 애를 썼지만 양 소원의 눈에는 그게 뻔히 보이는 것 같았다.
“내게 원하는 게 무엇인지만 말씀하세요.”
양 소원이 여유작작한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제야 본론에 들어선 것이다.
“연국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무슨 일에 말입니까.”
“호위대가 내일 밤 연국의 금계 구역을 지날 예정입니다. 제 사람들을 시켜 보내기에는 시간도 촉박하고, 뭣보다 타국 사람의 출입이 엄격히 제한된 곳이더군요. 마마께서 연국에 사람을 시켜 적당한 소동만 만들어 주신다면 나머지는 제 오라버,”
“싫습니다.”
“마마.”
“이만 돌아가세요. 일단 오늘 일은 모두 못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허나 만일 폐하의 정, 인……,”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간신히 떼었다 붙이며 쥐어짜 내는 목소리가 스스로도 한심했다. 이설은 입술을 꽉 다물었다가 다시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분께서 황궁에 도착하기 전 어떠한 변고라도 있을 시에는 양 소원 마마의 책임 여부를 불문하고 폐하께 모두 고할 테니 명심하십시오.”
“그런다고 마음이 편안하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을 건 또 뭐겠습니까.”
최대한 담담한 척 애쓰는 마음을 몰라주고 미세하게 떨리는 손을 탁자 아래로 감춰 버렸다. 꽉 잡은 두 손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리 위선을 뒤집어쓰고 과연 언제까지 버티실 수 있을지 제가 한번 똑똑히 지켜보겠습니다.”
“양 소원!”
드르륵 의자 밀리는 소리와 맞물린 이설의 목소리가 허공에 사라졌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양 소원이 굳은 얼굴을 한 채로 넓게 퍼진 치맛자락을 신경질적으로 한데 모았다.
따라 일어난 이설도 못지않게 화가 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마주 서서 서로를 쏘아보는 두 눈이 오랫동안 허공에서 부딪혔다.
“머지않아 오늘 일을 후회하게 되시는 날이 올 것입니다.”
치맛단을 휙 날리며 돌아선 양 소원이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갔다. 양손으로 벌컥 열린 문 뒤로 초간궁 궁인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었다. 그 사이를 거칠게 밀며 멀어진 양 소원이 저 멀리에서 뒤를 돌아 이설을 한 번 더 쏘아봤다.
긴 거리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다 이내 이설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머지않아 오늘 일을 후회하게 되시는 날이 올 것입니다.’
양 소원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머지않은 그날이 당장 오늘 밤에라도 찾아올 것만 같았다.
*
초조하게 손톱만 잘근잘근 물어뜯기를 반복하는 하루가 또 지나갔다.
그제 양 소원이 다녀갔던 날 밤사이 바람이 많이 불었다. 그 일로 얼마 남지 않은 능소화가 모두 지고 세월에 쓸린 낡은 담벼락에는 허름한 초록 잎사귀만 듬성듬성 남았다. 바닥에 떨어진 꽃잎들을 쓸던 아이들은 담벼락에 초라하게 붙어 있는 잎들이 흉물스럽다며 다 떼어 버리려고 했지만 이설이 말렸다.
한때 그토록 예쁘다며 다른 이들이 쳐다보는 것도 싫다 소중히 여길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흉물이라느니, 미관을 해친다느니 하는 소리가 꼭 자신에게 하는 것만 같아 숨이 턱턱 막혔다.
양 소원이 다녀간 뒤에도 황궁은 잠잠하다. 아직 황제의 정인에 대한 소문이 돌기 전인지 아침이면 고관대작들의 아첨을 바른 귀한 물건들이 비운궁 마당에 쌓였다. 이설은 그게 뭔지도 모르고 쓰윽 훑은 뒤 모두 되돌려 주라 말했다. 다 되돌려 줘야 하는 걸 알면서도 신이 났던 궁인들은 금세 실망하며 꺼내 놓은 물건들을 도로 제자리에 넣어 정리했다.
“해국에서 만든 천리경은 부르는 게 값이라 할 만큼 구하기 힘든 물건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저건 받아 놓으심이…….”
“그렇게 귀한 물건이라면 더더욱 돌려보내야지.”
“우리 마마께서는 어쩜 이리 청렴하실까.”
함 안에 주섬주섬 물건들을 정리하는 화홍이 장난처럼 말하며 웃었다. 그 말에 함께 있던 다른 아이들이 ‘그러게’ 하며 맞장구를 쳤다. 보통 때 같았으면 멋쩍게 따라 웃었을 이설이었지만 이번에는 별 반응 없이 뒤돌아 후원으로 향했다. 깔깔 웃던 궁녀들만 남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서로를 번갈아 쳐다볼 뿐이었다.
후원에 들어선 이설은 여느 때처럼 삼설의 이름을 불렀지만 하얀 목화 솜뭉치 같은 작은 짐승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또 어디 덤불 사이에 숨어 태평히 잠을 자고 있을 게 뻔했다. 이 황궁에 삼설이보다 팔자가 좋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청렴…….”
판판한 돌 위에 앉은 이설은 화홍이 장난처럼 던진 말을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저더러 청렴하다 하였다. 청렴이라 함은, 탐욕이 없다는 말이겠지.
탐욕.
……이 없을 리가 있나.
욕심 없는 인간은 없다. 그저 밖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
그런 점에서 이설은 재주가 좋은 편이었다. 멍한 얼굴을 하고 말없이 눈만 깜빡이며 앉아 있으면 그 어느 누구도 이설이 마음속으로 무엇을 가장 갈망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렇게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는 설령 누가 이설에게 갖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물어도 정말 간절히 원하는 것은 선뜻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황제를 원하는 마음을 안으로 꼭꼭 감춰 왔다. 누가 알까 봐, 누가 볼까 봐 전전긍긍하며, 진정 원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척 외면했다.
그러니까, 이를 다시 양 소원의 말로 하자면, 위선을 뒤집어쓰고 안간힘을 다해 버텼다. 그러면 그걸로 된 줄 알았다.
어쩌면 자신은 정말 양 소원의 말대로 위선자일지도 모르겠다.
“마마, 주 상궁입니다. 아뢸 말씀이 있사옵니다.”
좁은 틈 사이로 주 상궁이 나왔다. 주 상궁은 요즘 마음의 짐을 덜어 낸 이후로 얼굴색이 많이 밝아진 것 같다.
“그제 태금궁으로 보낸 서신에 답신이 왔습니다.”
“아.”
그제 양 소원을 만나기 전 우찬에게 서신을 보냈다. 안부를 물었으나 중요한 것은 오늘 밤 태금궁으로 찾아뵈어도 괜찮겠냐는 게 주목적이었다. 서신을 보낸 뒤 양 소원을 만났고, 그 뒤 혹시라도 우찬이 오늘 밤 당장이라도 태금궁으로 부를까 봐 겁을 먹었다. 정인도 뭣도 아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신을 황궁에서 쫓아내려는 건 아닌지, 걱정 위에 다시 걱정이 켜켜이 쌓였다.
“뭐……라 하던가?”
이설이 조심스럽게 물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털었다. 이설이 눈을 돌린 사이 주 상궁이 난처한 얼굴로 서신을 다시 훑어보고는 대답했다.
“당분간 마마의 태금궁 출입을 금……, 하겠다 하십니다.”
“…….”
“그제 신녀의 점괘가 나왔는데, 강한 음기가 폐하의 양기를 어지럽히고 있기 때문에 낮과 밤에 균형이 깨진 거라 하였답니다. 이에 태금궁에서는 음기가 찬 후궁들의 출입을 당분간 엄격히 금하겠다 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음기가 가득 찬 후궁들은 어차피 평소에도 태금궁 문턱을 넘을 수가 없었다. 이는 모두 핑계고 그저 저 하나를 태금궁 밖으로 밀어내기 위한 얕은 술수다.
본인이 말하고 난 뒤에도 기가 막힌지 주 상궁은 말없이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서운한 마음에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철없던 시절도 거의 지났다. 허탈함에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았다 터트리며 하, 하고 짧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주 상궁이 흘끔 제 눈치를 보는 것 같기에 더는 티 내지 않기로 했다.
“그건 그렇고, 내 얼마 전에 유강이를 시켜 연국에 사람을 좀 보냈었는데 아직도 소식이 없네만.”
“아직 연국에서 온 서신은 없습니다.”
“그래?”
“마마께서도 들으셨겠지만 지금 각 산길에 위치한 국경마다 이민족으로 구성된 도적들이 들끓고 있어 다들 먼 길을 돌아 움직인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평소보다 시간이 더 걸리는 것일 테니 너무 걱정하지는 마시옵소서.”
주 상궁의 말이 사실이었다. 국경을 가로질러 향하는 대부분의 길은 한때 지름길로 누구나 애용하였지만 요즘은 보통 용기로는 꿈도 못 꿀 짓이 되어 버렸다. 용병을 따로 고용하지 않고는, 만만하게 넘어갈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미묘하게 실망을 하는 이설을 보고 주 상궁이 인자하게 위로했다. 사실 여부를 불문하고 일단 주 상궁이 그렇게 말을 하면 설득력이 높아졌다. 이설은 알게 모르게 주 상궁에 대한 신뢰도가 계속해서 높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