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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137)화 (137/300)

달의 황홀경

137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오늘도 끼니를 거르셨다가는 서고에 일러 서책을 빌리지 못하게 할 것이라며 엄포를 놓을 줄 알았던 주 상궁의 말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서책을 모아 끙차 한 번에 들어 올렸던 것을 다시 내려놓고 뒤를 돌았다.

“초간궁의 양 소원?”

“예. 본궁에 모시기에는 마마께서 원치 않으실 것 같아 별채 객실에서 기다리시는 중입니다.”

“양 소원이 여기까지 무슨 일로…….”

주 상궁도 알 길 없는 사연을 괜히 혼잣말로 물으며 느긋하게 밖으로 나섰다. 양 소원을 본궁으로 들이지 않은 건 주 상궁이 백번 잘한 일인 것 같다. 황궁에 오로지 한 곳뿐이라 할 수 있는 제 궁의 본채에 양 소원이 앉아 있는 것만큼 안 어울리는 광경은 없을 것이다.

별채 객실에 다다르니 양 소원을 따르는 궁인들이 그 앞에 서 있었다. 자신이 왔다 고하려 하기에 이설이 무시하고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기별도 없이 양 소원 마마께서 어쩐 일로 여기까지 찾아오셨습니까?”

당차게 걸어 들어오는 이설을 보고 양 소원이 내키지 않는 듯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억지로 하는 게 분명한 안부 인사를 받아 주는 둥 마는 둥 하며 착석했다.

오랜만에 보는 양 소원은 여전히 화사하고 아름다웠지만 이설을 보는 눈빛에 적대심이 가득했다. 이유가 뭐였든 좋은 말을 하러 온 게 아니라는 것쯤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안부는 그쯤 해 두셔도 됩니다.”

“…….”

“찾아온 이유부터 먼저 말씀해 주시지요.”

이설이 적당히 말을 끊어 내자 양 소원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붉게 칠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잇새로 새어 나오는 목소리는 웃음기가 담겼으면서도 분이 가득 쌓여 있었다.

“폐하의 총애가 좋긴 좋은가 봅니다. 마마께서 제게 이리 기세등등하게 되실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안부 인사가 영 성의 없다 싶더라니, 무례한 태도는 예고도 없이 불쑥 들어왔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은근한 눈치로 멸시를 주더니 이제는 눈에 보이는 예의조차도 갖추지 않는다.

이설도 갑자기 전에 없던 예의를 기대한 건 아니라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예, 그런가 봅니다.”

무신경한 태도로 대충 대답하며 찻잔을 들었다. 사기 찻잔 표면이 따뜻해질 정도로 뜨거운 차는 양 소원의 입맛에 맞지 않을 것이다. 주 상궁이 준비했나.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될 텐데, 하고 생각은 했지만 주 상궁을 야단칠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래서 용건이, ……무엇입니까?”

말 사이에 차를 마시며 입술을 적신 이설이 느긋하게 물었다. 양 소원은 이설의 여유 있는 태도에 이를 갈았지만 사실 이설은 그저 피곤하고 몸이 나른했을 뿐 다른 의도는 없었다.

이설을 매몰차게 노려보며 화를 꾹꾹 참던 양 소원은 마침내 그 노력이 결실을 이루며 길고 가느다란 한숨으로 표정을 풀었다. 예의 그 위선적인 웃음이 입가에 올라섰다.

“아닙니다. 마마께서 그리 기고만장하실 수 있는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 충분히 누려 보십시오.”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마마께서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계시는 겁니까?”

이설을 한창 비웃던 얼굴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바뀌며 한심스럽게 물었다. 이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황궁 돌아가는 사정에 이리 무지하셔서야…….”

걱정스러운 얼굴로 혀를 차고 있지만 명백한 엽신여김이었다. 더 듣고 있기가 불쾌하여 한마디 하려 ‘양 소원 마마’ 하고 불렀지만 무시당했다.

“지금 황궁 밖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는 계십니까?”

황궁 내 사정도 어두운데 황궁 밖 사정까지 알고 있을 여유가 있나. 이설이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하지 않자 양 소원이 다시 코웃음을 쳤다.

“물론 모르시겠죠. 알고 계신다면 지금 이리 태평히 앉아 계실 수가 없으실 겁니다.”

“제가 꼭 알아야 하는 일입니까?”

“알지 않으시면, 마마만큼 억울한 분이 누가 또 계실까요.”

“……전 도무지 마마의 담론 방식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용건이 없다면 이만 물러가 주세요.”

양 소원이 말하는 사정이 무엇인지 궁금한 것은 맞지만 알려 달라 애걸복걸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이설도 금에 믿고 부릴 사람이 서넛쯤은 있다. 그네들에게 묻는 게 더 빠를 듯하여 이만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는데, 양 소원이 탁자에 올려져 있던 이설의 손목을 갑자기 덥석 붙잡았다.

깜짝 놀란 이설이 팔을 당겨 빼 보려고 했지만 쉽게 벗어 던질 악력이 아니었다.

“양 소원!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이 손 놓으십시오.”

“마마께서는 분명 없으시죠?”

“뭐, 뭐가 말입니까?”

치켜뜬 눈이 가끔은 표독스럽긴 해도 늘 예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나운 광기에 번뜩이는 눈에 그런 감상은 들지 않는다.

“폐하의 이름 말입니다.”

“…….”

“아니, 것보다 폐하의 이름을 마마께서 감히 알고 계시기는 합니까?”

감정이 고조된 성난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양 소원은 여전히 이설의 손목을 쥐어 잡은 상태로, 두 사람이 서로를 가만히 마주 보고만 있는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다.

양 소원의 고함 소리를 들었는지 밖에서 이설에게 괜찮냐 묻기에 잠시 뜸을 들였다가 별일 없으니 아무도 안으로 들어오지 말라 대답했다. 그 대답 직후 손목을 더 강하게 죄어 오던 힘이 스르르 풀렸다.

“양 소원.”

이설의 손목을 놓아준 뒤 양 소원은 언제 그랬냐는 듯 가면을 쓴 것처럼 평온한 얼굴로 찻잔을 들었다가 입술만 적시고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느리게 감았다 뜬 눈이 이설을 직시했다.

“손목에 폐하의 이름을 가진 여인이 지금 황궁으로 오고 있습니다.”

“…….”

“공교롭게도 그 여인의 이름이 연이설이라 하옵니다.”

찻잔을 들려던 두 손에 힘이 풀려 잔을 놓쳤다. 탁자 위로 쿵 떨어지는 잔이 흔들리며 찻물이 밖으로 흘러넘쳐 손을 적셨다. 소매까지 찻물이 적셔 올라갈 때까지도 이설은 꼼짝도 못 했다. 청천벽력처럼 귓전에 떨어진 양 소원의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자신과 같은 이름을 가졌으며 손목에 우찬의 이름을 새긴 여인이라면…….

이설은 뇌리를 관통하는 끔찍한 단어를 입안에서 절망적으로 곱씹었다.

황제 금우찬의 진짜 정인이 나타났다.

“왜 아무 말이 없으십니까?”

“……그게, 정말……, 정말 사실입니까?”

“사실입니다. 지금 제 오라버니께서 호위대장을 맡아 그 여인을 황궁으로 데려오고 있는 중이라 합니다.”

울렁거리는 배 속에서 방금 먹은 차가 도로 올라올 것 같은 구역질이 느껴졌다.

문득 어젯밤 급히 우찬의 침소로 달려온 차란이 생각났다. 어지간한 보고는 제가 있어도 아무렇지 않게 하던 차란이 굳이 자신을 내보내야 했던 이유가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 얘기를 전하기 위함이었나.

그렇다면 우찬은 어젯밤 이전까지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던 걸까? 어쩌면 모두 알고서도 평소처럼 자신을 대해 주었던 것일까? 우찬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던 거지?

……도대체 자신을 향한 우찬의 계획은, 그리고 그 마음은 뭐지?

“그리 충격이십니까?”

“…….”

“허나 알고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마마께서는 폐하의 진짜 정인이 아니라는 것을.”

양 소원의 말대로다. 목욕을 할 때마다,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괜한 기대를 품고 확인하는 손목은 언제나 깨끗했다. 우찬이 일방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가졌다고 해서 서로가 서로의 반려이며 정인이라고 확신하기는 어려웠다. 한쪽만 이름을 가지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지만 흔치도 않았다.

이름을 우찬에게 주었던 것처럼 이설은 우찬에게 마음도 몸도 모두 주었다. 하지만 우찬은 이름도, 마음도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저 약간의 호감과 관심이 한계였다. 이름을 나눈 사이는 성별과 나이, 신분을 막론하고 절대적인 신뢰와 애정이 생긴다고들 한다. 그런 점에서 이설은 우찬의 정인이 될 수 없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아쉽긴 했지만 명목상으로는 이설이 우찬의 정인이었다. 우찬이 만천하에 스스로 공표하기를, 하늘이 점지해 준 운명은 이설이었다.

그래서 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이제 와 이런 일이 생긴 걸까.

“폐하를 연모하십니까, 마마?”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묻는 말에 일일이 대답해 줄 필요는 없었다. 엉망진창이 된 머릿속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그럼 저와 뜻을 같이하세요.”

“무슨 뜻을 말입니까?”

“그 여인은 절대 입궁해서는 안 됩니다.”

“이미 호위대와 함께 황궁으로 오고 있는 이를 무슨 수로 막는단 말입니까.”

“그 호위대의 책임자가 제 오라버니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양 소원의 의중을 한 번에 알아채지 못한 이설이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는 곧바로 천천히 좁혀 들어가는 미간이 양 소원의 끔찍한 속내에 반응했다.

“설마 그 여인을 죽이기라도 하겠단 말입니까?”

“그럴 리가요.”

“…….”

“정인을 죽였다가는 폐하께서도 무사하지 못하신다는 거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름을 나눈 두 사람은 생사를 함께하는 운명을 진다. 양 소원의 말대로 그 여인이 화를 당한다면 우찬 역시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목숨만은 끊지 않을 생각입니다.”

“…….”

“사람을 숨기기에 적당한 몇 곳을 알고 있습니다. 설령 폐하라 할지라도 절대 찾을 수 없을 겁니다.”

“……이 얘기를 어째서 제게 모두 하는 겁니까?”

우찬의 정인이 나타났다는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양 소원의 속내를 파악해야 했다. 어떻게든 저를 황제의 눈 밖으로 밀어내려 애쓰던 여인이 갑자기 찾아와 뜻을 같이하자 말하고 있다. 이설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이 사실을 폐하께 알리면 양 소원께서 무사하지 못할 텐데요.”

이설의 말에 양 소원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도리어 코웃음을 쳤다.

“마마께서는 절대 폐하께 말씀드리지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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