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136화
“……갑갑하지 않으세요?”
“예?”
내내 복도를 걸으며 한마디 말 없던 이설이 불쑥 묻자 흑영이 깜짝 놀랐다. 계속 흘끔거리며 쳐다보기에 안에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궁금해하는 줄 알았는데 낭패다. 흑영은 말주변이 없는 편이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눈빛을 보내는 흑영의 얼굴에 이설이 손가락을 가리켰다. 그제야 눈 아래까지 덮은 제 복면 얘기라는 것을 알았다.
“익숙해져서 별로 그렇지도 않습니다.”
“날도 더운데 고생이 많으십니다.”
생전 처음 들어 보는 격려의 말에 뭐라 대꾸를 해 줘야 할지 모르겠다. 이설보다 한 걸음 물러나서 걷고 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복면으로도 난처해진 얼굴을 가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밤나무 위에 자꾸 올라가시는 건 곤란합니다.”
“예?”
“제 궁 후원에 있는 커다란 나무 말입니다. 저를 감시하는 은신처로 삼으시기에 적당하다는 건 알지만, 밤나무 가지는 그리 튼튼하지가 않습니다.”
“…….”
“제 궁에 오시는 다른 분들께도 꼭 전해 주십시오.”
그러고는 이설이 고개를 뒤를 돌려 생긋 웃었다. 흑영은 대꾸도 못 하고 복면 안에 감춘 입을 떼었다 붙였다 하릴없는 짓만 반복했다.
무예를 배워 본 적도 없을뿐더러 여느 사람들보다도 무디고 어수룩해 보이는 이설이라 방심했다. 다른 이들의 안이함을 탓할 수도 없었다. 흑영 역시도 비운궁에 잠신을 할 때면 평소보다 긴장이 훨씬 더 느슨해진 게 사실이었다.
설마하니 매복을 들키다니. 황제에게 들켰다가는 호위군 전원의 모가지가 간당간당할 수도 있다.
“그럼 저도 폐하께는 알리지 않겠습니다.”
이설이 농담 어린 말투로 어깨를 한번 으쓱 해 보였다. 여태껏 보아 온 심성이 황제에게 이 일을 고하지는 않을 테지만 흑영은 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황제를 곁에서 보필하며 지내온 모든 세월을 통틀어 황제가 아닌 이에게 이토록 당황했던 건 처음이었다.
다리가 불편한 이설은 본궁 앞에서 기다리던 가마를 탔다. 비운궁에서 함께 온 궁녀는 가마를 사방에서 둘러싸고 함께 걷는 금군에게 주눅이 들어 어깨가 오므라든 채로 걸었다.
“궁까지는 금군과 함께 갈 테니 흑영 님께서는 이만 폐하께 돌아가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궁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밤바람이 차니 발을 내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가마의 발을 올리고 이설이 말을 걸었다. 배려를 거절만 했어도 됐을 텐데 괜한 친절을 베푼 것은 스스로 생각해도 의외였다.
이설은 흑영의 말대로 가마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고 발을 내렸다. ‘예’ 하고 대답하는 말씨가 너무 정중하여 흑영은 되려 불편할 정도였다. 자신은 직위도, 가문도 없는 천것이니 부디 말을 편히 해 달라는 청을 해 보기는 했으나 상냥하게 거절당했다.
황제는 이설을 좋아한다. 정인을 사모하는 애틋한 마음일지, 함께 고초를 겪은 이에 대한 전우애일지는 알 바가 아니다. 황제가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호위군들 사이에서 늘 화두에 올랐다. 다들 이설이 언제쯤 황후가 될지를 각자 나름의 이유로 재보는 중이었다.
흑영은 황궁 내에서 벌어지는 암투며 정치며 하는 이깟 것들에는 문외한이지만 이왕지사 누군가 금의 황후가 되어야 한다면 이설이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온화하고 선한 성품보다 높게 쳐줄 가치는 없다.
“그런데 흑영 님.”
흑영 님이라는 깍듯한 존칭이 아직도 어색하기만 한 흑영이 괜히 뒷덜미를 긁으며 아래를 봤다. 이설이 다시 발을 올리고 머리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사냥대회가 있었던 날 폐하를 습격했던 자들의 행방은 찾으셨습니까?”
“아직 추적 중에 있습니다.”
“이제 와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폐하께서 중독되셨던 독초 말입니다.”
“예.”
“지금 생각해 보니 상처를 처치할 때 환부에서 시큼한 냄새가 났었습니다.”
작게 난 창 아래에 이설이 턱을 얹고 미간을 좁혔다.
“제가 모든 독초의 성질에 해박한 것은 아니나 시큼한 냄새가 나는 독초로 잘 알려진 것은 한 종류뿐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저도 이름은 알지 못합니다만 재배 조건이 까다로워 일부 지역에서만 소량으로 키운다 들었습니다. 근데 그 일부 지역이…….”
이설이 맥 빠진 표정으로 점점 목소리를 줄였다. 목을 밖으로 더 빼 금군과 궁녀들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확인하는 사이 흑영이 허리를 바짝 숙여 이설 가까이 얼굴을 댔다.
“도국 양화성에서 북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 맞습니까?”
복면에 한 번 걸러진 낮은 목소리가 조용히 물었다. 가까이서 마주한 얼굴에 서로 놀란 기색은 없었다. 이설의 표정에서 긍정의 답을 확신한 흑영은 다시 허리를 세우고 주위를 둘러봤다. 금군은 그 둘에게 일절 관심도 없었고, 궁녀들만 고개를 기웃기웃 궁금한 기색을 냈지만 말소리를 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서책이나 지도로만 본 곳이라 양화성과 얼마나 떨어진 곳인지는 잘 모릅니다. 그저 그 주변이라는 것밖에는.”
“양화성에 거주 중인 이민족들이 의심스러울 만큼 무척 가깝습니다.”
“…….”
“혹시 양화성의 이민족들과 어떤 인연이라도 있으십니까?”
이설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역사는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설의 고향인 연국의 시초나 위치를 짐작해 봤을 때 어쩌면 이민족들과 어떤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뜩이나 황제의 후궁 중 하나인 허 미인의 일족이 그 일대에 모여 살고 있어 골치 꽤나 아픈 참이었다.
“아뇨……, 아닙니다.”
아니라 부정하는 이설은 여전히 어딘가 걱정스러운 얼굴이었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
흑영 혼자 담벼락과 지붕 위를 날아가듯 뛰었더라면 금방이었을 거리지만 이설이 가마를 타고 움직인 탓에 시간이 꽤 걸렸다.
이설이 안으로 무사히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한 후에 금군에는 비운궁 근처를 한 시진 정도 더 숙위하라 명한 뒤 혼자 태금궁으로 돌아갔다. 역시 혼자 돌아가는 길은 눈 깜짝할 새였다.
평소처럼 황제의 침소와 가까운 담의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본 뒤 담을 넘어 안으로 들어왔다. 금원은 늘 그렇듯 시간이 정지한 듯 고요했다. 가끔 이설이 키우는 토끼가 뛰어다닐 때도 있었는데, 귀가 예민한 호위군들에게는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요즘은 잘 보이지 않아 좋다.
콰―앙!
금원을 지나 침소 밖을 한 번 더 둘러보던 중 안쪽에서 파열음이 들렸다. 앞뒤 잴 것도 없이 본능적으로 가장 가까운 창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간 흑영은 칼을 꺼내 뽑아 든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같은 소리를 듣고 모여든 게 분명한 다른 호위군들도 아마 같은 심정일 것이다.
“……별일 없으니 이만 모두 물러가라.”
침전 한가운데에 황제가 별반 흐트러진 것도 아닌 모습으로 고고히 서 있었다. 그에 반해 발치에는 부서진 두꺼운 연옥 조각들로 엉망이었다. 벽 한쪽이 허전해진 것으로 보아 사람 크기만 했던 커다란 봉황 조각상의 잔해인 게 분명했다.
얼마 안 있어 궁인들이 헐레벌떡 달려와 장지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부서진 연옥 조각들 사이에 홀로 서 있는 황제와 그 주변을 에워싸고 칼을 꺼내 든 호위군들을 보는 표정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모두 물러가라.”
황제가 다시 말했다. 모두 황제를 가까이서 오래 모신 자들이었다. 대관절 뭐가 어찌 된 영문인지 궁금한 게 많은 얼굴이었지만 모두 눈치 좋게 재빨리 자리에서 물러났다. 흑영도 이내 칼을 거둔 뒤 침소를 나왔다.
오랫동안 무예를 단련하며 얻은 것이라고는 손에 배긴 굳은살과 온몸의 상처. 그리고 스며드는 불길한 징조를 누구보다 빨리 느끼는 것이었다.
불길한 밤의 시작이었다.
*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오랜만에 꾸었던 꿈은 오늘따라 더 찜찜했고 그 탓에 밤잠을 설쳤다.
그리고 늦은 아침 태금궁으로부터 전갈이 왔다. 폐하께서 차도가 많이 좋아지셨으니 오늘부터는 태금궁에 오지 않아도 된다는 서신이었다. 자신 때문에 우찬이 차도를 보인 것도 아닌데 왜 이런 서신을 보냈는지 알 길이 없었다. 혹 우찬의 차도를 보이는 데 제가 방해가 된 것인가 생각해 보기는 했다. 역시 고집을 부려 탕약을 드시게 하지는 말 걸 그랬나.
애초에 그런 목적을 가지고 찾아갔던 것이 아니었는데 떡하니 전갈을 받고 나니 이제 먼저 찾아가기가 어려워졌다.
내심 기분도 좋지 않고 밤사이 잠을 설쳐 피곤하던 차에 태자가 또 찾아왔다. 마음 같아서는 다음에 뵙겠다 말하고 싶었지만 감히 자신 따위가 태자를 내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에둘러 일찍 돌려보내려고 했는데, 오늘은 북쪽 이민족과 연국에 대해 배우던 참에 이설에게 얘기를 들으러 왔다 하니 그럴 구실을 만들지도 못했다.
함께 온 노승은 태자가 어디 멀리 내쫓고 둘이 마주 앉아 연국의 역사서를 읽어 주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버틸 만하더니 시간이 좀 지나니 자꾸 눈이 감겨 태자 보기가 부끄러웠다. 괜히 묻지도 않은 잠을 설친 이유를 말하며 하품을 참았다.
“매일 똑같은 꿈을 꾸신다구요?”
“매일은 아니고 가끔, 아주 가끔 꾸는 꿈입니다.”
“소자는 꿈을 별로 꾸지 않아서……. 무슨 꿈을 꾸셨습니까?”
연국의 역사 얘기를 들을 때보다 눈이 더 반짝이는 태자에게 어제 꾼 꿈 얘기를 들려 주었다. 처음 꿨을 때와 달라진 게 없는 장면이었다. 깃털 하나하나가 불꽃처럼 타오르는 봉황이 자꾸만 제 깃털 하나를 주려고 한다는 얘기를, 태자는 무척 흥미롭게 경청했다.
“그래서 그 깃털은 받으셨습니까?”
“아뇨, 받지 않았습니다.”
“왜요?”
“잘은 모르겠습니다. 근데 불에 타고 있는 봉황이 뭔가 무섭기도 하고, 받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요.”
어쩐지 태자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기분이 들었다. 태자는 태자대로 짐짓 심각한 표정을 하고 뭔가 골똘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봉황은 금국에서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영물입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봉황이 주는 게 뭐든 일단 받아 두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어린아이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지극히 단순한 생각이었지만 듣고 보면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어차피 불꽃이 타오르는 봉황이라니, 꿈 자체가 허무맹랑하기 그지없었다. 괜한 겁을 먹을 필요 없겠지.
“그런데 참 신기합니다.”
유자청을 넣어 차게 우린 냉차를 쭉 들이켠 태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금의 왕조를 처음 세운 성천자 봉황께서도 처음 땅으로 내려오셨을 때 깃털에서 불꽃이 타오르는 모습이셨다고 어제 스승님이 말씀해 주셨거든요.”
“아, 그렇습니까?”
“어쩌면 성천자께서 마마가 마음에 들어 좋은 것을 주시려나 봅니다.”
샐쭉 웃는 얼굴로 듣기 좋은 말만 골라 하던 태자는 문밖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노승에게 선심이라도 써 주는 척 일찍이 학운관으로 돌아갔다.
태자에게 참고용으로 보여 주려 꺼내 놓은 서책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주 상궁이 들어왔다. 아직 배가 고프지 않은데……. 피곤한 와중에 마땅한 변명거리를 생각하느라 애를 썼다.
“마마, 초간궁의 양 소원 마마께서 찾아오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