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135화
처음 물었을 때는 곧잘 대답하던 이설이 두 번째 질문에는 입을 꾹 다물었다. 거짓말을 하는 대신 침묵을 택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하찮은 영민함이었지만 이번에는 좀 성가셨다.
오늘 아침 침상에서 내려오다 불현듯 그날 밤의 일이 떠올랐다. 그날 이설을 거칠게 밀쳐 침상으로 내던질 때 운이 나쁘게도, 이설이 발을 부딪쳤던 것 같다. 자기 몸 하나 돌보지 못하는 칠칠치 못함에 또 어디서 다치고 발을 저는지, 미련하다며 혀를 찼던 저를 아주 비정한 사내로 만들었다.
“많이 다쳤느냐?”
“……회복 중입니다.”
“미련하기는.”
무심히 눈을 흘기며 우찬이 뒤를 돌아섰다. 그리고는 늘 앉는 자리 반대편으로 걸어가 의자를 뺀 뒤 이설을 봤다. 눈짓이, 빨리 오지 않고 뭐 하느냐며 재촉하고 있었다. 이설이 쭈뼛거리며 그 옆으로 다가가자 의자 등을 손끝으로 두드렸다.
“앉지 않고 뭐 해.”
오늘이라고 이설이 먼저 자리에 앉아도 되겠느냐 물을 것 같지가 않았다. 가만두면 또 밤새도록 서 있다가 다리를 절며 궁으로 돌아갈 게 뻔했기에 우찬이 딱 한 번만 더 너그러워지기로 했다. 도대체 어디까지 이설에게 예외를 두어야 할지 아직 모르겠다.
머뭇거리던 이설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황송하다 중얼거리며 우찬이 내어 준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은 이설은 여느 날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예전보다 말 수가 늘었고, 조금 뻔뻔해졌고 우찬의 반응에 시무룩해졌다가 다시 기운을 차리는 간격이 짧아졌다.
여느 날과 다른 건 우찬이었다. 우찬은 서책을 읽거나 상소문에 관심을 두는 대신 가만히 앉아 차만 홀짝였다. 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 물어보고, 아무 말이나 걸어도 좋다는 신호나 다름없었다. 이설은 때를 놓치지 않고 우찬이 거슬리지 않는 선에서 이따금 말을 붙였다. 그럼 우찬은 뜸을 들이기는 해도 무시하지 않고 모두 대답해 주었다.
“……하시니 태자 전하께서 실망이 무척 크신 듯합니다.”
얘기의 반 이상이 태자와 차란이다. 우찬으로서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얘기였지만 크게 내색하지는 않았다.
“낙마나 하는 어린아이를 누가 늑대 사냥에 데려가 준다고.”
우찬의 코웃음에 이설이 따라 웃었다. 이설도 아마 비슷한 생각을 하였을 거다.
“기대가 크셨으니 실망도 많이 크실 겁니다.”
“금방 잊을 거다. 아이란 원래 뭐든 오래 기억하는 법이 없으니까.”
“두고두고 기억하실 것 같은데요.”
“해 보라지. 어차피 내가 살아 있는 한 나덕산으로 늑대 사냥은 나갈 수 없을 테니.”
태자만 그럭저럭 철이 들어 준다면 저따위 쓸모없는 법령이야 무시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나덕산 반대편 민가로는 늑대며 곰 같은 사나운 짐승들이 나타나 피해가 늘어난다는데, 우찬이 아니고서는 늑대를 잡을 수가 없으니 곤란하던 참이었다. 조만간 새벽 사냥이라도 나가야지 생각은 늘 하지만 그럴 기분도, 몸 상태도 아니었다.
이설의 말대로 태자는 이번 일의 실망을 두고두고 기억할 것이다. 철이 좀 없긴 해도 영특함은 남달랐다. 그래도 우찬이 태자와 늑대 사냥을 나서는 일은 추호도 없을 것이다.
“아, 그렇지 않아도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사옵니다.”
갑자기 생각났는지 이설이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우찬은 대답 대신 눈빛으로만 ‘뭐냐’라고 말하는 듯했다.
“늑대 사냥을 금하는 이유 말입니다.”
“별거 아니다. 내 생모의 유지 때문이야.”
우찬은 오랜만에 죽은 생모의 얼굴이 생각났다. 보았던 모든 여인들 중 가장 고왔던 얼굴이었으며 유일하게 제게 보답을 바라지 않는 무한한 애정을 주었던 여인이었다. 일찍이 생을 마감한 것이 우찬에게는 드물게도 아깝다 생각하게 했던.
아직 가시지 않은 호기심으로 눈을 깜빡이는 이설의 얼굴 위로 기억 속 생모의 얼굴이 겹쳐졌다. 갸름한 얼굴형을 제외하고는 닮은 구석이 조금도 없다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그러니까 그게 참 이상합니다.”
아리송하다는 얼굴로 눈동자를 굴리는 이설을 제 생모와 비교하니 오늘따라 유독 맹하게 보였다.
“듣기로는 늑대가 폐하의 이름 자를 넣은 성물……,”
“폐하. 신 승상 비차란이옵니다. 뵙기 늦은 시간인 걸 알고 있으나 급히 전해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설의 말을 끊고 멀리 차란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란이라는 걸 알자마자 생각도 않고 물러가라 명하려다가 멈칫했다. 아무리 차란이라도 이설과 함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찾아온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리고 목소리에서 전해지는 긴박함이, 평소 여유 넘치는 차란이 아니었다.
마지못해 안으로 들라는 우찬의 말에 차란이 들어왔다.
“늦은 시간에 갑자기 찾아뵈어 송구합니다. 허나 워낙 급한 사안이라 내일 아침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헐레벌떡 뛰어왔는지 이마가 땀범벅이 된 차란이 흐트러진 옷매무새도 정리하지 못하고 우찬을 알현했다. 손에 꽉 쥐어 구겨진 서신이 문제인 듯했다.
“긴말 할 것 없다. 전할 것이 무엇이냐?”
“그게……,”
헐떡이는 숨을 고르는 차란이 스윽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이설이 곧바로 ‘아’ 하고 작게 탄성을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엉거주춤한 자세를 보고 우찬이 눈살을 찌푸렸다.
“잠시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편히 얘기 나누십시오.”
자리에서 쫓겨나는 게 개의치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지, 일부러 더 해사하게 웃는 얼굴이 우찬과 차란을 한 번씩 번갈아 보며 인사했다. 우찬은 순간 고개를 돌린 차란과 눈이 마주쳤다. 난처한 얼굴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우찬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오늘은 이만 궁으로 돌아가거라. ……흑영!”
낮은 고함이 흑영을 부르는 동시에 천장에서 검은 물체가 아래로 뚝 떨어져 내려왔다. 소스라치게 놀란 이설이 뒷걸음을 치며 의자를 툭 건드렸다.
“금군과 함께 이설을 궁까지 바래다주어라.”
“존명. ……궁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이설은 방금 전까지 해사하게 웃던 얼굴을 집어치우고 몹시 당황한 기색으로 흑영을 마주했다. 혼자 가겠다 고집부리고 싶은 얼굴이 분명했다.
“혼자 가도 괜찮다는 거 알아.”
“…….”
“그래도 그리 보내면 내 마음이 편치 않겠지. 흑영, 잘……, 모셔 가거라.”
말은 흑영에게 했지만 끝까지 이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길게 끈 말의 끝에 슬쩍 웃으며 짐짓 이설의 당황한 표정을 풀어 주려 했지만 허사였다. 이설은 차란이 가져온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걱정되는지 나가기 직전까지도 세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이설이 흑영과 함께 사라지자 차란의 표정이 더없이 어두워졌다. 이설이 나간 뒤로 분위기가 식은 우찬이 심기 불편한 마음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폐하…… 저, 그게, ……그러니까 지금,”
답지 않게 뜸을 들이는 차란이 생소한 건 둘째 치고 답답함에 짜증이 찬 우찬이 언성을 높였다. 얼른 말하라는 고함 소리에 차란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 양화성 원후연 장군에게서 급히 파발이 한 통 도착하였습니다.”
“양화성에서 무슨 일로. 역모라도 일어났다더냐?”
“……이걸 어디서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그러니까, 얼마 전 병사들이 토벌을 나간 산 깊숙한 곳에서 혼자 살고 있는 어느 젊은 여인을 발견했다 합니다.”
“그런데.”
“그 여인의 이름을 물으니 연 가(家)의 배꽃 리와 눈 설 자를 쓰는, ……연이설이라 대답했다 합니다.”
절망스럽게 대답하는 차란과 달리 우찬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설을 찾기 전 ‘연이설’이라는 이름을 수소문했을 때 이미 동명이인이 여럿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황족의 이름에 쓰이는 글자는 귀족은 물론 일반 백성들에게 철저히 금지하는 금국과 달리 연국은 이름을 짓는 데에 별다른 체계가 없었다. 연 왕가의 성만 해도 같은 천자를 성으로 사용하는 이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이러한 실정에 이설과 같은 이름을 가지고서도 자신이 먼저 찾지 못한 것은 천지명관에 올려지지 않은 이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저와 엮일 운명도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제 와서 같은 이름을 가진 여인이라고 한들 신경 쓸 게 아니었다.
하지만 차란이라고 이걸 모르고 있을 리가 없다. 고작 이런 이유로 이 늦은 시간에 찾아와 전에 없이 황망한 태도로 횡설수설할 사람이 아니었다.
차란이 아직 할 말이 더 남았다는 얼굴로 우찬을 봤다. 표정만 봐도 읽히는 속마음이, 우찬은 슬슬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설마 그자에게…….”
차란은 한숨과 함께 눈을 질끈 감고 말을 계속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흐릿한 글씨에 구분이 어려워 두고 보던 참이었는데 하필 ‘금’ 자가 또렷하게,”
“결론만. 결론만 말하라.”
“…….”
“…….”
“……왼쪽, 손……목에 폐하의 이름을 가진 여인 ‘연이설’이 지금 양화성에서 금군과 함께 황궁으로 올 준비를 마쳤다 합니다.”
차란 말의 마침표처럼 우찬이 던진 찻주전자가 벽에 부딪쳐 와장창 깨졌다. 거친 반응과 관계없이 우찬은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무표정이었지만 탁자 위의 주먹 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천지명관에서 폐하의 이름이 확실하다는 확인까지 끝냈다 합니다.”
혹시나 하는 의심의 씨앗까지 뿌리 뽑은 차란조차 믿을 수 없다는 듯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우찬은 주먹 쥔 손에 힘을 빼고 몸에 긴장을 풀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자 방금 전까지 해사하게 웃는 얼굴로 조잘조잘 떠들어 대던 이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어디까지냐.”
여느 때보다 음산해진 목소리는 아무도 듣지 못하게 소리를 낮췄다.
“양화성에 주둔 중이던 원후연 장군을 비롯하여 병사들 일부와 천지명관의 관리 둘입니다.”
“더 이상 말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주의 각별히 하라 일러둬. 입을 함부로 놀리는 자가 있다면 모두 죽여라.”
“예. 그리고 그 여인은……, 어찌할까요?”
“일단 내가 먼저 만나 보겠다.”
“내일쯤 출발하면 나흘 안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하온데 폐하.”
“…….”
“……끌고 올까요, 아니면……, 모셔 올까요.”
어렵게 묻는 차란의 요지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우찬은 해야 하는 대답을 어렴풋 알고 있었지만 쉽게 입 밖으로 뱉지 못했다.
눈을 감을 때마다 이설이 얼굴이 아른거린다.
우찬이 짧은 숨을 밖으로 밀어내며 목이 메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은밀히 데려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