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134화
“이제 그만 안으로 들어가실까요?”
“안은 답답해서 싫습니다. 꽃냄새가 좋으니 그냥 여기 있으면 안 되나요?”
“안 될 리가요.”
손을 뻗자 태자의 조막만 한 손이 덥석 움켜잡았다. 보들보들한 손의 감촉이 좋았다. 태자의 짧은 보폭에 적당히 맞춰 주며 도월소 근처에 큰 돌을 묻어 만든 곳에 가서 앉았다. 태자는 도월소 안을 빼꼼히 들여다보며 안에 물고기들이 많이 늘었다며 신기해했다.
오후 늦게 태자가 찾아왔다. 시간 때를 보아하니 글공부를 하다 뛰쳐나온 게 분명했다. 소운 대신 새로 온 태자의 스승은 소운만큼 엄하지가 못해 어영부영 여기까지 쫓아와 쩔쩔맸다. 이러다 우찬에게 크게 혼나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은 되는데, 그렇다고 돌아가라 내쫓을 수도 없고 이설 역시 이래저래 난감하였다.
“글공부는 잘 되어 가십니까?”
이설의 물음에 태자는 쓴 약이라도 삼킨 듯 인상을 확 찌푸렸다.
“뭐, 그런대로 해 보는 중입니다.”
아홉 살 아이가 할 법한 대답이 아니었다. 맹랑함에 헛웃음이 나왔다가도 종일 학운관이나 궁에 틀어박혀 서책만 들여다보고 있을 태자를 생각하니 안쓰럽기도 하고, 뭐라 위로의 말을 해 줘야 할지 모르겠다.
순식간에 시무룩해진 태자가 흙에 섞인 손톱만 한 작은 자갈을 도월소로 휙 던져 넣었다.
“글공부도 중요하지만 가끔은 궁 밖에서 바람도 쐬시면서 기분 전환하는 것도 좋습니다.”
“지금처럼 말입니까?”
“예, 뭐……, 그렇습니다.”
“그럼 더 자주 놀러 오겠습니다.”
더 자주 놀러 오라고 한 얘기는 아니었는데 어쩐지 그럴 빌미를 제공해 준 것 같아 찝찝했다. 난처하게 콧잔등을 긁던 이설이 화제를 돌렸다.
“아니면 기마 연습을 다시 시작해 보시는 것 어떻습니까? 활도 다시 쏘시고요.”
태자는 낙마 사고로 인한 부상이 완전히 나은 이후에도 한동안 말을 타지 않았다. 짐짓 어른스러운 척해도 그때의 기억이 아직 악몽처럼 남아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평생 말을 타지 않을 수는 없었다. 만약 태자가 아직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일 경우, 무섭다고 피하기만 하면 커서 저 같은 어른이 된다고 말해 주려고 했다.
“기마 연습 따위 해 봤자입니다.”
“왜요?”
“황궁에서 말고는 말을 탈 곳도 없습니다. 재미도 없고…….”
“폐하와 나덕산에 사냥을 하러 간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물어 놓고 아차 싶었다. 우찬이 태자와 함께 사냥을 나간다 했던 게 벌써 몇 달 전이다. 꾸준히 일이 생기기도 했었고 결정적으로 태자가 낙마를 하며 다친 탓에 우찬이 크게 화가 났었다. 이전의 약조가 아직 유효하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아니나 다를까 태자가 입술을 삐죽였다.
“사냥은 갈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필요가 없다뇨?”
의미가 모호한 대답을 이설이 다시 물었다. 태자는 바닥에 자갈을 집어 다시 도월소에 던져 넣었다.
“어차피 나덕산에 가도 늑대는 잡지 못합니다.”
어린아이의 겁 없는 포부인 줄 알았는데 정말 늑대 사냥을 할 생각이었나? 황당함에 놀란 얼굴을 애써 웃음으로 감추며 이설이 태자를 달랬다. 어차피 가지 못할 사냥이라고 하니, 거짓 조금 보태 기운이라도 북돋아 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러니 더 열심히 연습을 하셔야지요. 전하께서는 소질이 있으시니 열심히만 하신다면 언젠가는 늑대든 범이든, 설산에 백곰까지도 모두 잡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사냥을 업으로 삼는 사내 대여섯이 몰려가도 잡기 힘든 백곰 얘기는 하지 않는 게 좋았을 것 싶다. 위로가 너무 허무맹랑했던 건지 태자는 좀처럼 기분을 풀지 못했다. 그리고는 다시 툴툴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게 아닙니다.”
“네?”
“나덕산에서는 아바마마 말고는 아무도 늑대 사냥을 해서는 안 된다 합니다.”
“…….”
“늑대는 아바마마의 이름 자가 들어간 성물이라 절대 죽이면 안 된다 하지 않겠습니까? 치사하게.”
“아이고…….”
절로 나오는 안타까운 소리가 너무 꾸며낸 듯 들리지 않기를 바랐다. 이야기의 끝이 너무 허무한데 태자는 이리 억울하고 속상해하니 달리 위로해 줄 말이 없었다. 늑대는 제쳐 두고 다른 짐승을 사냥해 보는 건 어떻겠냐는 말에도 태자는 입이 댓 발 튀어나왔다.
이렇게 보면 영락없는 어린아이인데 무슨 늑대 사냥을 하겠다고 마음만 부풀어 오른 건지 모르겠다.
“사냥이 다 뭐랍니까? 저는 이제 낚시나 배워 보렵니다.”
분이 가시지 않는 앳된 목소리로 하는 말이 또 가관이다. 이번에는 정말 웃음을 참기가 어려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웃음소리만 죽였다.
그러고도 태자는 한참을 제 신세 한탄을 했다. 성장이 더딘 탓에 먹고 있는 탕약이 흙탕물 맛이 난다며 불평, 새로 온 스승은 융통성이 없다며 불평, 밤마다 침소 밖에서 새들이 푸드덕 날아다니는 소리에 밤잠을 설친다며 불평.
진지하게 들어 주려고 노력은 해 보지만 어쩐지 전부 웃음이 나는 얘기들뿐이다.
근처에서 안절부절못하던 태자의 스승이 듣다못해 이제 다시 글공부를 하러 가셔야 한다는 말에 태자는 못 이기는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문을 나서며 내일 다시 들르겠다는 말에 늙은 스승이 아연실색하는 것을 보고 이설이 웃으며 내일은 안 된다며 완곡히 거절했다. 똑똑한 태자는 이설에게 서운한 내색을 하는 대신 뒤에 선 제 스승님을 무심히 흘겨보며 떠났다.
***
동북 지역 두 개 성에서 농민들이 농성을 벌였다. 얼마 전부터 국경선 주위에 쫓겨나 살고 있던 이민족들의 침입이 잦아져 농가에 막대한 피해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간 성주에게 피해 사실을 알려도 듣는 척도 하지 않는 작태에 분노한 농민들은 황궁에 직접 투서를 보냈다. 알아보니 두 성주 모두 이민족들과 결탁하여 공물을 받는 대신 약탈을 눈감아 주었다. 이는 금국에서 손에 꼽는 중죄였다. 우찬은 이를 명분으로 손조익을 남몰래 돕는 세력을 쳐 낼 생각이었다.
“오늘따라 혈색이 좋으십니다, 폐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우찬의 진맥을 짚으러 왔던 태의가 간만에 표정이 좋은 우찬에게 물었다. 평소 겁 많고 소심한 태의가 먼저 이런 말을 꺼냈으니, 분위기가 보통 좋은 것이 아니었다.
“별로.”
무시했어도 그만이었을 말에 대꾸까지 해 주는 우찬은 사실 기분이 꽤 좋은 편이었다. 사흘 뒤쯤 황궁으로 끌려올 성주 둘과 분해 마지않을 손조익의 얼굴을 상상하기만 해도 꽤 흐뭇했다.
“이상 있는가?”
맥을 다 짚은 태의에게 우찬이 물었다. 먼저 묻는 법이 별로 없는 우찬에게 놀란 태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모두 좋으신 것 같습니다. 혹시 어디 불편하신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없다……. 가끔 글을 읽을 때 눈이 뻑뻑한데.”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그것은 폐하께서 너무 오랜 시간 눈을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눈에 피로가 쌓인 것이니 눈을 좀 덜 사용하시는 것이,”
“그럼 눈을 감고 살라는 말이냐?”
“그, 그런 의미가 아니오라…….”
의술에 비해 말주변이 없는 태의가 쩔쩔매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윤 내관이 나섰다.
“항시 글만 보시는 시간을 조금 줄이시는 게 좋다는 의미일 겁니다. 맞습니까, 태의?”
“예, 예. 맞습니다. 글씨를 오래 보면 눈이 피로해지는 것은 당연한지라…….”
특별한 방도라 있을 거라 생각하여 물은 것은 아니었다. 바른대로 고하기만 하면 될 것을 왜 저리 겁을 먹는지 보기 성가실 정도였다.
우찬이 못마땅하게 쳐다보자 태의가 침을 꿀꺽 삼켰다.
“허면 눈에 좋은 탕약을 준비하도록,”
“탕약은 됐다.”
“…….”
“비운궁에 진찰을 나가는 게 태의 자네인가?”
걷었던 소매를 내리며 우찬이 별안간 비운궁 일을 물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종종 있곤 했던 태의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근래에는 제 아래에 있는 의녀가 뵙고 있습니다.”
“왼쪽 다리를 절던데.”
“아, 예. 며칠 전 밤 침상에 발을 부딪쳤다 하십니다. 발목이 부어올라 처치하였고, 회복 중에 있으십니다.”
태의는 회복이라는 말을 내심 강조하며 말했지만 영 믿음직스럽지가 못했다.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는 우찬을 눈치채고는 태의가 얼른 변명했다.
“오늘 당장 신이 직접 뵙고 진찰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고 내일 아침 늦게 가 보도록 해라.”
“예.”
항상 밤이 깊은 뒤 궁으로 돌아가니 늦잠을 잘 게 뻔했다. 자다 일어난 무방비한 모습을 태의에게 보이는 건 내키지 않았다.
“모두 끝났으면 이만 나가 보아라.”
우찬의 한마디에 태의와 그를 따르는 어의들이 허둥지둥 짐을 챙겨 나갔다. 윤 내관은 어의들이 모두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침소를 살펴본 후 마지막으로 자리를 떠났다. 이제 이설이 올 때까지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폐하, 루 소의 마마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으로 모실까요?”
윤 내관이 나간 뒤 곧바로 기별을 알렸다. 긍정으로 대답하니 문이 열리며 멀리서부터 이설이 걸어 들어왔다.
사뿐히 안까지 걸어와 인사하는 것을 본체만체하기는 했지만 볼만한 것은 이미 다 봤다. 여전히 비녀는 반짝이고 옷은 화려하다. 다행히 다리는 어제만큼 불편하게 걷지 않았다.
“태의가 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혹 편찮으신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없다……. 늘 하던 진찰이야.”
자리를 옮기며 힐끗 보니 근심이 얼굴에 한가득이기에 한마디 더 덧붙였다. 그래도 가실 걱정은 아니었는지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흐트러진 머리를 스스로 다시 묶으며 우찬이 이설에게 다가갔다. 이설은 우찬이 저를 지나쳐 걸으려는 줄 알고 발을 옮겨 자리를 피해 주려고 했다가 우찬이 제 앞에 서자 당황했다.
“발은 뭐 때문에 다쳤느냐.”
“예……? 아, 며칠 전 침상에 오르다 잘못하여 부딪쳤습니다.”
“며칠 전이라 하면, 한밤중에 내가 찾아갔던 날을 말하는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