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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130)화 (130/300)

달의 황홀경

130화

등 뒤로 우찬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가 다시 닫혔다. ‘아직 목욕물이 다 데워지지 않았사온데,’ 하며 당황하는 궁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찬이 완전히 나간 것을 확인하고서야 이설이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바닥이 꺼져라 긴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축 늘어뜨리니 온몸의 뼈 마디마디가 쑤시기 시작했다. 내친김에 신도 벗어서 발등을 꾹꾹 눌렀다가 다시 신었다. 몸 구석구석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보고 싶어 왔다 마음을 전해도 우찬은 본체만체다. 대충 예상은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야 할까 한참 동안 고민하던 중 윤 내관과 궁인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폐하께서 곧 돌아오실 겁니다. 혹 잠자리에 필요한 것은 없으십니까?”

“없, 없습니다.”

이설이 우찬의 침전에서 함께 자고 갈 것이라고 여겼는지 윤 내관이 조심스레 물었다. 이설은 고개를 흔들어 저으며 말했다가 어쩐지 대답이 부실한 것 같아 얼른 다시 대답했다.

“밤이 깊어지기 전에 제 궁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아……, 그러십니까?”

눈에 띄게 아쉬운 기색을 보인 윤 내관이 뒤쪽에 서 있던 궁인에게 고갯짓을 했다. 윤 내관의 눈치를 보고 궁인이 들고 있던 탕약을 우찬이 앉아 있던 탁자에 내려놓았다.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나는 탕약을 이설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폐하께서 요즘 다시 밤잠을 설치셔서 침수 전 드시는 탕약이옵니다.”

“약효는 있습니까?”

“통 없는 것 같습니다.”

피곤에 잠긴 우찬의 눈을 보았으니 별 기대가 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우찬이 제때 탕약을 챙겨 먹었을 거라는 기대도 없었다.

“한동안 별일 없으시다 갑자기 왜 또 그러시는 건지 참 걱정입니다.”

깊게 주름이 팬 얼굴에 나타난 근심이 그 누구의 것보다 진심이었다.

궁인들은 우찬이 바닥에 벗어 두고 간 복면과 의복들을 줍고 등불에 기름을 채우는 등 익숙한 손길로 침전을 정리한 뒤 후다닥 밖으로 나갔다. 윤 내관은 혼자 남아 침전을 한 번 더 둘러본 뒤 마지막으로 자리를 떠났다. 멀거니 서 있는 이설에게 차라도 한 잔 내어 드릴까 묻기에 고개를 저었더니 두말 않고 알았다며 밖으로 나갔다.

탕약 위로 퍼지는 뿌연 김이 완전히 사라질 때쯤 우찬이 돌아왔다. 젖은 검은 머리카락을 마른 천으로 직접 털어 내며 안으로 들어온 우찬은 아직 그 자리에 남아 있는 이설을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충 팔다리만 끼어 걸친 침의가 벌어졌지만 여밀 생각도 없이 우찬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탕약을 한 번 거들떠보기는 했지만 길게 말린 상소문 끝으로 쓰윽 밀어 탁자 끝으로 보내고 그 자리에는 상소문을 펼쳤다. 오늘도 우찬이 탕약을 마실 일은 없어 보였다.

“탕약은 왜 드시지 않으십니까?”

장식용 목각 인형인가 싶을 정도로 인기척 없이 서 있던 이설이 갑자기 물었다. 아무 대답 없기에 무시하려나 싶었는데 한참 뒤에야 우찬이 입을 열었다.

“먹는다고 효과가 있는 줄 아느냐.”

“그래도 안 드시는 것보다는 낫지요.”

“뭣도 모르는 너나 태의야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

코웃음 가득한 목소리가 이설과 태의를 한껏 비웃었다.

“안색이 너무 좋지 않습니다.”

보아하니 오늘 밤 황제는 저 위에 가득 쌓인 상소문을 다 읽기 전까지는 잠들지 않을 듯했다. 좀 전에 다녀간 궁인이 수면을 돕는 약초를 태워 향도 피워 놓았으니 자리에 누우면 금세 잠이 들 수 있을 것 같은데도 우찬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래, 내 안색이 좋지 않지.”

“그러니 이만 그만 침수에 드시는 게,”

“하여 오늘은 너를 품을 생각이 없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거라.”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냐 묻고 싶은 마음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간신히 참아 목구멍 아래로 삼켰다.

“저도 오늘 밤 폐하께 안기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딱 자른 이설의 대답에 그제야 우찬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모나게 삐뚤어진 눈썹 선이 미묘하게 불쾌해진 우찬의 심기를 고스란히 보여 줬다.

“그럼 이 시간에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냐.”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폐하가 보고 싶어 왔다고요.”

“지금 나와 장난이라도 치자는 것이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점점 언성이 높아지는 우찬이 당장 자리에라도 일어날 기세로 몰아붙였다. 우찬이 쏘아보는 게 아직 무섭긴 하지만 저런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고 싶은 마음은 이제 없다. 괜히 아랫입술까지 불퉁하게 튀어나오는 것을 참으며 우찬을 똑바로 마주했다.

“폐하께서 다시 밤잠을 설치신다는 얘기를 듣고 걱정이 되어 온 것입니다.”

“내 잠자리가 걱정이 되어 왔다고?”

“예. 그러니 태의가 준비한 탕약을 드셨으면 합니다.”

웃음 가신 얼굴에 내려앉은 서릿발이 도통 사라질 생각을 않았다. 탁자 위를 두드리는 손가락 소리에 맞춰 왼쪽 가슴이 쿵쿵 울린다. 우찬이 생각을 오래 하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 불안했다.

읽다 만 상소문을 갑자기 옆으로 내밀친 우찬이 탕약 사발을 집어 들었다. 입에 대고 고개를 젖히자 툭 튀어나온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이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빈 사발이었다. 우찬이 손등으로 입가를 대충 닦아 낸 뒤 바로 일어났다.

“따라오거라.”

어깨 옆을 스쳐 지나가며 속삭이는 목소리를 따라 이설이 걸음을 옮겼다. 비단신 안에서 퉁퉁 부어오른 발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욱신거렸다.

우찬은 침전을 걸으며 긴 침의를 벗어 아래로 흘려보낸 뒤 침상에 누웠다. 이설과 함께 둘이 누워도 부족함이 없던 침상 위에 우찬 혼자였다. 이설은 그 옆을 쫓아 누워야 하나 고민했지만 그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황제와 마음이 일치했다.

“내가 잠들 때까지 여기 그대로 서 있어라.”

“…….”

“앉지도, 눕지도 말고. 거기 선 그대로 있다가 내가 잠이 들고 난 뒤 가면 된다.”

“밤새 잠드시지 못한다면 저는 어찌해야 하는 겁니까?”

“그렇다면 너도 밤새 그 자리에 서 있겠구나.”

우찬이 나른하게 웃으며 베개에 머리를 눕혔다. 아직 완전히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으로 눕는 것이 신경이 쓰였지만 당장 걱정할 건 그런 게 아니었다. 퉁퉁 부어오른 발은 신 밖으로 꺼내 달라 아우성이고, 발목부터 허리까지는 점점 빳빳하게 굳어 움직이는 게 어려웠다. 어깨에는 무거운 추를 올려놓은 듯했다. 우찬이 평소처럼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다면 그때까지 버틸 자신도 없었다.

“못 하겠느냐?”

“…….”

“그럼 지금 바로 돌아가도 좋다. 그리하면 앞으로 이곳에 더 이상 걸음 하지 말라.”

그 말을 끝으로 우찬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황한 등불 아래 말없이 누워 있는 우찬은 평생을 아름다운 것에만 심취해 있던 어느 화공이 그동안 보았던 것들의 집약체로 그려 낸 것처럼 수려했다. 쉽사리 마음을 접지 못하는 건 역시 이 미목수려함 때문인 건가. 우찬이 보지 않고서야 혼자 웃을 수 있게 된 이설이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등을 돌렸다.

쉬이 잠들기에 등불이 너무 환한 밤이었다.

*

“아, 그리고 오늘 낮에 저희 사신단은 나흘 전에 도국에 잘 도착하였다 연통이 왔습니다.”

“나흘 전 도착 연통이 이제야?”

“도국에서 금국으로 향하는 산길 대부분이 지금 좀 어수선한가 봅니다.”

“도적 떼라도 들끓는다더냐?”

“그렇기도 하고, 산사태가 나 길이 아예 끊어진 곳이 있다 합니다.”

“비도 오지 않는데 갑자기 산사태라니 그게 말이 되느냐?”

“그렇지 않아도 내일 사람을 보내 알아보게 할 참입니다.”

황제가 더 윽박지르기 전 차란이 냉큼 변명했다. 황제는 뭐가 더 마음이 들지 않는 눈치이긴 했지만 별다른 말을 보태지는 않았다.

“요즘 북쪽 지역도 좀 소란스럽고 하니, 면밀히 알아볼 생각입니다.”

“그 소란스럽다던 이민족 건은 알아본다 말만 벌써 몇 달째고, 아직까지 소식 하나 없느냐?”

“……면목 없습니다.”

황제는 꼭 언성을 높이지 않더라도 누구든 할 말을 없게 만들 사람이라는 걸 간과했다. 답지 않게 조곤조곤한 어투로 저를 민망하게 만드는 새로운 재주에 대꾸할 자신이 없어 머리만 조아렸다.

“승상 말씀에 한 가지 첨언드릴 것이 있사온데, 근래에 도성 근처 산들에서 도적 떼가 자주 출몰한다 합니다.”

옆에 있었는지도 까먹고 있던 흑영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존재를 알렸다. 흑의를 벗고 평복을 입고 있는데도 버릇을 못 버리는 건지 일부러 소리를 내지 않으면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금위대장에게 전해 들었다. 일단 임시방편으로 각 구역에 배치된 병력을 늘릴 생각이다.”

“이미 금군 병력 중 반 이상이 황궁 밖으로 차출되어 있습니다. 이 이상 황궁의 병력을 줄이시는 건 위험합니다.”

“나라 안팎에 전시 상황이 온 것도 아닌데, 쓸데없는 걱정이다.”

“이건 흑영의 말이 맞습니다. 황궁 병력은 그대로 두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흑영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 게 어지간히 싫었는지 차란이 괜히 흑영을 흘겨보며 말했다. 흑영은 애초에 자리에 앉았을 때부터 차란은 없는 사람 셈 치고 있었는데, 역시나 이번에도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황제는 해가 진 뒤 찾아온 급작스러운 담화가 점점 지루하고 피곤해 보였다. 어지간하면 내일 아침으로 미루고 싶었는데 흑영까지 찾아오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을 것이다.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골치 아픈 것들만 점점 쌓이니, 기분이 좋아질 리 없었다.

버릇처럼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치솟는 짜증을 가시는 황제를 보고 차란은 슬슬 가야 할 때가 됐다는 걸 눈치챘다. 차란이 가져온 물건들을 주섬주섬 챙기는 걸 보며 흑영도 떠날 채비를 했다.

“그런데 폐하, 요즘은 또다시 잠자리가 편해지셨나 봅니다.”

잘못 들으면 시비를 거는 게 다분한 말투였다. 어지간한 차란의 시건방도 그러려니 적응이 된 흑영이지만 이번 건 아무래도 좀 심했지 싶다 생각하며 황제를 봤다.

“그런대로.”

예상과는 달리 황제는 달리 불쾌한 기색 없이 차란이 놓고 가는 서신들만 쭉 펼쳐 훑어보고 말 뿐이었다. 오늘 만난 이래 처음으로 차란과 눈이 마주친 흑영은 거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는 차란을 보고 속으로만 혀를 찼다.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쳐다도 보지 않는 우찬에게 인사를 드린 두 사람이 황제의 침전 밖으로 나왔다. 궁인들이 없는 바깥 복도까지 나와서야 흑영이 차란에게 말을 걸었다.

“뭔데.”

퍽 사내다운 저조한 목소리가 유난히 퉁명스러웠다.

“뭐가 뭐야?”

그리고 불퉁하기로는 차란도 만만치 않았다.

흑영은 황제가 아닌 모든 이들에게 저리 불친절하게 굴었고, 모두에게 친절한 차란은 흑영에게만 못되게 굴었다.

“뭘 믿고 또 그렇게 나대냐고.”

“다 그런 게 있지.”

“말해.”

한동안 황궁을 떠났다가 이제야 돌아온 흑영이 요 며칠 황궁 돌아가는 사정을 알 리가 없었다. 자신이 말을 안 한다고 내내 모를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약 올리는 맛에 차란이 싱글벙글 신이 났다. 맘 같아선 종일 말해 주지 않고 싶은데 흑영이 허리춤에 찬 칼에 손을 대는 걸 보니 그건 어려울 것 같다.

“안 그래도 저기 오시네.”

히죽거리며 웃던 차란이 고개를 까딱하며 멀리 복도 끝을 가리켰다. 등불에 반짝이는 비녀를 꽂은 누군가가 궁인의 안내를 받으며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흑영은 그 걸음걸이만 보고도 누구인지 단번에 눈치챘다.

차란은 제 앞을 막아서 있던 흑영을 옆으로 슬쩍 밀어내며 앞으로 나섰다. 흑영에게 했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나긋한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이제 오십니까, 루 소의 마마.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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