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129화
한 보 더 가까이 다가서려던 발이 벽에 쿵 부딪치는 이설을 보고 자리에서 멈췄다. 손을 뻗어 봐도 닿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서 두 사람이 마주 섰다.
“뭘, 하고, 있었는지.”
“…….”
“물었잖느냐.”
뚝뚝 끊기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담긴 짜증이 바람과 함께 밀려왔다. 서늘한 바람에 정신이 들었다.
“저, 그게……,”
여태 혼자 이런저런 할 말들을 생각해 보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만나는 것을 예상했던 건 아니었다. 갑작스레 맞닥뜨린 상황에 머리가 잠시 멍해져 말을 끄는 사이 낮은 한숨과 함께 불빛이 흐릿한 시야에 말끔한 얼굴이 쑥 드러났다.
당연히 예상하고 있던 얼굴이긴 하지만 막상 마주하고 나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드는 와중에 마음속에 가장 첫 번째로 떠오른 말부터 먼저 튀어나와 버렸다.
“……대체 어디서 들어오시는 길이십니까? 문도 한 번 열리지 않았는데.”
“담을 넘어 창으로 들어왔다.”
복면을 벗고 드러낸 얼굴 위로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이 가닥가닥 붙었다. 땀에 젖은 이마를 닦으며 우찬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명료한 대답인 데에 반해 이해하기는 여전히 어려웠다. 멀쩡한 문을 두고 왜 번거롭게 담을 넘어 들어와야 했는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을 깜빡이는 이설을 보던 우찬이 무겁게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내 침전에 몰래 들어온 것은 너인데 어찌 네가 나를 문초하느냐?”
평소 같은 장난기가 하나 없는 목소리가 도리어 이설을 문초하듯 날카롭게 물었다. 어떤 표정으로 우찬을 보고 있었는지 모르는 이설이지만, 그 말에 바로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입술만 작게 오물거렸다.
“송구합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에 우찬이 또 언짢은 기색을 보이려던 찰나, 이설이 ‘헌데’ 하고 바로 말을 이었다.
“몰래 들어온 것은 아닙니다.”
“…….”
“미리 기별도 드렸고, 신첩이 여기 있다는 사실도 모두 알고 있습니다.”
“나만 빼고 모두 알고 있었으니 몰래 들어온 것은 아니라 말하고 싶은 거냐.”
빈정거리는 말투에 말문이 막혔다. 당연히 태금궁 궁인이 우찬에게 따로 기별을 넣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다못해 우찬이 평범하게 대문으로만 들어왔어도 충분히 알았을 일이다. 설마하니 이런 오해를 받을 거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곤란한 얼굴로 볼을 만지작거리는 이설을 두고 우찬은 주저 없이 뒤로 돌아섰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멀어지며 손에 든 검은 복면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리고는 허리춤에 찬 칼을 빼 한쪽에 던졌는데, 그게 장식용 문갑에 부딪혔다 떨어지며 요란스러운 소음을 냈다.
이설은 그 칼에 맞은 게 문갑이 아니라 꼭 저였던 것처럼 화들짝 놀라 순간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우찬의 눈치를 봤다. 우찬은 이제 마치 이설이 이 안에 없는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침전을 천천히 거닐며 소매를 꽉 동여맸던 끈을 느슨하게 풀고, 겉에 입었던 흑의를 벗어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다. 그 뒤 마른 천으로 땀에 젖은 이마를 한 번 훔치고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풀었다가 새로 묶었다.
우찬은 보기와 다르게 머리를 묶는 손재주가 좋은 편이었는데, 어렸을 때 남이 제 머리카락 만지는 것을 싫어하여 스스로 정돈하는 버릇이 남아 있어서라고 했다. 그리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제 버릇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태자의 머리를 만져 주기도 했다고. 그래서 이설은 가끔씩 우찬이 제 머리를 만져 주는 게 여느 궁인들이 해 주는 것보다 더 맘에 들었다.
괜히 예전 생각에 울적해진 이설이 흘러내린 머리카락 끝을 초조하게 만졌다. 다른 때보다 머리 치장에만 시간이 배로 걸렸는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우찬은 이설 쪽은 거들떠도 안 보고 어슬렁어슬렁 침전을 거닐었다.
우찬이 등불 몇 개에 불을 더 옮겨 붙이자 안이 더 환해졌다. 달빛에 어렴풋하게만 보이던 것들이 더 선명해졌다. 우찬 역시 그러했다.
“폐하.”
한참을 혼자 움직이던 우찬이 자리를 잡고 앉아 쌓여 있던 상소문들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제야 이설은 아무리 여기서 오래 기다려 봐야 우찬이 먼저 저를 불러 줄 생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한 번 불렀다고 바로 대답해 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설은 다시 우찬을 부르는 대신 드디어 서 있던 자리를 옮겼다. 발소리를 죽인다고 해서 기척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는데도 우찬은 이설이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단 한 번 눈길도 주지 않았다.
“폐하.”
두 사람 사이에 간격이 좁아지고 나서 부르는 소리에야 우찬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건조한 눈에는 감정이 없고 축적된 피로만 가득했다.
“왜.”
나른하게 울리는 목소리 역시 듣기 좋다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피곤에 푹 잠겼다. 그래도 이설은 우찬이 제게 대답을 해 줬다는 사실에 한결 마음이 놓였다.
“왜 묻지 않으십니까?”
“무엇을 말이냐.”
검은 글씨로 빽빽하게 채워진 상소문을 우찬이 아래로 던지듯 내려놓았다. 시선이 아래를 향하며 짧게 쉬는 한숨이 귀찮은 일에 대한 짜증인 건지 혹 몸이라도 좋지 않은 것인지 염려됐다.
“신첩이 왜 여기,”
“신첩이라는 소리 좀 집어치워라.”
“…….”
“네가 언제부터 스스로를 내 첩이라 여겼다고.”
우찬이 언성을 높이고 노려보지 않기만 해도 마음이 훨씬 편할 것 같다고 생각했던 불과 일다경의 전의 생각은 틀린 것이었다. 상처받는 건 우찬의 태도 때문만이 아니다. 내뱉는 말과 행동, 하물며 우찬 주위에 흐르는 공기의 흐름까지 이설의 목을 옥죄였다.
비소라도 보였다면 좀 더 마음이 나았을지 모른다. 저를 당황시키려고, 곤란하게 만들려고 일부러 더 비꼬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람과 달리 우찬에게는 익숙한 비소도, 비정한 눈빛도 없었다. 아무도 듣지 않는 혼잣말을 하듯 퍼석하게 메마른 목소리만 이설의 가슴께를 푹 쑤셨다.
“……제가 왜 여기까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마음을 달래는 게 점점 쉬워지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찾아왔는지 묻지 않으셨습니다.”
내내 고민했던 반나절의 시간이 무색하게도 우찬은 이설이 이 늦은 시간에 갑자기 찾아온 연유조차 묻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빈 침소에 본인도 모르는 사이 들어와 있던 것에 불쾌한 기색은 드러냈어도 그 이유는 별로 궁금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우찬이 아무것도 묻지 않아 서운했다. 대답도 못 할 것들을 종일 물어 난처했던 날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내가 묻기를 바라는 것이냐, 아니면 네가 말하기를 원하는 것이냐.”
“둘 다입니다.”
이설이 냉큼 대답하며 두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긴 시간 쪼그려 앉아 있고, 서 있던 다리가 뻐근하게 저리기 시작했지만 우찬은 턱짓으로라도 이설에게 자리에 앉으라는 허락은 주지 않았다.
“헌데 난 별로 관심이 없어.”
“…….”
“네가 여기에 왜 왔는지.”
심드렁한 어투에 박힌 무관심을 드러내듯 우찬은 방금 전 내려놓았던 상소문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엄지손가락 끝으로 눈썹 뼈를 꾹꾹 누르며 흘려보내듯 혼잣말을 했다.
“어차피 또 뭘 청하러 왔거나 변명하러 온 걸 테지.”
“아닙니다.”
억울한 마음에 섣불리 튀어나온 대답이 경솔하긴 했지만 후회가 되지는 않는다. 대답에 뜸을 들이면 우찬은 언제나 저 좋을 대로 단정 짓는 경향이 있었다. 그로 인해 생기는 오해의 대가는 항상 이설이 혼자 감당해야 했다.
“폐하께서 저를 보러 오시지 않아 제가 직접 왔습니다.”
“너를 볼 용무가 없으니 찾아가지 않은 것인데.”
이전에는 별다른 용무가 없어도 매일같이 비운궁 대문 문턱을 넘었던 우찬이다. 굳이 따지자면 이설이 끼니를 제때 챙겨 먹었는지, 천자 공부는 잘하고 있는지, 활쏘기 연습은 언제쯤 시작할 것인지 등을 늘 묻기는 했지만 용무라 말하기에는 지극히 사소한 것들에 불과했다.
여전히 상소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우찬의 태도도, 대답도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하기는 글렀다. 하지만 이설은 자신이 여기 온 목적에 집중하기로 했다. 상처받았다고 아무 말도 못 하고 서럽게 울기만 하는 건 비운궁으로 돌아가서도 혼자 충분히 할 수 있다.
“저는 폐하께 용무가 있습니다.”
“관심이 없다 하였잖아.”
“…….”
“네 부탁도, 변명도, 거짓말도 다 지겨워.”
“폐하가 보고 싶어 왔습니다.”
바르르 떨리는 눈동자와 달리 차분하고 또렷한 목소리에 거짓은 없었다. 이번만큼은 우찬이 전하는 말 그대로를 믿어주길 진심으로 바랐다.
이설이 어떤 심정으로 그 앞에 서 있든 그다지 큰 관심은 생기지 않는 듯 우찬은 눈길 한번 돌리지 않았다. 피곤이 가득한 얼굴은 한참 동안 읽던 상소문에만 고정되었고, 이설은 속이 타들어 가는 심정으로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
조금 전에 얼핏 봤을 때도 글의 길이가 엄청나더라니, 우찬은 그걸 다 읽을 때까지는 꼼짝도 안 할 모양이었다. 물론 다 읽고 난 뒤에라도 제게 말을 걸어 줄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오늘 밤새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닌지 슬슬 걱정이 들 무렵 탁, 소리와 함께 그리 얄밉던 상소문이 탁자 위로 내동댕이쳐졌다.
“내가 보고 싶어서 왔다고?”
“예.”
“그간 몸이 어지간히 허전하였나 보구나. 제 발로 여기까지 다 찾아오고.”
드디어 얼굴에 비친 미소였지만 기다렸던 것만큼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명백한 비웃음에 할 말을 잃었다.
폐하는 내가 아직 미우셔서 나를 상처 주기 위해 저런 말을 하는 거야. 진심이 아니야. 귀담아들을 필요 없어.
속으로 되뇌는 말로 스스로를 겨우 달래고 진정시키는 사이 멀리 문 너머에서 우찬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 하고 부르는 목소리를 들어 보니, 우찬이 이 안에 있는지 없는지 잘 확신이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냐.”
“송구합니다. 돌아오신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지금 바로 탕에 물을 데워 놓겠습니다. 헌데 폐하 안에 루 소의 마마께서,”
“함께 있다.”
“예.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문에 비쳤던 흐릿한 그림자가 사라졌다. 그리고 찾아온 불편한 정적을 깬 것은 우찬이었다. 의자가 뒤로 밀리는 소리가 신경에 거슬릴 정도로 크게 났다.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우찬과 눈이 마주쳤다. 우찬은 별 반응도 보이지 않고 이설을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