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127화
“차가 입맛에 맞지 않으십니까?”
“예?”
찻잔을 감싸 쥐고 도통 입에 댈 생각을 않는 차란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설이 물었다.
“통 입에 대시지를 않으시길래요.”
“아닙니다. 제가 뜨거운 차가 익숙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궁녀들에게 미리 일러둔다는 것을 깜빡하였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냉차로 다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뜨거워도 곧 식겠지요.”
“아……, 네. 그렇겠지요.”
원체 밝은 얼굴이 아니었다지만 급격히 우울해지는 이설의 표정을 보고 차란이 이유도 모르고 그냥 아차 싶었다. 이설이 지금 속으로 무슨 생각이 들었든 하여간 제 방정맞은 혀가 입을 잘못 놀린 것 같다.
차란이 서둘러 말을 돌렸다.
“일전에 제게 부탁하셨던 합각(蛤殼:조개의 껍데기)말입니다. 며칠 전 마마께 보내 드렸던 것이 저희 상단에 그대로 되돌아왔습니다.”
“합각 말입니까?”
“예. 제가 너무 늦게 구해다 드려 이제 쓸모가 없어지셨나 싶어서요.”
이설이 부탁한 뒤로 한 달이 훌쩍 넘었으니 필요가 없어졌을 만도 했다. 하지만 합각은 바닷가 근처에서만 구할 수 있고, 모아 놓으면 대부분 깨지고 부서진 게 태반이라 질 좋은 것들을 구하는 데에 시간이 꽤 걸렸다. 수요도 거의 없는 편이라 급히 알아본다고 알아본 게 이 정도였다.
그렇게 기껏 구해다 준 물건이 며칠 뒤 상단으로 그대로 돌아왔다. 이설이 제 성의를 무시해서 돌려보낸 것이라고 오해는 하지 않지만 이유는 알고 싶었다.
혼자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가 싶던 이설이 바로 아, 하고 낮은 탄성을 터뜨렸다.
“태금궁과 소봉궁에서 보낸 것들을 제외하고는 궁으로 들어오는 진상품들은 모두 되돌려 보내고 있는데 아마 그때 같이 보내진 것 같습니다.”
“그럼 늦어도 내일쯤 다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저 때문에 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번거롭기는요.”
가만히 앉아 있기도 어색한 분위기라 차란이 어쩔 수 없이 찻잔을 들어 입에 가져다 댔다. 먹기 어려울 정도로 뜨거운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익숙지가 않아 잔을 입에 가져다 댄 채로 호호 불었다. 꼴사나운 모습이 창피해 슬쩍 이설을 살펴보니 제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멍하게 풀린 눈이 허공 어딘가를 향해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이쪽도 상황이 썩 좋지 않군.
입술만 살짝 적신 차를 다시 내려놓고 이설을 불렀다. ‘루 소의 마마’ 하고 부르는 소리에 고개가 힘없이 돌아왔다.
“어제 아침 창화군께서 무사히 도국으로 떠나셨습니다.”
“아…….”
무슨 말을 해도 큰 반응이 없던 이설이 이제야 차란의 말에 조금 관심을 보였다. 이러니 폐하께서 지금 단단히 화가 나신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 상상으로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마께 폐만 끼치고 가신다 걱정이 많으셨습니다. 그간 입은 은혜는 잊지 않겠다 전해 달라 하셨고요.”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셨습니까?”
눈썹 사이에 미간이 좁아진 이설이 물었다.
“예, 전혀요.”
‘전혀’라는 말을 유독 강조하며 차란이 싱긋 웃었다. 다리를 절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말에 올라타긴 했지만 도국에 도착할 때쯤에는 나을 테니 굳이 얘기할 필요는 없었다. 황명으로 금군에게 끌려가 다리만 저는 채로 나왔으니 운도 그런 대운이 없었다.
어제 아침 창화군을 포함한 약 스무 명이 도국으로 떠났다. 그중에는 소운도 함께였다. 태자를 옆에 꼭 낀 소운은 떠나기 직전까지도 태자를 달래 떼어 내느라 애를 먹었다. 황제라도 있었다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황제는 그날 그림자도 비추지 않았다. 기분이 안 좋아도, 드문 일이긴 하지만 몸이 안 좋아도, 미리 계획된 정무를 이유 없이 넘기는 일이 없는 편이었는데 요즘은 뭐든 기분 내키시는 대로 한다. 그래서 차란만 골치가 아픈 중이었다.
“전 태감 단소운께서도 이번 사절단과 함께 먼저 떠나셨습니다.”
“얼핏 얘기는 들었는데, 정말 가시는지는 몰랐네요.”
“따로 인사드리지 못해 송구하다 전해 달라 하였습니다. 무척 아쉬워하던데요.”
차란이 눈 하나 깜짝 않고 거짓말했다. 소운이 그런 말을 전하기는커녕 말 한번 나눠 본 적도 없었다.
“영영 떠나신 것도 아니니 괜찮습니다. 태감께서 돌아오셔도 전 여기 그대로 있을 텐데요.”
“빠르면 이 년 내로도 돌아올 수 있다 하니 거창한 작별 인사는 좀 그렇긴 하지요.”
원래 사람이 좀 차분하고 잔잔한 느낌이 있긴 했지만 이 정도로 무미건조한 적은 없었다. 무슨 말을 해도 반응이 미적지근하다. 호기심에 무작정 들어오긴 했지만 그래도 이설과 얘기하다 보면 대충 황제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뭐였던 하여간 둘 사이에 작은 다툼 정도가 아니라는 것만 알 것 같다.
차란은 이설이 꽤 마음에 들었다. 일단 기본적으로 사람이 선하다. 손익을 따지고 드는 영악함도 없었다. 장사치의 아들로 자란 차란에게는 아주 중요한 사람의 덕목이었다.
그래서 내심 이설이 황후가 되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그렇게 만들려고 데려왔는데 사람까지 좋으니 차란 입장에서는 내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 사람 좋은 이설이 무슨 재주로 황제까지 구워삶았는지는 모르겠다. 제 눈에야 선량하고 덕이 있는 데다 출신까지 훌륭한 이설이지만 황제 입장에서는 답답하고 어리숙하게 보였을 게 뻔할 뻔 자다. 그러니 황제도 첫인상에 이설을 그리 구박데기로 만들지 않았던가. 오래 알고 지내다 보면 정이 들기 마련이라지만 황제도 그럴 줄은 몰랐다.
좌우지간 지금 황제의 폭풍우 몰아치는 마음을 잠재울 수 있는 건 여기 넋 놓고 앉아 있는 이설뿐이라는 거다. 이설로도 되지 않는다면, 그건 차란이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영역 밖을 벗어난 것이었다. 그때가 온다면 잠자코 포기하겠지만 아직은 더 파 볼 구멍이 남아 있었다.
“폐하께서는 요즘 밤마다 잠자리에 드시는 게 힘드신 모양입니다.”
차란이 찾아온 직후부터 황제의 얘기를 꺼낼 것을 직감하고 있었는지 이설은 놀라는 반응 없이 잠자코 있었다.
“탕약도 별 소용이 없으신 것 같고요.”
“머리앓이에 좋은 차를 알려 드린 게 있습니다. 수시로 드시면 좋다 전해 주세요.”
“마마께서 직접 말씀드리는 건 어떻습니까?”
자연스레 말을 꺼내는 차란에게 이설이 처연하게 웃었다.
“저를 만나러 와 주시지도 않는걸요.”
이럴 때는 차란도 어쩔 수 없이 이설이 답답했다. 왜 직접 찾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 건지 원.
“마마께서 태금궁으로 직접 찾아가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말은 제안처럼 하지만 사실 그러기를 강력히 촉구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역시나 이설은 고민도 없이 바로 고개부터 저었다.
“제가 어찌 폐하 허락 없이 태금궁을…….”
“폐하께서는 아직 마마의 태금궁 출입을 불허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설은 모르고 있겠지만 오직 이설만이 황제가 없을 때도 침소에 머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하물며 태자도 황제와 함께 있지 않고서는 그곳에 혼자 있을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황제가 예외로 두는 거의 모든 경우에는 이설이 있는데 그걸 이설만 모르는 것 같다. 어떤 것들은 황제조차도 이설이 특별한 경우인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마마께서 당장 태금궁으로 가신다 하셔도 아무도 마마를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폐하께서 저를 반기지 않으실 겁니다.”
“그럴 리가요.”
“화가 많이 나셨습니다. ……저한테요.”
“당연하지요.”
차란이 바로 맞받아치고 차를 마시며 괜히 시간을 더 끌었다. 여전히 식지 않은 차가 혀끝을 데웠다. 이설이 빤히 쳐다보는 게 무표정인 듯하면서도 어쩐지 울음 섞인 원망 같아 난데없이 죄책감이 가슴을 찔렀다. 그 기분을 털어 내려 곧바로 말을 이었다.
“마마께서 외간 사내와 단둘이 침소에 계셨잖습니까.”
“그건,”
“다 이유가 있으셨다는 거 저도 압니다. 허나 폐하께서 믿지 않으신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상황을 다 알지는 해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황제는 이설이 창화군은 물론 외간 사내와 친분을 나누는 것을 못 견뎌 한다. 저만해도, 비운궁에 수시로 드나드는 이유가 무엇이냐며 모가지를 담보로 위협을 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결단코 그럴 사이가 아니라는 걸 아는 저도 그 정도였는데, 창화군과의 사이는 오죽 의심이 들고 눈엣가시 같았을까.
거기에 이설의 태도도 한 몫 거들었을 거다. 모르긴 몰라도 창화군의 편을 들어 주지 않았을까 싶다. 금군에게 끌려간 창화군의 안위라도 황제 앞에서 걱정했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설에게 굳이 이런 얘기를 꺼낼 필요는 없겠지.
“폐하께서는 마마를 무척 아끼고 계십니다.”
오늘 했던 말 중 이보다 더 진심이었던 게 없다.
“이유가 어찌 됐든 그리 아끼시는 마마께서 외간 사내와 단둘이 있는 걸 보시게 된 폐하의 마음도 조금은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경거망동을 했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헌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미 엎질러진 물을 어찌 담아야 할지…….”
넋 없이 시무룩했던 게 이런 고민을 하는 탓이었나. 혹시 황제에게 질리거나 겁을 먹고 몸을 사리고 있는 중일까 걱정했던 것을 그나마 덜었다.
“먼저 폐하를 찾아가 보세요.”
“…….”
“폐하께서는 마마를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황제는 요즘 매일 밤을 불면증에 시달리고, 혹 제 때 잠들더라도 한밤중에 잠에서 깨기 일쑤다. 그런 날이 며칠이나 길게 이어졌으니 잠들기 전 제발로 찾아온 이설이 설령 기껍지 않더라도 단칼에 쫓아내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황제가 무슨 날 선 말을 해도 이설이 상처받지 않고 담담히 받아들이길 바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