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126화
다급히 변명하는 이설의 말은 우찬에게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성난 얼굴은 일말의 자비심도 내비치지 않았다.
“여태 그리 생각하며 살고 있었어?”
“폐하!”
“내가 너를 억지로 끌고 와 이 좁은 궁에 가둬 두고 있었던 것이냐?”
“그런 게 아니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마음 같아서는 우찬의 장포 끝자락이라도 붙잡고 애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우찬은 이설을 침상에 던지듯 밀어 넣고서는 이설이 무릎걸음으로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반 발짝 뒤로 물러섰다.
“가까이 오지 말거라.”
바닥에라도 내려가려던 이설을 멈추는 목소리가 위협적이었다. 이설은 풀었던 무릎 다리를 다시 모아 앉았다.
“너를 품에 안으면 나는 또 네 거짓에 속아 넘어가게 돼.”
“거짓을 고한 적 없으니 폐하께서도 속으시는 게 아닙니다.”
꾸역꾸역 참은 눈물이 결국 터져 나와 호소해도 우찬은 반응 없이 이설을 내려다보았다. 우찬의 말대로 이설도 본능적으로 알았다. 우찬에게 안겨 눈물로 간절히 애원하면 이번에도 우찬은 못 이기는 척 제 말을 믿고 넘어가 줄 것이라는 걸.
울고 있는 자신을 우찬이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고만 있는 게 견디기 힘들다. 곧 뿌옇게 흐려진 시야에 덩그러니 서 있던 우찬의 형체가 점점 멀어졌다. 이설이 손등으로 얼른 눈물을 훔쳐내고 우찬을 불렀다.
“폐하.”
울먹이며 갈라진 목소리가 우찬을 멈칫하게 만들었지만 돌려세우지는 못했다. 이설은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겨우 삼켰다.
“이 또한 믿어 주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 그림은 폐하께 드리기 위해 창화군께 부탁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폐하께 미리 말씀드리지도 못하였고, 화공에게 맡기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신첩은 오늘 폐하께……,”
못 박힌 듯 서 있던 인영이 결국 다시 멀어진다. 미처 다 끝내지 못한 말은 이설의 입안에만 맴돌다 울음과 함께 가슴으로 꾹 삼켜졌다.
장지문이 열리고 다시 닫히자 우찬이 사라졌다. 생각 외로 혼자 남겨졌다고 눈물이 왈칵 쏟아지지는 않았다. 손등으로 다시 훔치고 나니 더는 눈물도 나지 않는다. 코를 한 번 훌쩍였다가 바닥에 발을 내리고 앉았다. 멀어지는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에도 아무도 들어오지 않아 다행이었다.
방금 전까지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주위가 고요했다. 창으로 들어오는 빛도 아직 밝았다. 아직 해도 중천에 떠 있는 시간이었다. 이 애매한 시간에 우찬이 찾아올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모두 다 제 탓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우찬을 향한 억울한 반발심이 가슴 깊은 곳에서 일렁였다. 어째서 제 말을 믿어 주지 않는 건지. 그날 제게 그리 모진 말을 퍼붓고는 왜 갑자기 찾아온 것인지. 그중 가장 서러운 것은 어떻게 창화군과의 사이를 의심할 수 있는지다.
연모하는 마음을 몰라줄지언정 이렇게 무참히 짓밟다니. 서럽고 서럽다. 말 못 할 이 마음을 털어놓을 이가 없었다.
그냥 이대로 땅으로 푹 꺼져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오후였다.
*
우찬은 늘 차란에게 ‘가급적 내 눈에 띄지 않게 다니도록 하여라’라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우찬은 황제이고 차란은 승상이었다. 심지어 차란은 보통은 승상이 하지 않아도 될 일까지 도맡아 해야 했는데, 이는 모두 차란이 노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는 우찬의 심술 때문이었다.
그런고로 차란은 늘 바빴으며 황제를 자주 찾아뵈어야 했다. 특히 요즘 같은 때에는 더 그러했다.
바쁘고 골치 아픈 일이 많은 건 그런대로 참을 수 있다. 이전에 처리했던 것들에 비하면 최근에 생기는 문제들은 다소 중차대한 사안들이 많이 있다지만 그래도 황제를 알현하는 일에 비하면 거뜬한 일이었다.
“폐하께서는 탕약을 모두 잡수셨사옵니까?”
이제 막 우찬의 집무실을 나오는 차란에게 윤 내관이 다가와 물었다.
“사발 그릇 두 개 다 그대로였습니다.”
본대로 전하는 차란의 말에 윤 내관이 끙 앓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침에 올려드린 것도 여즉…….”
꿍얼거리는 노인네의 목소리에는 불평도 불평이지만 못내 안타까워하는 걱정이 가득했다.
차란은 검집 끝으로 찔린 어깨를 손으로 뭉근히 누르며 윤 내관을 신기한 듯 쳐다봤다. 날 때부터 몸이 그렇게 굳어 태어난 것처럼 머리부터 허리까지가 완만한 곡선으로 굽어 있었다. 황제를 가까이 모시기에 최적화된 신체였다. 제 아버지 연배보다도 높은 윤 내관에게 할 법한 생각은 아닌지라 금세 털어냈다.
그래도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황제를 모시기에 가장 적절한 것은 완만하게 기울어진 몸뚱이뿐만이 아니었다. 차란이 윤 내관에게 가장 높게 사는 것은 저 충의였다. 아무리 제가 황제를 자주 찾아뵌다 한들 어디 윤 내관만할까. 황제가 유독 자신에게만 박하고 모질게 군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이들에게 더 다정한 것은 아니었다. 지극히 상대적인 비교이며, 간극의 차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러니 윤 내관도 오늘 황제에게 말도 못 하게 몸을 사려야 했을 것이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검집에 어깨를 맞은 차란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 우찬의 기분을 고려했을 때 아침부터 지금까지 윤 내관이라고 아무 일 없지는 않았을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존체 무탈하기만을 바라는 저 우직한 충성심에 누가 토를 달 수 있으랴. 보통 충의가 아니고서는 그럴 수가 없다, 황제에게는.
“왜 그리 혼자 웃으십니까, 승상?”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따로 태의를 만나시지는 않습니까?”
“오늘 아침에 태금궁으로 태의를 부르긴 하였는데 폐하께서 만나지 않겠다 하셔서 그냥 돌아갔습니다.”
“아프다 말씀은 더 안 하시고요?”
“말씀은 없으시지만……, 뵈셨으니 승상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문 안으로 말소리가 들어가지 않는 걸 알 텐데도 윤 내관이 말소리를 낮췄다.
말이 드문드문 빠지긴 했지만 용케 알아들은 차란이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차란도 며칠 만에 황제의 얼굴을 보고 오금이 저려 오래 보지는 못했지만 확실히 안색이 좋지는 않았다. 사실 탕약 두 사발 정도로 나아질 것도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제 오후 우찬이 비운궁을 다녀왔다. 차란은 비운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기도 전에 금군에게 끌려간 창화군을 데려오느라 애를 먹었다. 그리고 얼추 상황을 정리하고 황제에게 자초지종을 들으러 갔다가 그대로 뒷걸음을 치며 돌아왔다. 그제의 황제는 심히 사람 같지가 않았다. 이럴 때야말로 제가 모시는 황제가 정녕 성천자 봉황의 헌신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
헌데 기록에 따르면 성천자 봉황의 자손은 대대로 백성을 돌보고 나라를 이롭게 하기 위해 땅에 내려왔다는데 지금의 황제는 아무리 봐도 저를 죽여 없애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온 것 같다. 어째서인지 제게만 너무 박하다.
제법 쓸 만한 소식을 알리려 들어갔다가 괜히 몸만 여기저기 아프게 된 채로 나왔다. 변덕이 없는 게 황제의 좋은 점이라면 좋은 점이었는데, 요즘은 기분이 하루 반나절 단위로 들쭉날쭉하니 차란은 좀 피곤했다. 그래도 이걸 좋은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최근쯤부터는 눈치 살필 필요도 없이 기분은 늘 하강세다.
그리고 그 정점을 찍은 게 그제 오후 비운궁을 다녀온 뒤였다. 충심이 철철 넘치는 윤 내관은 이설의 침소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자세히 알려 주지는 않았지만 황제가 비운궁에 도착했을 때 이설의 침소에는 이미 창화군이 먼저 와 있었다고 슬쩍 귀띔만 해 주었다. 그거면 끝난 설명이었다.
“아침 수라도 거르셨습니다.”
“수라야 뭐 제때 챙겨 드시는 일이 더 드문 분이시니까요.”
남 일처럼 성의 없이 대꾸하자 윤 내관이 가늘게 뜬 눈에 힘을 주며 불만스럽게 올려다봤다. 차란은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그냥 그러하시단 말씀입니다.”
“이 늙은이와 한가하게 노닥거리실 시간이 있으시면 폐하를 음해하려 했던 이민족 잔당들이나 잡아 족치시지요. 아주 고얀 것들 아닙니까.”
“거, 윤 내관님 말씀 좀 점잖게 하세요. 나이 지긋하신 분께서 족치다니 그게 무슨 상스러운 언사십니까?”
보기와 다르게 가끔씩 저런 상스러운 말을 곧잘 쓰는 윤 내관을 차란이 다 민망하게 여겨 주변 눈치를 봤다. 하지만 근처에 있던 궁인들은 으레 들어봤던 말인 듯 별 내색 않고 미동 없이 서 있었다.
“북쪽의 야만 무리입니다. 그 흉악함이야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악행이야 저도 익히 들어,”
“하기야 승상께서는 직접 난세를 겪어 보지 않으셨으니 알 턱이 있겠습니까?”
자신이 그 악행을 일삼는 북쪽의 야만 무리도 아닌데 왜 애먼 눈초리를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어처구니가 없어 저도 모르게 웃음이 툭 터진 차란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 맞장구를 쳐줬다.
“예, 수백 년 만에 태평성대를 누리는 저같이 새파랗게 젊은것들이 난세를 알 리가 없죠.”
이기죽거리는 차란의 말에 주위에 있던 비슷한 또래의 궁인들이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가 순식간에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윤 내관은 차란을 빤히 쳐다보다 이내 한숨을 쉬며 탄식했다.
“이번 기회에야말로 더 이상 후환이 없게 남은 잔당들을 완전히 토벌해야 합니다.”
“그러길 바라야죠.”
“승상께서 제대로 일만 해 주신다면 못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대놓고 압박을 주는 눈초리에 차란이 대충 인사로 마무리를 하고 얼른 자리를 떠났다. 윤 내관은 말이 나온 김에 차란에게 좀 더 채찍질을 해 볼 심산이었던 것 같지만 도망치듯 걸음을 빨리하는 차란을 붙잡을 재간이 없었다.
날은 푸르고 하늘은 맑고 바람은 선선하다. 인적 드문 호수에 나룻배 한 척 띄 어놓고 술 한잔하며 신선놀음하기 딱 좋은 날씨다. 그간 상단에 들어오는 좋은 술이란 술은 죄다 우찬이 쓸어가 버리는 바람에 제대로 술잔을 들어 본 지 한참이었다. 요즘은 바쁜 게 문제였다.
곧바로 금위대장을 만나러 가는 길에 역시 호기심 많은 성격이 비운궁 담벼락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기별 없이 찾아갈 만한 핑곗거리가 없어 대문 앞에서 잠시 고민하다 적당한 것이 생각나 주저 없이 문턱을 넘었다.
특별히 오랜만에 보는 것도 아닌데 그사이 이설은 안색이 더 안 좋아졌고 살이 빠졌다. 살이 찐 티는 거의 나지 않는데 항상 빠지는 것만 눈에 띄니 저러다 정말 꽃이 다 진 마른 나뭇가지가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오래 본 사이도 아닌데 살 좀 빠졌다고 건강이 걱정될 만큼 이설이 늘 안타까웠다.
그런 몰골을 하고서도 불쑥 찾아온 차란을 귀찮은 내색 없이 반기고 자리에 좋은 차까지 내어 주는 이설에게 제가 다 미안할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