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의 황홀경 (124)화 (124/300)

달의 황홀경

124화

“이게 무엇입니까?”

“마마의 그립이옵니다.”

“아! 제 그림이라면,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만 더 이상 그림은 그려 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저 때문에 괜한 시간만 낭비하신 것 같아……,”

생각지 못하게 갑자기 말을 전하려니 횡설수설하는 이설의 말에 창화군이 웃으며 조용히 족자의 끈을 풀어 탁자 위에 펼쳤다. 자연스레 아래로 향한 눈이 잠시 뒤 반가움에 커지며 창화군을 봤다.

“저 없이 어찌 그림을 다 그리셨습니까?”

“기억을 더듬어 그린 것이라 완전히 똑같지는 않을 겁니다.”

“예, 그림 속의 제가 훨씬 더 보기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런 뜻으로 드리는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족자에는 며칠 내내 창화군이 그리던, 완성된 이설의 초상화가 담겨 있었다. 즐겨 입는 회백색 의복과 반만 틀어 올려 꽂은 옥색 단잠, 그리고 가지런히 모인 두 손에 각각 나눠 끼워져 있는 두 개의 가락지까지 모두 이설의 평소 모습 그대로였다.

“멋대로 그림을 완성시켜 송구합니다. 거의 완성된 그림이라 그냥 두기에는 저도 너무 아까웠던지라 실례를 무릅쓰고 밤새 그려 보았습니다.”

“밤을 새우시기까지야…….”

제 모습을 그린 그림을 보고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게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한지라 웃음을 감추며 이설이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족자를 들어 여기저기 살펴보는 이설에게 창화군이 멋쩍게 웃었다.

“사실 제가 내일 급히 도국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내일 당장, 말씀이십니까?”

족자 속에 제 얼굴을 보고 흐뭇하게 웃던 이설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창화군이 곧 도국으로 돌아간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경미찬 연회가 끝난 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갑작스레 떠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예정보다 날짜가 조금 앞당겨졌습니다.”

“잘됐습니다. 창화군께서도 늘 고국을 그리워하지 않으셨습니까?”

“예. 갑작스럽긴 해도 제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기분은 좋습니다. 다만 마마와 우 미인 마마를 떠난다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이 들어…….”

한껏 기분 좋은 미소가 퍼졌던 얼굴에 옅은 그늘이 졌다.

“반평생을 살았던 금의 황궁이지만 그간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제야 좋은 인연을 만들었나 했는데 이리 떠나게 되니 저도 마음이 그리 편치만은 않습니다.”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목소리에 이설도 덩달아 기분이 축 내려앉았다. 어차피 창화군이 더 황궁에 있는다 해도 우찬의 눈초리 탓에 자주 만날 수도 없는 데다가 내년 초가 되면 다시 거주 구역에서 꼼짝도 못 할 신세지만, 창화군이 도국으로 아주 돌아가는 것과는 얘기가 달랐다.

창화군은 도국으로 돌아간 이상 다시는 금국 땅에 발을 붙일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이설 역시 우찬과의 약조로 연국으로 돌아간 뒤에는 두 번 다시 연국 밖으로 나갈 수 없을 터였다.

“가끔 서신이라도 보내 주시면 답서하겠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이설이 미소로 화답하자 창화군이 대답에 만족한 듯 웃으며 차향을 음미했다.

문득 창화군과 있으면 왜 그렇게 기분이 편안하고 몸의 긴장이 풀리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국에서도 유독 감성적이고 섬세했던 이설이 금국에 온 뒤로 처음 만나 본 저 같은 사내였다. 어디서든 그렇겠지만 그림을 좋아하고 사색을 즐기며 차향에 조예가 남다른 사내가 여기 황궁에서는 더욱 흔치가 않았다. 다들 적당한 소양은 있었지만 큰 관심은 두지 않았다.

“제 얼굴에 뭐가 묻기라도 하였습니까? 마마께서 절 보고 자꾸 웃으시니 기분이 참 이상합니다.”

이설이 저도 모르는 새에 창화군을 흐뭇하게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는지 창화군이 농담조로 가볍게 말했다.

“창화군과는 대화가 참 잘 통하는 것 같습니다.”

“마마에 비하면 한참 모자란 식견입니다. 마마께서 많이 답답하실 텐데요.”

“아닙니다. 저도 창화군 덕분에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그럴 리가요. 여기 낯선 땅에서 허비한 시간만 제 반평생입니다. 그림 그리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씁쓸한 미소로 흘리는 말의 무게가 한없이 무거우면서 동시에 공허했다. 낯선 땅에서 반평생을 보냈다는 그 말을 언젠가는 저도 하게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오랜 세월을 여기 살아도 여전히 여기 황궁은 낯설고 어색할까.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는 데에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많이 그리우십니까?”

“물론입니다. 마마께서는 연국 생각이 나지 않으십니까?”

“……매일, 생각이 납니다. 제 침소 안으로 꺾어 들어온 마른 나뭇가지 하나까지도 전부 다 보고 싶습니다.”

요 며칠 머리가 복잡해 잊고 잊던 고향 생각이 다시금 스멀스멀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기분 좋았던 날이라면 웃어넘겼을 법한 생각들이 오늘따라 마음을 후벼 파는 것을 보니 오늘 제 기분이 좋지 않은 듯싶다. 괜찮다, 괜찮다, 감정을 자꾸 속에서 억지로 외면하려고 하니 이제는 가만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스스로 어떤 기분인지도 분간하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시무룩하게 드는 생각에 정신이 멍해진 것도 잠깐이었다. 그림 족자를 잡고 있는 손의 등 위에 창화군이 살포시 제 손바닥을 겹쳤다. 붓을 오래 잡아 생긴 손가락 사이의 굳은살이 살갗에 살짝 닿았다. 놀라 손을 거두자니 손등을 토닥토닥 가볍게 두드리는 손길이 위로가 되어 잠자코 두었다.

“마마께서는 부디 이곳에서 많이 보시고, 많이 배우시며 존체 무탈하시길 먼 곳에서나마 빌겠습니다.”

“…….”

“제가 없어도 그림은 꾸준히 그리셔야 합니다. 마마께는 분명 재능이 있으십니다.”

이설이 다른 생각을 하며 두 사람 사이에 분위기가 가라앉자 창화군이 애써 쾌활한 어투로 말했다. 멍하니 먼 미래의 어느 날을 그려 보고 있던 이설은 창화군이 무슨 말을 했는지 제대로 듣지 못했으면서도 알아들었다는 척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창화군께서도 부디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다시 뵙는 날도 오겠지요.”

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이설도, 창화군도 모두 그런 날은 앞으로도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 서로가 처한 처지를 생각해 보면 그렇게 될 수가 없었다.

이설은 말을 하면서도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그게 분명 좋은 일만은 아닐 거라고, 속으로만 쓴웃음을 지었다.

“아, 잠시만 자리에 있어 보십시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이렇게 귀한 것을 받고 빈손으로 보내시는 건 도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여기 잠시만……,”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래도 제 마음이 편치가 않습니다.”

값을 매길 수도 없는 그림을 받고 빈손으로 보내기에는 이설의 마음이 좋을 수가 없었다. 하다못해 궤짝에 모셔 놓은 값비싼 보석이라도 한 줌 쥐여 줘야 마음이 놓이겠다.

자리에 벌떡 일어난 이설을 막느라 창화군이 제 손 아래 이설의 손을 꽉 쥐었다. 난감한 표정으로 이설의 손을 당기며 막아 보려 애쓰는 창화군을 되려 만류하며 이설이 고집을 부렸다.

“안 됩니다. 며칠 동안 꼬박 고생하셔 그린 그림을 대가로 없이 날름 받다니, 그런 염치 불고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제가 마마께 받은 은혜가 깊어 드리는 선물인데 염치라니 어찌 그런……,”

“글쎄, 저도 창화군을 빈손으로 보낼 수는 없……,”

이설을 따라 일어난 창화군과 마주 서서 실랑이를 벌이는 중이었다. 창화군에게 한 손이 붙잡혀서는 어떻게든 자개 서랍장 위에 궤를 건네려던 이설은 돌연 스르륵 풀리는 창화군의 손에 멈칫했다. 그리고는 누군가 당기기라도 하는 듯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양쪽으로 활짝 열린 문 너머에 제 사람이 아닌 이들이 빼곡했다.

“……뭘,”

“…….”

“하는 짓들이냐.”

그 무수히 많은 사람들 중 단 한 사람만이 장지문 문턱을 거리낌 없이 한 발짝 넘어 들어왔다. 음산한 목소리가 이설보다 먼저 창화군의 넋 나간 정신을 번쩍 깨웠다.

멀뚱히 서 있던 창화군이 순식간에 바닥 위로 부복했다. 떨리는 목소리에 담긴 두려움이, 한때 이설이 그랬던 것만큼이나 애처로웠다.

“도국 지원왕의 여섯 번째 아들, 도강서. 금국의 황제이시며 천하의 주인이신 폐하를 뵈옵니다. 홍복을 누리소서.”

이마가 바닥에 닿을 만큼 낮은 자세로 부복하여 있는 창화군의 옆에서 이설은 멀지 않은 거리에 가만히 서 있는 우찬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여전히 아름다운 황제의 눈에서 이설을 며칠 만에 만나는 애틋함은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멀리서 보아도 감춰지지 않는 조밀하게 집약된 분노가 까만 눈동자 속에서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아…, 폐, 하…….”

신음처럼 흘리는 목소리에 일말의 반가움도 없었다. 하필 지금 이때에 오시다니, 이설은 저도 모르게 바닥의 창화군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우찬이 빠른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와 눈 깜짝할 새에 이설의 팔을 당겨 창화군과의 거리를 벌렸다.

“뭘 하는 짓들인지 묻지 않았느냐.”

음산함에서 약간 더 고양된 목소리가 심상치 않은 우찬의 기분을 십분 잘 설명해 줬다. 이설은 순간 우찬의 두 눈에서 지난밤의 환영을 겹쳐 보았다. 눈을 질끈 감는 이설의 팔을 흔들며 우찬이 이를 바득 갈았다.

“다시 묻겠다.”

“…….”

“저자와 너. 단둘이 네 침소에서 뭘 하고 있었던 것이냐.”

팔이 붙잡혀 들려 있는 이설과 우찬의 간격이 너무 좁았다. 이설이 고개를 한껏 치켜들어 우찬을 바라보는 사이 분위기가 좋지 않음을 직시한 창화군이 자리에서 급히 일어나 이설의 뒤에 섰다.

“내일 도국으로 떠나기 전 마마께 인사를 드리러 잠시 들렀을 뿐입니다. 오해하실 만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으,”

“오해?”

뼈를 부러뜨리기라도 할 작정으로 꽉 쥔 손아귀 힘이 한풀 꺾였지만 이설은 자리에 두 다리가 고정이라도 된 듯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살기 넘치는 우찬의 눈이 이설의 어깨 너머로 향했다.

“네 지금 오해라 하였느냐?”

“…….”

“그럼 짐의 오해가 무엇인지 네가 말해 보아라.”

가벼운 웃음이 섞인 목소리지만 평소의 능글거리는 장난기는 찾아볼 수가 없다.

창화군은 황제와 만나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처음 금국에 왔을 때는 우찬이 즉위하기 전이었다. 우찬은 즉위 후에도 황궁 한구석에 살고 있는 변방의 왕자에게 일절 관심이 없었고, 여러 해 동안 둘은 스치듯 만나 본 적조차 없었다.

생전 처음 보는 황제일지라도 저 스산한 목소리에 깔린 웃음이 진심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역시나 우물쭈물 대답을 하지 못하는 창화군을 더 못 기다리겠는지 우찬이 다시 낮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어서 말해 보라니까. 짐이 어떤 오해를 하였는지.”

“…….”

“대답을 잘해야 할 것이야. 숨이 붙어 있는 채로 네 고향 땅에 돌아가고,”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우찬의 말을 자르며 이설이 두 사람 사이를 완전히 막아섰다. 두 장신 사이에 저 하나 낀다고 우찬이 창화군을 보지 못하지는 않겠지만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서 있게 가만히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창화군을 향했던 눈이 이설에게로 옮겨지며 시선이 아래로 낮아졌다. 눈빛은 여전히 차갑고 더 사나웠다.

“창화군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떠나시긴 전 잠깐 인사를 하러 들르신 것뿐이니 제발……,”

“설아 지금 네가,”

“…….”

“저자를 보호하려 내 앞을 막아선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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