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123화
“아, 요즘은 우 미인 마마를 그리 자주 찾으신다 하니 양찬궁에 계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거기에 없을 테니 묻는 것 아니겠느냐.”
“명하시면 당장 확인해 보겠습니다.”
차란이 당장이라도 나가 직접 이설의 동태를 살펴볼 기세로 대답했지만 황제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긴말이 없는 몸짓이라도 의미가 너무 명확하여 차란은 세웠던 무릎을 다시 얌전히 바닥에 꿇으며 옷단을 정리했다.
이설은 어젯밤 불시에 그런 봉변을 당하고 멀쩡히 양찬궁에 갈 그릇이 못 됐다. 또 어디 소야원 한쪽 구석에 넋 놓고 앉아 주변 사람들이나 걱정시키고 있겠지. 당장에라도 저를 찾아와 간밤의 일로 울며불며 서러운 마음을 토로해도 모자랄 판에 이리 잠잠하니 더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럴 성정이 못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이상한 방향으로 이설에게 모난 마음이 들었다. 어젯밤 제가 이설에게 정확히 무슨 짓을 벌였는지도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
“헌데 루 소의 마마께 은밀히 붙여 놓은 감시가 있지 않으십니까?”
들을 사람도 없는데 차란이 은근히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어제 모두 물렸다.”
마음 한구석의 찜찜함을 감추며 우찬이 대답했다. 차란은 그 이유를 궁금해하는 눈치였지만, 의외라는 듯 두 눈썹을 치켜올려 떴다가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놀란 기분을 감췄다.
또렷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제 환각에 취해 비운궁에 도착하였을 때 이설의 침소를 몰래 지키고 있던 호위군을 모두 물린 것 같다. 제정신이 아닌 와중에 제가 이설에게 하는 짓을 다른 이들에게 보이기는 싫었던 모양이다. 우찬은 그래서 스스로에게 환멸이 났다.
“폐하께서 다 생각하시는 바가 있으니 그리하신 거겠지요.”
‘저따위 소인배는 단연코 그 뜻을 헤아릴 수 없을 테지만’, 하고 말하는 게 분명한 눈빛이 우찬을 보는 듯 어깨 너머로 시선이 넘어갔다. 코웃음으로 넘기기에도 하찮은 태도라서 우찬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몸의 기운이 풀린 우찬이 다시 고침에 팔꿈치를 대고 비스듬히 누웠다. 권태에 젖은 눈이 천장을 보고 깜빡이다가 스르륵 감겼다가 한참 뒤에 뜨였다. 눈동자에 온기가 없었다.
“외교 사절단의 출발 일을 좀 더 앞당겨 볼까 하는데.”
“무리입니다. 명분이 전혀 없습니다.”
“명분은 원래 만들어야 생기는 것이지.”
“파송될 명단도 아직 다 추리지 못하였습니다. 금국 체면에 덜렁 창화군만 먼저 보내기도 우습지 않습니까.”
“진작 보냈어야 했는데.”
“그러게 그 패는 쓸모가 없으니 들고 계시지 마시라고 여러 번 말씀드렸잖습니까?”
우찬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걸 차란이 용케 알아듣고 받아쳤다. 우찬은 마뜩잖은 눈으로 차란을 한번 쓰윽 훑어보고는 시선을 돌렸다.
딱히 쓸모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돌려보내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창화군이 황궁에 있으나 없으나 우찬은 아무런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몇 해 동안 방치해 두었을 뿐이다. 이설이 아니었다면 존재 자체가 점점 흐릿해지다 어느 해에는 결국 잊고야 말 정도의 값어치였으니 쓸모 타령은 애당초 무의미했다.
기회가 있을 때 적당히 처리해 버리는 게 나았다. 하다못해 그자가 비운궁의 담벼락을 기웃거리던 것을 알았을 때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 이설을 존중하려던 같잖은 배려가 상황을 이 지경까지 만들었다.
“일단 추려진 인사들로 창화군과 함께 당장 선발대를 보내. 나머지는 예정대로 경미찬 연회가 끝난 뒤 보낸다.”
“당장이라 하심은 얼마나 당장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내일 당장.”
곧 죽어도 무리라 잡아떼려던 차란은 웃음기 없이 진지한 황제의 표정을 보고 말을 아꼈다. 안될 게 뻔한 일을 우찬이 고집으로 우기려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어차피 일의 가능 여부와 상관없이 되게 만드는 게 차란의 소임이었다.
“먼저 추려진 사신들 중에는 단소운도 있습니다.”
꺼내고 싶지 않은 이름을 일부러 언급하기까지 했지만 우찬은 단호했다.
“태자가 퍽 아쉬워하겠구나.”
소운이 선발대로 먼저 떠나든 말든 창화군만 도국으로 쫓아낼 수 있다면 뭐든 감수하겠다는 의미다. 차란이 더 막아 볼 방법이 없었다.
“내일 당장은 무리입니다. 늦어도 나흘 내로는 준비해 보내겠습니다.”
“사흘로 해라.”
“……예.”
대답에 간격이 있었던 것이 불손하긴 했지만 일 처리에 그르침이 없는 차란이 대답을 한 이상 우찬은 더 이상 토를 달지는 않았다.
차츰 증세가 완화되는 것과는 별개로 기분은 아직 썩 나아지지 않았다. 사흘 내로 창화군이 황궁을 떠난다고 하여 간밤의 일이 없었던 게 되는 건 아니었고 앞으로도 이런 일이 다시 생기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궁극적인 해결 방법이 필요하다. 이설이 오직 제 품에서만 살 수 있게 되는 방법이.
“폐하 지금 막 태의가 도착하였습니다. 안으로 들이겠습니다.”
“신은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할 일이 많을 듯하여…….”
윤 내관 소리에 차란이 기다렸다는 듯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 안으로 들어오던 태의에게 폐하를 봐 드리라며 사람 좋은 척 인사를 하고는 급히 밖으로 나갔다.
태의는 늘 하던 대로 황제의 증상을 묻고, 진맥을 재고, 가져온 약재를 물에 타 권했다. 하등 쓸모없는 짓거리였다.
지난밤 허락 없이 침소로 들여다 놓은 환각 향초 때문에 황제의 심기가 매우 불편하다는 것을 아는 태의는 내내 흘끔흘끔 황제의 눈치를 봤다. 태의에게는 그 일에 대한 책임을 따로 묻지는 않았지만 태의는 그게 더 불안한 모양이었다.
“오늘 아침 사의시에서,”
“예, 예!”
별안간 말을 거는 우찬에게 놀란 태의가 두 번째 약재를 물에 개다가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비운궁으로 의원을 보낸 적이 있느냐.”
몸이 안 좋은 탓인지 묘하게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귓전을 낮게 울렸다. 태의는 잠시 생각해 보는가 싶더니 곧 작게 고개를 저었다.
“비운궁에서 따로 의원이나 의녀를 찾는 기별은 없었습니다.”
“…….”
“이 노신이 이따 한번 들려 볼까요?”
“그럴 필요 없다.”
비운궁의 마마를 걱정하는 눈치길래 한번 떠보았더니 단칼에 거절이었다. 사그라질 것 같지 않던 황제의 총애도 이제 슬슬 시들시들해진다는 얘기가 마냥 헛소문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늘그막에 출세를 바라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여태껏 이설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던 시간이 조금 아깝기는 했다. 그래도 주 상궁이 그간 챙겨 준 게 있으니 그럭저럭 보상이 되는 편이었다.
“경국에서 새로 들어온 약재가 있습니다. 불을 붙여 태워 연기를 마시면 심신이 안정되고 잠이 잘 온다 합니다. 오늘 밤 태금궁으로 준비해 드릴까요?”
역시 실패 없는 줄은 황제뿐이다.
태의가 간밤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자신만만하게 물었다. 새벽 늦게까지도 잠 못 드는 황제가 거절할 약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비운궁으로 보내라.”
“루 소의 마마께 말씀이십니까?”
말을 제대로 들어 놓고도 되묻는 태의에게 황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태의가 아직 덜 개어 놓은 약재를 사발로 들어 마시고 던지듯 내려놓자 화들짝 놀란 태의가 ‘명 받잡겠사옵니다.’ 하고 대답한 뒤 들여온 짐을 챙겨 나갔다.
약재 탓인지 오래 지나지 않아 머리가 깨질 것 같던 통증이 모처럼 가라앉았다. 하지만 좋아하긴 일렀다. 이러다 언제 갑자기 도질지 모르는 고통이다.
낫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그 방법을 쓰고 싶지는 않다. 아직은 아니었다.
*
“간밤에 좋은 꿈이라도 꾸셨습니까? 안색이 어제보다 더 좋아지셨습니다, 마마.”
늦은 아침 포단을 정리하러 들어온 연화가 명랑하게 물었다. 화병에 물을 갈아 주던 이설이 어색하게 웃으며 그런가, 하고 말끝을 흐렸다.
“좋은 약재는 뭐가 달라도 다르긴 한가 봅니다. 암만 장에서 좋다는 걸 사 봐야 태의 영감이 주는 것만 하겠습니까?”
“그래, 연화 네 말이 맞다.”
이설이 맞장구를 쳐 주니 금세 신이 난 연화가 쫑알쫑알 더 떠들다가 단향이 부르는 소리에 투덜거리며 나갔다. 이설은 연화가 애써 정리해 놓은 포단 위에 다시 몸을 눕히며 기지개를 쭉 켰다. 확실히 어제오늘 잠을 푹 자고 나니 몸이 개운하기는 했다. 주 상궁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태의는 좋은 약재가 들어오면 이설에게 먼저 권해 주니 고마울 노릇이었다.
포단의 부드러운 면 위에 볼을 대고 몸을 웅크려 누웠다. 몸이 개운한 것과는 별개로 홀로 있는 시간에 찾아오는 우울함이 전신에 스며들었다.
며칠 전 밤, 소리 없이 찾아온 우찬의 여파가 아직까지 채 사라지지 못하고 있었다. 몸이 아팠던 것이야 주 상궁이 아무도 몰래 궁 밖에서 구해 온 고약을 아래 환부에 바르고 나니 금세 나았지만 마음은 그렇지가 못했다. 귀를 씻어 낸다고 해서 들은 것들이 씻겨 내려가는 것도 아니었다. 말의 비수는 아직 가슴에 박힌 그대로였다.
사흘째 양찬궁도 가지 못했다. 하루 반나절의 시간을 쪼개서라도 제게 검무를 알려 주려 노력하는 우 미인과 제 그림을 그려 주는 창화군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도저히 갈 기분이 들지 않았다. 특히나 우찬에게 그런 말을 들었으니, 창화군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다.
“마마, 안에 계시지요?”
주 상궁 목소리가 들려 느긋하게 몸을 일으켜 세우며 안에 있다 대답하자 창화군이 찾아오셨다 언질을 주었다. 당황하여 되돌려 보낼까 하다가 찾아와 준 김에 얼굴은 보고 얘기해야 할 것 같아 안으로 들이라 했다.
이설의 몸이 편치 않다 생각한 창화군이 으레 안부 인사를 하며 자리에 앉았다. 보지 않은 새에 수척해진 모습이 무척 보기 안 좋았다.
창화군이 피곤한 듯 눈가를 비비며 가지고 온 족자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