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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122)화 (122/300)

달의 황홀경

122화

차란이 아직 뒤따라오고 있는 걸 알면서도 우찬은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말없이 걷기만 했다.

대전에서 멀리 떨어진 소청각 담을 끼고 돌 때쯤 누군가 뾰족한 돌부리로 머리를 찍어 내리는 것처럼 통증이 심해져 잠시 자리에 멈춰 섰다가 소청각 안으로 들어왔다. 기별도 없이 들이닥친 우찬을 보고 관리들이 혼비백산해 급히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어서 태의를 불러오지 않고 뭣들 하느냐!”

안색이 급격히 나빠진 우찬을 자리로 모시며 윤 내관이 뒤에 선 궁인들을 향해 소리쳤다. 발이 느린 궁인들 대신 우찬의 호위군 하나가 소청각 지붕 위로 훌쩍 뛰어올라 사라졌다.

“호들갑 떨지 말고 전부 물러가 있어라.”

“폐하, 안색이 심히 좋지 않습니다. 곧 태의가 도착할 테니,”

“모두 물러가 있으라 하지 않았느냐!”

위압적인 고함에 멀리 뒤쪽에 서 있던 궁인들까지 화들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노련한 윤 내관은 놀란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주름 많은 얼굴에 걱정이 잔뜩 끼어 있었다.

“태의가 오는 대로 곧장 안으로 들이겠습니다.”

윤 내관이 뒤로 물러나며 차란에게 눈짓을 했다. 우찬의 표정을 살피던 차란이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막 뒤를 돌아 나서려던 참이었다.

“비차란 너는 남아 있어라.”

“태의가 올 때까지 신도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남아 있으라 하였다.”

짜증 섞인 말투를 듣자니 우찬의 인내심이 거의 바닥을 보였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윤 내관이 먼저 방을 나서며 차란과 눈을 마주쳐 코를 찡그리고는 고개를 잘게 끄덕끄덕 거렸다. 태의가 올 때까지 적당히 우찬의 기분을 맞춰 주고 있으라는 의미였다.

윤 내관이 밖에 나가 문을 닫았다. 황제가 혼자 주악을 즐기며 술상을 받는 곳이라 방이 좁고 마땅히 앉을 만한 자리가 없었다. 문 앞에 서먹하게 서 있는 차란을, 우찬이 손짓하여 불렀다.

“하려던 말이 무엇이냐.”

“예?”

“뭔가 할 말이 있으니 여기까지 쫓아온 것 아니겠어.”

“그렇긴 합니다만……,”

차란이 상체를 슬쩍 숙여 우찬을 다시 살펴봤다. 고침(高枕:높이 베는 베개 또는 높은 베개)에 팔꿈치를 대고 비스듬히 누워 아직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고 있었다.

“중한 사안은 아니니 쾌차하시거든 말씀드리겠습니다.”

“근 몇 달째 앓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쾌차라는 말이 나오느냐?”

꼬일 대로 꼬인 말이었지만 우찬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지금쯤 태의가 제조한 약을 한 아름 들고 부랴부랴 달려오고 있을 테지만 별다른 효과를 기대하지는 않았다.

“중한 사안인지 아닌지는 내가 들어보고 판단할 테니 어서 말해라.”

우찬이 눈을 비비고는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식은땀이 흘러 앞머리가 젖을 정도인 걸 보면 평소보다 상태가 더 안 좋은 것 같긴 한데, 말을 안 하고 버텼다간 곧 제 상태가 안 좋아질 것이라는 걸 아는 차란이 근심으로 긴 한숨을 쉬었다.

차란이 고민하는 동안 우찬은 관자놀이를 힘주어 누르는 것을 관두고 어깨에 걸친 장의부터 벗어 옆으로 던졌다. 이까짓 거 좀 누른다고 나아질 게 아니었다.

차라리 대전에서 정무를 볼 때가 나았다. 대신들의 헛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속에서부터 부아가 치밀어 오르기 마련이라지만, 그 탓에 이 지긋지긋한 고통에서는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혼자서 가만히 잡생각이 드는 시간이 더 견디기 어려웠다.

“흑영에게 전언이 왔습니다.”

“내용은.”

“회국에서 폐하를 급습한 무리로 추정되는 사내 하나를 붙잡았다고 합니다.”

“맞으면 맞고 아니면 아닌 거지, 추정은 또 뭐냐.”

“그게, 심문도 하기 전에 자결을 하여 정확한 진위는 알아내지 못한 듯합니다.”

우찬은 버릇처럼 관자놀이로 가져가려던 손을 다시 내리며 머리를 털었다. 넌지시 차란을 올려다보는 눈빛이 사나웠다.

“그게 다는 아니겠지?”

“예. 문제는 사체를 확인……,”

“앉아. 앉아서 얘기해라. 내가 너를 얼마나 더 올려다보게 만들 생각이냐.”

우찬이 휘이 젓는 손짓에 차란이 냉큼 자리에 앉았다.

“죽은 사내의 사체에서 암어로 적힌 서신이 한 장 나왔는데, 편국 왕가의 인장이 찍혀 있었습니다. 자결하기 전 서신을 훼손시키려고 한 것으로 보아 평범한 내용은 아니었을 거라 사료되옵니다.”

“편국 왕가의 인장?”

우찬이 부지불식간에 인상을 팍 찡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골치 아픈 일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간다.

“확실히 편국 왕가의 인장이었다고 합니다. 죽은 사내를 쫓던 군에 따르면 편국에서 회국 국경을 지나 연국으로 향하는 산길을 타고 있었습니다.”

우찬이 실소하자 차란이 큼큼, 목을 가다듬으며 숨을 골랐다. 돌아가는 상황을 가늠하며 우찬은 나른하게 고개를 뒤로 젖혀 눈을 감았다.

편국이 금국 몰래 이민족들과 밀거래를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보통은 이민족을 통해 설산에서만 구할 수 있는 약초나 희귀 동물들을 사들인 뒤 암암리에 파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금국에 유통되는 귀한 약재들 중 일부 역시 이를 통해 들어오는 것이라는 걸 우찬도 알고 있었다. 황궁에서 먼저 제재를 가하기에는 이미 전반적으로 시장이 활성화되어 있는 분위기라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한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그것 말고는 대체로 조용하던 편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졌다. 이름을 억지로 새기고 지우는 불법 시술이 성행하는 것이야 민가에서 도는 일이라지만 이민족과 서로 내통하는 것은 얘기가 다르다. 편국의 왕족이 개입되었을 확률이 크다.

수렵제의 피습과 이번 일이 얼마나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알게 된 이상 두 가지를 완전히 다른 사건으로 넘겨 버리기에는 어딘가 찜찜했다.

“서신의 내용은 알아냈느냐.”

“신도 몇 글자 베껴 쓴 것을 받아 보았는데 생전 처음 보는 글자들이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게 글자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흑영도 풀지 못하겠다 하더냐?“

“흑영 말로는 분명 본 적이 있다고는 하는데 도통 기억이 나지 않나 봅니다.”

“어쨌든 풀지는 못했다는 말이군.”

“폐하께서 한번 보시겠습니까?”

차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우찬이 손을 내밀었다. 차란은 소매 품에서 반으로 접힌 종이를 꺼내 우찬에게 공손히 건넸다. 얼마나 들여다보고 접었다 폈다를 반복했는지 접힌 부분이 닳아 찢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건네받은 종이를 우찬이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어디까지가 한 글자인지도 모르겠지만 대충 서너 자의 암어였다. 완전히 처음 본다는 차란과는 달리 우찬은 어쩐지 낯이 익은 듯하긴 했지만 달리 명확하게 떠오르는 것도 없었다. 암어라는 게 어차피 다 비슷한 모양에 규칙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러 종류의 암어를 외우고 있다 보면 헷갈리기 마련이었다. 우찬은 이를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알아보시겠습니까?”

“전혀.”

우찬이 종이를 탁자 위에 내려놓자 차란이 다시 종이를 거두어 가져갔다.

“그래서 퇴궐 후에 장 씨 영감을 찾아가 볼까 합니다.”

“그자는 안 돼. 입이 가벼워 신뢰할 수 없다.”

“폐하와 저, 그리고 흑영조차도 해독 못 한 암어를 그럼 누구에게 물을 수 있겠습니까?”

우찬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나 차란은 그렇다 치고 흑영조차 알아내지 못한 암어를 다른 이가 풀 수 있을 거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차란도 그걸 알고 있으니 그나마 고르고 고른 게 장 씨일 것이다. 옥좌의 주인이 세 번 바뀌는 동안에도 꿈쩍 않고 비서관(秘書官:관청의 장관에 직속되어 기밀 사무를 맡아 보는 관리)직을 역임해 온 영감이니 기대해 볼 만했다.

“그럼 장 씨가 암어를 해독하거든 그 자리에서 바로 죽여라.”

“예?”

한껏 심각해졌던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차란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그동안의 공신을 높이 여겨 고통 없이 한 번에 보내 주어라.”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폐하.”

“그자도 혀가 잘리는 것보다야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이다.”

“둘 다 원치 않을 것입니다.”

“…….”

“암어는 신이 좀 더 시간을 두고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기겁을 하는 차란은 자신이 농담을 하는 줄 알겠지만 그럴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급한 사안이었다면 맘 약한 차란 대신 호위군 중 한 명을 보내 장 씨에게 암어를 해독하게 하고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 버렸을 것이다. 해독하지 못한다 해도 살려 둘 생각은 없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그렇게 하는 게 나을까 짧은 고민을 하던 중 이런 일에 쓸 만한 다른 이가 문득 생각났다.

“소운에게는 보여 줘 봤느냐?”

“태감께는 아직……. 얼굴 뵈온 지도 오래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찬도 소운을 본지 꽤 오래됐다. 일방적으로 직위를 박탈하고 명목상의 외교 사절단으로 추방하다시피 한 제 결정이 마음 너그러운 소운으로서도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던 모양이다.

“본가에 틀어박혀 있을 테니 찾아가 보아라.”

“시일 내에 사람을 보내 보겠습니다.”

곧 죽어도 제가 가겠다는 소리는 안 하는 차란을 못났다 비꼴 기분도 들지 않았다. 벗이라고는 해도 남은 남이다. 이 정도 해 줬으면 더 이상 줄 것도 없고, 어젯밤 일만 생각하면 당장 이 자리에서 차란을 죽이지 않은 게 하해와 같은 은혜였다.

잠시 잊고 있었던 어제의 일이 생각의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억눌렸던 불쾌함이 다시 스멀스멀 전신을 타고 올라왔다.

“그리고 말씀드린 것과는 별개로, 요즘 북쪽 이민족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며칠 전에는 회국 수도까지 들어와 민가를 약탈하고 불을 질렀다 하니……,”

“연이설은 지금 뭘 하고 있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요 며칠 보고받은 전언을 전하는 차란의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어차피 모르고 있던 것도 아니다. 상황이 좀 더 심각해졌을 뿐이다.

일단 다시 이설의 생각이 파고들기 시작하니 다른 얘기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여태껏 보였던 태도와는 완전히 다른 눈빛으로 우찬이 날카롭게 물었다.

“비운궁에…… 계시지 않겠습니까?”

그다지 확신에 찬 목소리가 아닌 걸 보니 비운궁을 들렀다 오는 길은 아닌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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