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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121)화 (121/300)

달의 황홀경

121화

일의 사활을 걸고 한 마지막 거래의 끝은 허무했다. 황제는 이번 합궁 기간 동안에도 양 소원을 품지 않았다. 합궁 첫날 단단히 화가 난 기세로 침소까지 들이닥쳐 찢어발기듯 옷을 벗겨내기에 내심 기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양 소원의 봉긋한 가슴이 드러난 순간 황제는 별안간 욕지거리를 하며 준비해 둔 향유와 향초를 모두 던져 침소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급히 옷가지를 챙겨 제 침소 밖으로 뛰쳐나간 양 소원은 자리에 주저앉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늘 차갑고 매정하기만 했지, 황제가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래도 양 소원은 웃었다. 황제의 잇새로 짓이겨 나오는 연이설의 이름이 화병과 함께 산산조각이 나 부서지는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닷새간의 합궁 동안 황제는 양 소원의 손끝 하나 건드리지는 않았지만 아쉬울지언정 분하지는 않았다.

다행히 합궁이 끝난 후에도 황제가 이설을 찾는 일은 점차 줄었다. 양 소원은 이제야 두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겠다며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

그리고 오늘 새벽 태금궁 궁녀의 얘기를 전해들은 것이다.

겨우 마음을 가다듬고 화를 식히려 차를 마시려다 바닥에 나뒹구는 잔을 보았다. 그래서 어차피 짝도 맞지 않을 찻주전자도 바닥으로 전부 밀어 버렸다.

도대체 연이설 그자가 뭐라고, 황제가 이렇게까지 끔찍하게 여기는 걸까. 변변찮은 나라이긴 해도 왕족이라는 신분을 뺀다면 보잘것없는 사내에게 무슨 재주가 있어서 황제를 홀린 것인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런 게 하늘이 정해 준 운명이란 것일까?

하지만 이설은 황제의 이름을 갖지 못했다. 한쪽만 상대의 이름을 가진 경우는 들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양 소원은 두 사람이 천명으로 맺어진 인연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황제의 행동이 더욱 이해되지 않았다.

“마마, 양화성에서 전갈이 도착했습니다. 지금 안으로 들일까요?”

“아버님께 온 것이냐?”

“편장군(偏將軍)께서 보내신 서신입니다.”

“안으로 가져오거라.”

양 소원에게 서신을 건네주고 찻물이 흥건한 탁자를 닦으려던 궁녀가 쫓겨났다. 봉인된 서신 윗부분을 신경질적으로 찢어 열어 본 양 소원은 늘 비슷하게 오는 내용을 예상하며 첫머리를 대충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뻔하게 여긴 서신의 내용은 그녀가 예상하던 바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자세를 고쳐 앉은 양 소원이 그 어느 때보다도 신중하게 한 글자 한 글자를 머리에 담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두 번을 꼼꼼히 서신을 읽고 난 뒤 양 소원은 읽던 서신을 탁자 위에 던지듯 올려두었다. 고인 찻물에 서신이 젖어 들어가며 글자들이 물에 번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글자들이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사라졌지만 양 소원은 이미 젖은 종이에서 끝내 눈을 떼지 못했다.

*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서남 지방의 성주들은 북방 경계 부역 의무에 각 사병들을 차출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러 해 전부터 이는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는 다른 성주들의 의견이 많은지라 양곡세의 인상을……,”

“거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요 대사농(大司農:지방에서 중앙으로 바치는 세금과 양곡을 관리하는 관직)! 병력 차출 대신 서남 지방 성주들에게서 걷는 국방세가 얼마나 되는지 알고서 하는 소리입니까?”

“대사헌(大司憲:사헌부의 수장으로 정 2품 관리)이야말로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흉년이다 홍수다, 갖은 핑계로 몇 해째 양곡세를 반의반 토막으로 내고 있는 거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금국에 흉년이라니, 핑계를 대려면 말이라도 되는 걸 해야지 원.”

“흉년이 뭐가 어쨌다는 겁니까? 올해만 해도 우장절 대비도 없이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얼마나 피해가 막심했는지 알고서나 하시는 말씀입니까?”

“한두 번 오는 우장절도 아니고, 그걸 꼭 대비를 해야 막습니까? 대사헌께서 국정을 논할 자격도 없으……,”

두 무리로 나뉘어 고성이 오가던 가운데 모인 대신들 사이로 저 멀리서 묵직한 것이 날아와 떨어졌다. 당장에라도 가까이 붙어 서로 멱살이라도 잡을 것 같던 대신들이 기겁을 하며 뒷걸음질 치며 장내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그리고 다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쭈뼛거리는 눈치로 몸을 돌려 멀리 용상을 바라봤다.

“계속하지 왜.”

“소, 송구하옵니다, 폐하. 신들의 경망스러운 언행을 부디 너그러이 여겨 주시옵소서.”

“송구하옵니다.”

상서령의 말을 제창하는 대신들의 목소리가 대전을 가득 울렸다.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며 대전 한가운데에 나동그라진 물건을 흘끔거리며 쳐다봤다. 옥좌에 장식으로 놓여 있던 금 거북이 상이였다. 이 무거운 걸 저 위에서 여기까지 던진 것도 환장할 노릇인데, 자칫 맞기라도 했었다간 누가 됐든 황천길 건너는 건 불 보듯 뻔했을 거라고, 모두 같은 생각을 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경망스러운 건 경들인데 왜 내가 경들을 너그러이 이해해 줘야 하지?”

일부러 크게 말하는 소리가 아닌데도 각각의 대신들의 귀에 꽂히는 서늘한 목소리에 다들 흠칫거리며 고개만 아래로 푹 숙였다. 슬슬 조짐이 안 좋아 보이더라니, 오늘이 절정이 되는 날인 줄 알았다면 이리 경망스럽게 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근래의 황제는 늘 기분이 좋아 보였다. 가끔은 조례에 인상을 팍 찡그리며 세상만사가 다 귀찮다는 듯 구는 날도 있기는 했지만 평소의 황제를 생각해 보면 그 정도는 양반이었다.

언젠가는 저 좋은 기분도 끝나겠거니, 대신들이 우스갯소리로 하던 그날이 결국 오늘에야 오고 말았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긴장감에 모두가 얼어붙어 꼼짝도 못 한 지 한참이 지났다. 황제가 팔걸이를 손가락 끝으로 규칙적으로 두드리는 소리가 이유 없이 살벌했다.

“짐의 덕이 부족하여 수신의 노여움을 사 이번 우장절은 각 지방마다 피해가 막심한바. 이를 감안하여 서남 지방의 양곡세는 전 년 대비 이 할 낮은 세율로 거두겠다.”

“화, 황공하옵니다, 폐하. 허나 우장절 피해가 어찌 폐하의 덕이 부족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부디 그런 말씀은 거두어……,”

히죽거리는 웃음을 감추느라 머리를 한껏 조아리던 대사헌이 발치로 날아든 금덩어리를 보고 놀라 까무러치며 뒤로 나자빠졌다. 주변에 서 있던 대신들도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나고 그중 서너 명은 서로의 발을 밟으며 자리에 넘어지고 대전이 다시 한바탕 아수라장이 되었다.

“짐의 덕이 부족한 게 아니라면 서남 지방이 양곡세를 제대로 내지 못할 까닭이 무엇이냐.”

말의 이치가 어찌 그렇게 이어진단 말이십니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말을 속으로만 삼키며 대사헌이 자리에 납작 엎드려 이마를 대전 바닥에 쿵쿵 찧었다. 양곡세는 세법대로 한 치의 어긋남 없이 납부하겠다는 말에도 황제는 마음이 풀린 내색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는 간다는 말 한마디도 없이 대신들 사이를 지나 대전을 나갔다. 황제의 뒤를 따르던 비 승상이 대사헌과 눈이 마주치며 경멸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대사헌은 속으로 이를 바득바득 갈며 저 천한 장사치의 자식 따위가, 하며 욕을 궁시렁거렸지만 곧 제 쪽으로 모여드는 대사농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과 담판을 짓는 게 급선무였다.

*

“태금궁으로 모실까요?”

“소청각 뒤편으로 도는 길로 갈 것이다.”

“예.”

대전에서 태금궁으로 향하는 가장 빠른 길을 두고 우찬은 한참을 멀리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어서 궁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한편 아직 침소에 남아 있는 환각향을 생각하면 머리가 더 지끈거렸다.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는 버릇이 다시 도졌다. 잠잠하던 머리앓이가 시작된 이유를 모르겠다. 그 꿈 따위를 꾸는 것도 아닌데 왜.

“또 머리가 아프십니까?”

뒤편에서 걸어오던 차란이 가까이 다가오며 물었다. 차란이 가까이 오자 뒤를 따르던 윤 내관과 다른 궁인들이 걸음을 늦춰 두 사람의 대화가 들리지 않을 만큼 멀리 떨어져 걸었다.

“왜. 그렇다 하면 또 환각향이라도 피울 셈이냐?”

“……송구하옵니다.”

“내 너를 이 자리에서 찢어발겨 죽여 버려도 시원찮은 참이니 헛소리 말아라.”

머리가 아파 통 잠을 자지 못하겠다는 우찬의 말에 충신 차란이 어젯밤 우찬이 일찍 잠든 사이 환각향을 피웠다. 중독성이 없고 잠에서 깬 뒤에도 별다른 부작용이 없는 귀한 것이라는 얘기를 전하는 차란에게, 우찬은 오늘 아침 진심으로 살의를 느꼈다. 가까스로 참은 충동은 침소를 엉망으로 만들고 침상에 널린 포단을 칼로 난도질을 하는 것으로 겨우 억눌렀다.

어젯밤 혹은 오늘 새벽 비운궁을 다녀왔다. 정확히 무슨 일을 벌이고 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분명 이설을 만났고, 좋은 시간을 보냈던 게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이설의 옷을 강제로 벗기던 장면과 이설의 울음소리가 기억에 선명하다. 빌어먹을. 좋은 일일 리가 절대 없다.

“폐하 그럼 어젯밤 일은 정말 아무것도 기억이,”

“그 입 닥치거라.”

“……예.”

어지간하면 우찬의 눈치를 보고 기어올랐을 차란도 아침부터 내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는 꼬리를 쓱 내렸다. 그리고는 조금 망설이는가 싶더니 다시 ‘폐하’ 하고 우찬을 불러세웠다.

“사냥대회에서 폐하를 습격한 자들을 찾던 중 편국 북쪽 근방에서 반역에 주동이었던 이민족들이 모여 사는 곳을 발견했습니다.”

“반역의 주동?”

“검은 솔개를 이끌고 다닌다 하여 일명 흑연(黑鳶)족이라 부르고 있는,”

“모두 처형되었다 들었는데. 잔당이 남아 있었나?”

“그런 것 같습니다. 나흘간 지켜본 바로는 젊은 사람이나 어린아이는 거의 없고 나이 든 노인만 서른 남짓이라 합니다.”

“후에 위협에 될 소지는.”

“들은 바에 따르면 없습니다. 허나 반역 주동 무리의 잔당을 이대로 그냥 두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말 꺼내기조차 조심스러운 차란의 태도와는 달리 우찬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냥 두어라.”

“그래도 훗날을 위해서라도 미리 손을 써 두시는 것이,”

“두어라.”

“…….”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더 반복하게 할 셈이냐. 그냥 두어라.”

걷던 중 갑자기 자리에 멈춘 우찬이 감정 없이 무던히 말했다. 오늘따라 우찬의 분위기를 더 면밀히 살피던 차란은 우찬의 결정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더 완강히 제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알겠노라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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