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120화
“밤이 깊었습니다, 폐하.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고 내일 해가 뜨는 대로 신첩이 찾아뵙겠습니다.”
울음 섞인 목소리가 나올세라 서러움을 꾹 눌러 담아 또박또박 말했다. 술 냄새가 나지 않는 걸 보니 우찬도 맨정신이 틀림없다. 취기가 오른 탓에 하는 주정이라고 해서 마음이 나아지지는 않겠지만 맨정신에 하는 소리라고 생각하니 더 비참했다.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왔느냐?”
“그런 것이 아니오라, 밤이 너무 깊었으니 폐하께서도 이만……,”
“아니면 나 몰래 여기 숨겨 둔 것이라도 있나 보구나.”
이설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우찬이 뒤를 돌아섰다. 침소를 넓게 한 바퀴 돌며 장을 열어 보고 장막을 들추며 순식간에 침소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잠깐 새에 세간살이가 엉망이 되어 나뒹구는 침소를 둘러보며 이설이 허망한 얼굴을 지었다.
우찬이 자기로 된 화병을 한 손에 들고 이설의 앞으로 되돌아왔다. 화병 아래에 큼지막하게 새겨진 각인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처음 보는 것인데.”
“선물, 받았습니다.”
목 매인 목소리에 사실대로 고할까 말까 하는 고민이 담겨 있었다.
출처를 모르는 게 아니었을 우찬이 실소 후 망설임 없이 화병을 벽 쪽으로 내던졌다. 하얀 자기 조각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놀란 이설이 눈을 질끈 감은 사이 우찬이 한쪽 무릎을 침상에 대고 올라와 이설의 어깨를 눌러 눕혔다. 팔꿈치를 대고 간신히 상체를 버텼지만 위에서 누르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머리가 베개에 닿았다.
“도국인들은 뼛속까지 장사치인 놈들이야. 뭘 받기 전에는 먼저 내어 주는 일이 없지.”
“…….”
“그래서 넌 뭘 주었느냐.”
며칠 전 실수로 창화군의 붓을 부러뜨렸다. 창화군은 나무 진액으로 적당히 붙여 쓰면 된다고 했지만 그게 될 리가 없었다. 저잣거리에 나가 봐도 창화군이 쓰던 붓만큼 좋은 것은 구할 수가 없어서 급한 대로 이설은 차란이 어렵게 구해다 준 붓 한 자루를 빌려주었다. 어차피 요즘 그림 그리는 일도 없고 제 손에서는 이 붓이나 저 붓이나 매한가지라 좋은 붓을 가지고 있을 필요도 없었다.
붓이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창화군이 다음 날 저 화병을 주었다. 도국에서 손에 꼽는 장인이 만들었다는 자부심이 우습지 않을 정도로 색도 곱고 모양도 적당한 것이 꽃을 꽂아 넣기 딱 좋아 보였다. 겨우 화병 하나였다. 받아서 문제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아 기쁜 마음으로 받았다. 저뿐만이 아니라 우 미인 역시 별채를 화실로 쓰게 해 주어 고맙다며 다른 모양의 자기 화병을 받았다.
창화군의 붓을 망가트려 제 붓을 빌려주었다 말하려면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찬은 꼬리의 꼬리를 물고 물을 것이다. 거짓 없이 모두 대답하려면 결국 창화군이 저를 대상 삼아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까지 얘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그림의 목적까지도 남김없이 털어놓아야 우찬을 납득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표정으로 또 어물쩍 넘어갈 생각이구나.”
고민하는 이설의 속내를 오해한 우찬이 손에 힘을 줬다. 손아귀에 든 어깨가 아픈 것보다도 어둠을 등지고 제 위에 올라타 있는 우찬이 무서워서 목이 막혔다.
어깨를 쥔 손을 그만 밀어내려던 찰나에 손이 떨어져 나갔다. 묵직하게 통증이 내려앉은 어깨를 본능적으로 손으로 감싸 쥐려 했지만 우찬이 매정하게 옆으로 쳐 냈다. 가락지에 손등이 길게 긁혀 쓰라렸지만 들여다볼 정신이 없었다. 손을 옆으로 치워 낸 우찬이 이설의 앞섶을 아래로 쥐어뜯듯이 벗겨 냈다.
“폐하!”
잠이 싹 달아난 목소리가 귀를 찌를 듯 시끄럽게 울렸다. 어떻게든 앞섶을 여며 보려는 노력이 무색하게 우찬의 눈앞에 가슴이 훤히 드러났다. 잠깐 사이에 숨이 가빠진 이설이 포단을 끌어다 가려 보려 했지만 우찬이 두 손을 모아 움직이지도 못하게 꽉 쥐어 잡은 탓에 멀뚱히 누워 숨만 몰아쉬는 수밖에 없었다.
우찬이 자신을 억지로 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억하기로는 아주 오래전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그때의 밤처럼.
하지만 우찬은 맹수처럼 달려든 데에 반해 반항심을 상실한 먹잇감을 고요히 살펴보기만 했다. 드러난 가슴이 만족스럽지 않은지 어깨에 아슬아슬하게 거친 침의도 당겨 아래로 끌어 내렸다. 분노로 점철된 눈빛이 맨살 이곳저곳을 샅샅이 훑고 지나갔다.
“일단 여긴 아닌가 보군.”
“…….”
“그럼 여기인가?”
보란 듯이 비웃는 얼굴에 눈만은 섬뜩하게 빛을 냈다. 우찬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덜덜 떨리는 손만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던 이설은 허벅지 안쪽에 느껴지는 냉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간에 손이 닿은 동시에 우찬의 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폐하 어찌 그런 말씀을…….”
우찬이 놓아준 두 손이 자유로워졌지만 손을 써 밀어낼 기운도 다했다. 머리가 멍하게 울려 둔부 사이로 우찬의 손가락이 들어온 것도 몰랐다.
“직접 확인해 보면 알지 알겠지.”
“흣!”
향유도 바르지 않은 맨 손가락이 아래의 좁은 구멍을 거칠게 뚫고 들어왔다. 태금궁에서 첫 밤을 보낸 뒤로도 우찬에게 여러 번 안겼지만 그때마다 우찬이 저 아래를 어떻게 정성 들여 풀어 주었는지 알고 있다. 짓궂게 굴며 이설을 창피하고 당황하게 만들 때는 종종 있었지만 위협하며 겁을 주고 수치스럽게 만드는 일은 결코 없었다.
아무리 겪어도 적응할 수 없는 이질감에 몸이 괴로운 한편, 복잡한 심정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우찬이 지금 하고 있는 행위의 목적을 안다. 다른 이에게, 특히나 창화군에게 제 몸을 내어 주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이설이 눈치가 없기로서니 그것조차 모를 바보는 아니었다.
“힘준다고 감출 수 있는 게 아니니 쓸데없는 짓 하지 말거라.”
“아니, 아닙니다. 흐으……읏, 폐하, 신첩은 그 누구와도…… 하읏!”
“힘 풀래도.”
이설을 흥분시킨다거나 안을 부드럽게 푼다거나 하는 목적이 전혀 없는 손길이었다. 쑤셔 넣은 손가락이 비좁은 안을 헤집어 놓을 때마다 이설이 몸을 이쪽저쪽으로 뒤집어 꼬며 비명을 질렀다.
“아직 이만한 배짱은 없었나 보구나.”
“…하아, 하아…….”
“너나 창화군 그자나.”
“……하아,”
“아니면 우 미인인가?”
우찬의 손가락이 빠져나간 뒤에도 욱신거리는 뒤의 감각이 사그라지기도 전에 앞섶에 예민한 감각들이 되살아났다. 고통도 자극은 자극이라고, 반쯤 세운 성기를 한 손에 쥐어 잡은 우찬이 약한 악력으로 힘을 줘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니 이설이 다시 비명 같은 신음 지르며 자지러지기 시작했다.
“이걸 가진 이상 너도 사내지 않느냐.”
“폐, 폐하… 제발 그, 흐읏! 그으…만……!”
“사내라면 여인을 안고 싶은 게 당연할 터인데, 왜 나는 그걸 몰랐을까?”
“아닙, 니다… 저는……, 신첩으읏…… 하으, 제발 폐하,”
“안기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어?”
귓가에 내려앉는 목소리가 그새 달큰했지만 목소리 따위에 속을 상황이 아니었다. 얼굴을 가까이 댄 우찬의 숨결에서 미미하게 향초 냄새가 났다.
“그래서 우 미인을 안았느냐?”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하는데 아니라고 반박할 기운이 없다. 정신이 쏙 뽑혀 나갈 듯한 자극에 괴롭기만 하면 그나마 나을 것을, 이까짓게 뭐라고 여기에 야릇한 흥분을 느끼는 제 몸이 수치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차라리 죽는 한이 있어도 신음을 참겠다는 의지로 혀를 물어 고개를 베개에 파묻기를 잠깐. 이내 아래로 스며드는 서늘한 공기의 감촉에 정신이 들었다.
반쯤 풀린 눈이 우찬과 마주쳤다. 이설의 눈을 똑바로 직시하며 우찬이 젖은 손가락을 혀로 핥아 올렸다.
“너는 끝까지 아니라고 하겠지.”
“정말 아니…, 아닙니다…….”
쥐어짜 낸 목소리로 이설이 대답했다.
“왜 신첩의 말을 믿어 주시지 않으십니까? ……신첩, 맹세코 폐하가 아닌 다른 이와 정을 나눈 적 없습니다.”
눈물이 줄줄 흐르는 것을 닦지도 못하고 이설이 또박또박 우찬에게 고했다. 한 점 부끄러움 없는 마음을 우찬도 알아 주기를 바랐다. 지금이라도 우찬이 ‘알았다, 내 너를 믿어 주마’ 하고 안아 준다면 오늘 일은 또 다 잊고 넘어갈 수 있었다.
우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가벼워지며 해방감이 들었지만 나아질 기분이 아니었다. 어둠에서 한 칸 멀어진 우찬이 가만히 서서 이설을 내려다봤다. 눈물이 앞을 가려 시야가 흐릿해졌다. 뭉개져 보이는 우찬의 형태가 곧 뒤를 돌아서고 점점 멀어진다. 장지문 밖으로 나가서도 걸음 소리가 들렸지만 이내 사그라졌다.
곧바로 주 상궁이 말 그대로 치맛자락을 붙들고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침상에 널브러진 이설을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이설은 소리 내어 울지도 않고 흐르는 눈물만 계속 손등으로 훔치며 한참을 자리에 누워 있었고, 주 상궁 역시 아무 말 없이 그 옆을 지키고 서 있었다.
밤은 소리 없이 계속 깊어만 갔다.
*
해의 끄트머리가 산머리 위로 겨우 드러난 꼭두새벽부터 양 소원은 의자에 앉아 이를 갈았다.
태금궁에 심어 두었던 궁녀 하나가 새벽 교대 길에 들러 어젯밤 황제가 비운궁에 다녀왔다는 소식을 몰래 전해 주었다. 오래 머물지는 않았지만 태금궁 궁인들은 물론 비운궁의 궁녀들까지 모두 본궁 바깥으로 물리고 이설의 침소로 들어갔다고 하니 마주 앉아 차나 마시다 왔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새벽바람이 찹니다. 창을 닫을까요, 마마?”
“그냥 두고 혼자 있을 테니 모두 나가라.”
내내 기분이 좋지 않은 양 소원의 눈치를 살피느라 가시방석이었던 초간궁의 궁녀들이 조용히 침소를 나갔다. 궁녀들이 나가기 무섭게 양 소원이 마시던 찻잔을 바닥으로 던져 버렸다. 분이 안 풀려 찻주전자라도 던지려고 손을 뻗었다가 마음을 고치고 숨만 씩씩거렸다.
경사방에 뒷돈을 찔러 제 이름이 적힌 패가 뒤집히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늙은 관리는 꼬리가 길면 잡히는 게 당연하지 않겠냐며 몸을 사리는 척했지만 다 같잖은 변명이었다. 어차피 황제도 제가 뒷돈으로 합궁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황제가 그걸 안다는 사실을 자신과 경사방 늙은이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걸 알고 있는 황제가 이 일을 문제 삼지 않을 거라는 것까지도.
그렇게 여기까지 온 거래였는데, 이제 그마저도 끝났다. 어지간한 황궁 관리들은 모두 양 소원을 등지기 시작했다. 마치 황궁 새로운 안주인이 나타나기라도 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