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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118)화 (118/300)

달의 황홀경

118화

“궁 안까지 함께 들어간 것은 아니고 마마를 궁 앞까지 모셔다드린 뒤 창화군은 곧바로 처소로 돌아갔습니다.”

“그딴 건 묻지 않았다.”

나른했던 목소리가 어느새 서릿발이라도 선 것처럼 차고 날카롭게 사내의 귀를 관통했다. 직감적으로 해서는 안 될 보고를 했다는 걸 알아차렸지만 그래도 어쩔 수가 없었다. 루 소의의 하루 일과를 보고 들은 대로 황제에게 낱낱이 고하는 게 사내와 그의 동료들의 임무였다.

“두 사람이 양찬궁 별채 안에서 하는 일은 아직 알아내지 못했느냐.”

“짐작으로는 창화군이 마마의 그림을 그리는 걸로,”

“보고 들은 대로만 말하라. 네놈들 눈으로 두 사람이 그림 그리는 것을 봤느냐?”

“보지 못하였습니다.”

황제가 천천히 술병을 집어 들었다. 날아올 병의 방향을 가늠하며 사내는 본능적으로 어깨를 살짝 틀었지만 예상과는 달리 우찬은 병을 기울여 술잔만 조용히 채웠다. 잔이 다 차고도 그 위로 쏟아지는 술이 흘러넘치며 맑은 소리가 났다.

“창화군 쪽으로 수상한 움직임은 없느냐.”

“전혀 없습니다.”

“연이설은.”

“마찬가지입니다.”

황제의 물음에 하나씩 대답할 때마다 사내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한동안 황제의 기분이 좋았던 터라 이 긴장감을 잊고 있었다.

“교대 인원을 늘려 좀 더 면밀히 지켜보겠습니다.”

지난번 사냥 대회에서 황제를 급습한 자객들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자리를 비운 호위군이 이미 여럿이었다. 교대 인원을 늘리기 위해서는 모두가 수면 시간을 줄여 비운궁에 살다시피 해야 하는 수밖에 없었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황제는 그런 것 따위야 신경 쓰지 않는 듯 반복적으로 술병만 잔에 기울였다. 원하는 것만 알아낸다면 과정이야 어떻든 개의치 않을 주군이라는 걸 사내는 알았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황제에게 더 할 말이 남아 있는지 잠시 기다렸지만 술 따르는 소리만 들리는 게 다였다. 사내는 다시 복면을 쓰고는 자리에서 위로 펄쩍 뛰어올랐다. 순식간에 자리에서 사라진 사내가 떠난 자리로 나뭇잎 하나만 천천히 떨어져 내려앉았다.

다시 찾아온 밤의 고요함을 깬 것은 다섯 병째 술병이 깨져 나가는 소리였다. 우찬은 다음 술을 찾아 손을 뻗었지만 남은 술병이 더 이상 없었다.

“빌어먹을.”

잇새로 새어 나오는 욕지거리는 화를 삭이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술을 있는 대로 마셨지만 취하기는커녕 정신은 점점 더 또렷해지니 미칠 노릇이다. 고작 술병 몇 개를 깨뜨리는 것으로는 터지는 화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이설이 우 미인에게 검무를 배우러 양찬궁에 간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내킬 리는 없었지만 술김에 한 약조를 지키려 애를 쓴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이번 한 번은 잠자코 넘어가 줄 생각이었다.

다른 여인을 안으러 간다는 말을 듣고도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도리어 자신 때문에 액운이 끼면 어쩌나를 걱정하던 이설일지라도 우찬은 그마저도 참고 넘어가려고 했다. 그날 밤 비운궁을 떠나 초간궁으로 향할 때는 화가 머리끝까지 솟아올라 손에 걸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품에 안을 생각이었지만, 곱게 단장을 하고 침상 끝에 앉아 있는 양 소원을 본 순간 그럴 마음이 싹 사라졌다. 그렇게 화가 났으면서도 당장 안고 싶었던 것은 이설 하나뿐이었다.

자신이 양 소원을 안고 왔다고 여겼을 이설은 다음 날에도 변함없는 태도로 우찬을 맞았다. 차라리 서운한 기색을 보이거나 토라져 툴툴거리기라도 했다면 얼마든지 웃으며 받아 줄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이설은 끝까지 그런 내색 한번 없었다.

백번 양보하여 이설의 심성이 곱고 소심하여 내색하지 못한다 칠 수는 있다. 우찬은 이설을 다시 한번 더 그렇게 너그러이 넘어갔다.

그리고 저 몰래 우 미인에게 검무를 배우러 다니는 것이 제법 맹랑하다고 좋게 봐줄 무렵 창화군이 양찬궁에 나타났다.

들은 바에 따르면 이설은 양찬궁 앞마당에서 우 미인에게 검무를 배운 뒤 창화군이 오면 별채로 사라진단다. 두 사람이 거기서 뭘 하는지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고, 창화군의 차림이나 그간의 행실로 짐작컨대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추정된다.

뭐가 어찌 됐든 우찬이 기분 좋게 넘어갈 일만은 아닌 게 확실했다.

분명 이설에게 넌지시 경고를 했다. 눈치 없다 여러 번 핀잔을 준 이설이지만 그때만큼은 우찬의 경고를 정확히 알아챈 듯 보였다. 더 이상 이설의 감시 겸 호위를 맡은 이들에게 창화군의 이름을 듣는 일도 없었다. 예민하게 쓰이던 신경이 그럭저럭 사라져 갈 무렵 이설에게 뒷통수를 맞았다.

차라리 둘이서 역모든 뭐든 작당 모의라도 하면 기꺼이 웃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 쬐끄만 머리통을 굴리고 굴려 나온 생각이라고 해 봐야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그러나 두 사람 간의 정분은 얘기가 다르다.

비웃음으로 무시하려 해 봐도 불현듯 스쳐 지나가는 역겨운 의심이 하루를 망친다. 그리고 나면 이설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아 궁에 가두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는 데에 온 힘을 쏟았다. 한 때는 스스로에게 농담처럼 던졌던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명분만 있다면 당장에라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거기 아무도 없느냐! 술을 더 가져오거라!”

근처도 오지 못하게 하고 한참 동안 술만 마시던 우찬이 갑자기 고함을 쳤다. 궁녀 하나가 허겁지겁 나오다 술을 더 가져오라는 소리에 뒤를 돌아 되돌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궁녀 세 사람이 술병이 담긴 궤짝을 들고 나왔다. 술이 흘러 넘쳐 있고 그릇이 널브러진 술상을 한번 보고는 치워야 하나 머뭇거리다가 멀리서 윤 내관이 냉큼 돌아오라 손짓하는 걸 보고는 급히 자리를 떠났다.

궤짝에서 술병을 꺼낸 우찬은 더 이상 잔도 필요 없었다. 입구 주둥이에 입을 대고 벌컥벌컥 들이마셔도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게 물인지 술인지도 이제는 분간이 되지 않았다.

이설과 마시기 위해 바다 건너 해국에서 들여온 귀한 술이었지만 혼자서는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

“따뜻한 차 한 잔 내어 드릴까요?”

“시원한 걸로 부탁하네.”

“…….”

“왜 그리 빤히 보는가?”

목간에서 막 나온 이설을 주 상궁이 빤히 바라봤다. 헛헛하게 웃으며 묻자 주 상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답했다.

“입궁하셨을 적만 해도 따뜻한 차가 아니면 드시지 않으시던 게 생각나 그렇습니다.”

“그랬었나.”

불과 얼마 전처럼 느껴지던 입궁이 이렇게 생각하니 아주 오래전 일인 것처럼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하기야 생각해 보니 저도 참 까다롭게도 굴었다. 정성을 들여 차려 준 음식들은 못 먹겠다 가려내고, 차 한 잔을 마셔도 꼭 따뜻하게 마시려고 했으니 모시는 궁인들은 얼마나 귀찮았으랴.

젖은 머리카락은 면포로 직접 꾹꾹 물기를 닦던 이설이 예전 생각에 힘없이 웃었다. 축축해진 면포를 주 상궁에게 건네고 침의 위에 장옷을 걸쳐 능숙하게 매듭을 지어 묶으니 이번에는 주 상궁이 미소를 옅게 띠었다.

“이제는 금국 의복도 혼자 잘 입으시니, 세월 참 빠릅니다.”

“입궁한 지 아직 한 해도 지나지 않았다는 거 자네도 알지 않은가?”

“그러게 말입니다.”

주 상궁은 싱거운 웃음으로 대답을 얼버무렸다.

빨랫감을 들고 낑낑거리며 지나가는 연화에게 냉차를 부탁하고 침소로 돌아왔다. 아직 잠들기에 이른 시간이지만 주 상궁이 미리 포단을 정리하고 연화가 가져온 냉차를 탁자 위에 준비했다. 저녁을 일찍 들어 입이 심심하시면 간단한 다과라도 준비해 드릴까 묻기에 그리해 달라 부탁하니 또 웃음을 지으며 밖으로 나갔다.

손조익과의 일이 있은 뒤로 한동안 주 상궁은 이설의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이내 예의 그 주 상궁으로 돌아왔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전보다는 덜 무뚝뚝하고 가끔씩 웃는 모습도 보여 주긴 했다. 하지만 이설과 단둘이 있을 때뿐이었다.

시탁 한가득 다과를 올려서 가지고 온 주 상궁이 그새 빈 이설의 찻잔을 채워 주었다. 이설은 소복하게 담긴 과일들 중 유독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는 금귤 세 개를 빤히 쳐다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린 주 상궁이 알아서 먼저 대답했다.

“오늘 아침 태금궁에서 보내온 금귤입니다.”

주 상궁이 말해 주지 않아도 금귤의 출처야 뻔한 노릇이었다. 황제가 아니라면 이만한 금귤을 받을 곳이 없었다.

“금귤 철은 거의 끝나지 않았는가?”

“태금궁에서도 마지막 남은 금귤이라 합니다.”

“아…….”

“폐하께서 모두 마마께 드리라 하셨답니다.”

찻잔으로 향하던 손이 멈칫했다. 황제가 하사했을 거라는 걸 예상했으면서도 막상 듣고 나니 가슴이 저렸다.

“왜 그러십니까? 또 어디 아프신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아닐세.”

“경연까지 아직 한 달이나 남았습니다. 너무 무리하시면 또 탈이 나실 겁니다.”

엄한 말투로 겁을 주는 주 상궁의 말을 웃어넘기려니 비죽 올라간 입꼬리에 경련이 일어날 것 같았다. 하루 종일 검무 연습을 하랴, 창화군과 그림을 배우랴 정신이 쏙 빠졌다가 궁에만 돌아오면 기운이 탈탈 털린다. 주 상궁은 이게 다 이설이 검무 연습을 너무 열심히 하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정작 원인은 모두 우찬에게 가 있었다.

비운궁 걸음이 좀 뜸하다 싶던 우찬은 요즘 그림자도 비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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