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116화
여기에 황제의 이름 세 글자만 있었더라면.
또 이 생각이다. 불온한 마음이라 목간에서 털어 냈던 욕심이 요 며칠 시도 때도 없이 갈라진 마음의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스스로 죄책감을 극대화하며 헛된 것이라 치부해 버리는 것도 이제는 별 소용이 없었다. 자꾸 욕심이 생긴다.
이설이 원망스러운 시선으로 제 손목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그 뒤편으로 우 미인의 궁녀가 종종걸음으로 급히 다가왔다. 자갈 위를 밟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저……, 창화군께서 별당 전각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 미인의 옆으로 가까이 다가간 궁녀가 이설의 눈치를 보며 나직이 말을 전했다. 창화군이 우 미인을? 이설이 궁금한 눈을 깜빡깜빡 빛내자 우 미인이 난처한 듯 입술을 안쪽으로 말았다.
“내 그 일을 깜빡하고 있었구나.”
“오늘은 긴히 물러가 달라 청할까요?”
우 미인의 혼잣말을 듣고 궁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 미인은 차마 그러라고 하지도 못하고 곤란한 기색이었다.
“무슨 일인가? 창화군이 여기 전각에서 자네를 기다리고 있다고?”
“예. 실은 창화군께서 시간이 나실 때마다 궁에 들려 제 그림을 그려 주고 계십니다.”
평소 모습 같지 않게 부끄러운 듯 양 볼을 문지르며 전하는 말이 예상 밖이기는 했다. 부끄러움을 감출 변명처럼 우 미인은 말을 더했다.
“고향에 계신 조모께서 병상에 누우셨는데 죽기 전에 제가 보고 싶다 하셔 그림이라도 보내 드릴까 하여 부탁드렸습니다.”
“황궁에도 화백들이 많을 텐데 왜 굳이 창화군에게 부탁하였는가?”
“황궁 화백에게 제 초상을 맡기려면 황제 폐하께 허락을 구해야 한다지 않겠습니까. 헌데 제까짓 게 그런 것을 폐하께 청 드리기가 난처하여 그랬습니다.”
“폐하께서 그런 청조차 불허하실 분은 아니실 텐데.”
“그건 알고 있사오나…….”
솔직한 마음을 숨기는 표정이 심히 부자연스러웠다. 말하지 않아도 이설은 우 미인의 속내를 진작 눈치챘다.
대부분의 후궁들은 우찬의 관심 안에 들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을 하는 동시에 우찬을 두려워했다. 우찬의 즉위 이후 황명에 의해 냉궁으로 쫓겨나거나 폐위가 된 후궁이 한 명도 없을 만큼 우찬은 후궁들에게 비교적 너그러웠지만, 그네들의 두려움은 단순히 그런 것에서 오는 것만은 아닌 듯했다. 모두들 우찬의 눈 밖에 나서 아무런 관심조차 받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그런데 여타 후궁들과는 다르게 우 미인은 우찬의 무관심을 자처했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황궁에서 제 존재 자체를 지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을 중심으로 불미스러운 일이 불거질까 저어되어 작은 궁 안에 틀어박혀 숨을 죽이고 살아간다. 그래서 이설은 우 미인이 더 안쓰럽고 마음이 쓰였다. 꼭 입궁 초기에 자신을 보는 듯하여.
우찬이 다니는 길목은 외워 뒀다가 그림자도 내비치지 않을 정도 철두철미한 여인이다. 서신 한 장 보내어 대신하는 청일지라도 원치 않았을 것이다.
“마침 창화군께서 여느 화백 못지않은 실력을 가지고 계셔 염치 불고하고 제가 부탁드렸습니다.”
“맞네. 창화군 실력이라면 우 미인 자네도 예쁘게 담아 줄 테지.”
꽃과 나무 같은 풍경화뿐만 아니라 인물화까지 잘 그리는 실력인 줄 알았다면 진작 배워 봤을 수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허사였다. 창화군이 가르쳐 준 대로 꽃 한 송이를 그려 내는 데에도 몇 날 며칠이 걸렸고 그마저도 우찬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아 관뒀다.
우 미인이 내심 걱정하는 기색으로 폐하께는 말씀드리지 않기를 바라듯 말하기에 이설이 함구하겠다며 웃어 보였다.
“그래서 지금 창화군이 자네를 화폭에 담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이 말인가?”
“예. 사나흘에 한 번씩 궁으로 찾아오시는데 오늘이 그날인 걸 저와 궁인들이 깜빡한 것 같습니다. 아랫것을 시켜 돌려보내 드리는 것은 도리가 아닌지라, 결례가 안 된다면 제가 직접 배웅해 드리고 와도 되겠습니까?”
이설과 창화군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보내야만 하는 우 미인이 내내 고민한 결과 창화군 쪽을 돌려보내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음, 하고 생각을 하던 이설이 반대로 어려운 것을 부탁하는 사람처럼 슬며시 물었다.
“나야말로 실례가 안 된다면 자네 별당 전각에 같이 가도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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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질이란 것은 본디 하늘에서 각 사람마다 그에 어울리는 것으로 꼭 하나씩은 점지해 주었다고 한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소질은 고를 수가 없고, 남의 것과 바꿔 가질 수도 없는 것이다.
이설은 끝내 제 소질을 찾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이것저것 배워 본 것은 많지만 특출난 실력을 뽐냈던 것은 없었다. 그나마 스스로 위안을 주었던 것이 제 손을 닿으면 쑥쑥 자라는 꽃이나 나무였다. 생각해 보면 그것도 소질이라면 소질이었다.
소질이란 것에 적당히 타협을 하며 살던 이설은 입궁 후 다시 한번 커다란 고민에 직면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물만 줘도 탈 없이 잘 크는 꽃을 가꾸는 것이 소질이라고 말하기는 민망하기 그지없다.
창화군이 그리는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이설은 백번 천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그토록 신기하여 놀란 얼굴로 보시고 계십니까?”
“창화군께서도 보세요. 붓 한 자루로 이런 그림을 그렸는데 제가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설이 그림을 뒤로 돌려 두 사람에게 보이며 되물었다. 맞은편에 앉은 창화군이 쑥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가 우 미인과 눈이 마주쳤다. 우 미인은 오랜 시간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던 게 꽤 힘들었던 건지 어깨를 꾹꾹 누르다 이설의 말에 터진 웃음을 참느라 애썼다.
한참을 들여다보고 몇 번을 들여다봐도 감탄을 금치 않을 수가 없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붓 한 자루로 그린 그림이라고는 생각하기는 어려울 만큼 선 하나하나가 세심하고 정교했다.
“우 미인 마마께는 대단히 송구스럽습니다만 그리 감탄하실 만큼 훌륭한 그림은 아닙니다. 황궁의 화공들에 비하면 제 실력이 워낙 미천하니,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송구스럽기는요. 제가 보기에도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한 그림입니다. 보잘것없는 여인을 이토록 아리땁게 그려 주시다니 창화군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좋은 소리를 이설이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바라봤다. 어쩐지 사이좋은 아이 둘의 모습을 보는 기분이 들어 당과라도 있다면 두 사람 손에 하나씩 쥐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우 미인을 따라간 별당의 전각에는 창화군이 그림 그릴 준비를 끝내고 앉아 있었다. 창화군은 오랜만에 본 이설을 유달리 반가워한 뒤 오늘은 해가 지기 전에 그림을 완성해야 한다며 서둘러 우 미인을 앉히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설은 그 옆에 앉아 긴 시간 창화군이 그림 그리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나저나 두 분 다 이리 쾌차하셔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아,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자신이야 그렇다 치고 이설까지 쾌차하여 다행이라는 말을 듣자 우 미인이 의아한 얼굴을 이설에게 돌려 보였다. 마마께서 아프셨던 적이 있었나, 하는 의문을 담은 눈빛이었다. 속으로 뜨끔한 이설이 먼저 얼른 대답한 뒤 우 미인을 보고 미소 지었다. 다행히 우 미인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창화군에게 그림을 배우러 가지 않을 핑계로 가장 만만한 것이 아프다는 핑계였다. 이설이야 대외적으로 몸이 허약하다 알려진 바 있고, 같이 그림을 그리러 다닌 몇 번의 경험으로도 창화군은 이설의 몸이 편치 않다는 사실에 의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니 우 미인과 나타난 이설을 보고 창화군이 대뜸 안부를 물었을 때 이설과 연화 둘 다 당황스러움을 감추기 어려웠다.
“제 그림이 그리 마음에 드십니까?”
“예. 창화군께서 인물화에까지 조예가 남다른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한참 부족한 실력을 이리 좋게 봐 주시니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창화군이 겸손하게 대꾸를 하며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듣던 대로 인품도 바르고 배울 것도 많고 대화도 잘 통해 좋은 벗이 될 수도 있었는데 참 아쉽다. 후궁 된 몸으로써 이 자리에 앉아 지켜야 할 도리들이 있다는 게 가끔은 이런 식으로 우울해진다.
오늘이야 우 미인이라도 함께하는 자리니 무탈하겠지만 창화군과 단둘이 만나는 일은 앞으로도 쭉 어려울 것 같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웃음소리가 잦아들며 창화군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마마를 그려 드려도 되겠습니까?”
“제 초상화를 말씀이십니까?”
“예. 전부터 꼭 그려보고 싶다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곤란하시다면 거절하셔도 괜찮습니다. 황제 폐하의 허락 없이 후궁 마마 님들을 함부로 그리면 안 된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특히나 루 소의 마마 같은 경우에는 더욱 그래서는 안 되겠지요.”
의미심장하게 웃는 미소에 담긴 의미는 어렴풋이 이해가 됐다. 우찬의 극진한 총애를 독차지 하고 있다 오해받고 있으니 이런 얘기를 들을 만도 했다. 황궁은 지금 이설이 황제의 관심 밖으로 쫓겨났다 혹은 아직 더 두고 봐야 한다, 반으로 나뉜 상태인데 아무래도 창화군은 후자 쪽에 의견을 실은 모양이었다. 이설은 따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미소만 지었다.
“고국으로 돌아가실 준비를 하시느라 창화군께서도 바쁘실 텐데요. 저는 괜찮습니다.”
“준비랄 게 뭐가 있겠습니까. 고국에 가져가도 된다 허락받은 물건은 화통 하나가 전부입니다. 챙길 짐도, 인사를 나눌 벗도 없습니다.”
“예, 마마. 창화군께서 도국으로 떠나시면 영영 다시 뵙지 못할 텐데 이런 기회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옆에서 거드는 우 미인 때문에 거절하기 더 난처해졌다. 이설이라고 창화군이 먼저 한 제안을 마냥 거절하고 싶은 것만은 아니었다. 단순히 제 모습을 화폭에 담아내고 싶은 마음이라면 황궁 화백을 불러도 되겠지만 이설은 창화군의 화풍이 마음에 쏙 들었다. 우 미인의 말대로 창화군이 도국으로 떠나면 다시 찾아오지 않을 기회라 마음이 갈팡질팡했다.
역시 폐하께 먼저 허락을 구하고……,
“마마를 담은 한 폭의 그림이라면 폐하께도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흔들리던 마음에 경종이 울리듯 우 미인의 말이 뇌리에 꽂혔다. 아…, 하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는 사이 창화군은 잠정적으로 이설의 대답을 들은 듯 내일 이 시간쯤 여기서 뵙겠다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제 얼굴을 그린 그림을 가지고 있는 우찬의 모습을 상상하니 창화군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아른하게 흩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