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115화
“칼 두 자루 드는 것조차 버겁다 하시니 마마의 평소 생활이 걱정스럽기까지 합니다.”
놀리려 하는 말이라기에는 얼굴에 웃음기가 하나 없었다. 평소 우 미인의 성정으로 볼 때 농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마에 땀을 닦는 척 소매로 얼굴을 가렸다. 아무도 웃지 않는 대신 바닥에 쪼그려 앉아 있던 연화만 깔깔 웃다가 우 미인과 눈을 마주치자 입을 꾹 닫았다. 연화는 무뚝뚝한 우 미인이 무섭단다.
“오늘은 날이 더워 그런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어제도, 그제도 마마께서는 통 기운이 없으셨습니다.”
“딱히 그렇지도 않았는데…….”
말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괜히 뜨끔해서는 우 미인의 눈치를 봤다. 티 내지 않으려 했는데 어제도, 그제도 모두 남들 보기에는 기운 없어 보이긴 했나 보다. 애쓴다고 애써도 없는 기운을 만들기는 어려웠다.
“허면 무슨 고민거리라도 있으십니까?”
우 미인이 이설의 손에 들려 있던 칼 두 자루를 걷어 가며 조심스레 물었다. 눈빛을 보아하니 지레짐작하는 바가 있는 듯하여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고민이라니. 그런 거 아닐세.”
“혹시 폐하께서 초간……,”
우 미인이 말을 하다 말고 주변을 살폈다. 가까이에 연화가, 멀리 우 미인의 궁녀 하나가 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 미인이 손짓하자 뒤를 돌아 조용히 물러났다. 이설도 연화를 물려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눈치 빠른 연화가 물을 채워 오겠다며 수통을 들고 자리를 떠났다.
두 사람만 남고서야 우 미인이 못 다한 말을 다시 이었다. 이설의 기분을 살피며 한껏 낮아진 목소리 때문에 이설이 더 조심스러운 태도로 귀를 기울였다.
“폐하와 양 소원 마마의 합궁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우 미인의 표정을 보니 거의 확신을 하고 묻는 것 같다. 이 얘기를 화두에 올리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데 결국은 이렇게 되는구나. 감출 수 없는 쓴웃음이 도리어 우 미인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변하는 이설의 표정을 보자마자 곧바로 사과를 했다.
“제가 실례되는 얘기를 꺼낸 것 같습니다. 송구합니다.”
“실례일 것까지야.”
“…….”
“허나 그리 달가운 얘기가 아닌 것은 맞지.”
이설은 제 감정에 조금은 솔직해지고 싶었다. 혼자만 꽁꽁 마음을 감춰 두니 체념이 되기는커녕 조바심에 불안감만 속에서 차올랐다. 이 기분을 조금이나마 털어놓을 사람이 황궁에 필요하다면 우 미인이 그 적임자였다.
빤히 쳐다보고 있는 우 미인을 지나 아까 전 궁녀 둘이 낑낑대며 가져다 놓은 의자에 앉았다. 엉덩이가 자리에 닿고 나서야 온몸에 힘이 쭉 빠지며 기진맥진해졌다. 이래서야 궁까지 걸어갈 수 있겠나 싶은 생각이 든다.
곧바로 우 미인이 따라와 건너편에 앉아 냉차를 잔에 따라 건넸다. 달싹이는 입술이 전하려는 말이 쉬운 것은 아닌지 긴 시간 뜸을 들이다 말한다.
“해에 두어 번 정도 신당에서 길일을 점치면 경사방에서 패를 뒤집습니다.”
이설이 찻잔을 양손으로 감싸며 우 미인과 눈을 마주쳤다. 입궁 초 주 상궁에게 들어 본 적이 있는 얘기다.
“무작위라고는 하나 사실 뒤집힐 패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그게 양 소원의 패인가?”
“예. 제가 입궁한 이래 단 한 번도 다른 패가 뒤집혔던 적은 없습니다.”
“그게 어찌 가능한 일인지 나는 잘 이해가 안 되네.”
“든든한 뒷배가 있으니 무슨 일인들 못 하겠습니까.”
씁쓸하게 웃는 얼굴이 잠시 찻잔에 가려졌다 나타났다. 이설과 크게 차이 나지 않는 입궁 날짜지만 이미 황궁 돌아가는 사정에 빠삭해졌을 뿐 아니라 우 미인은 그걸 순리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폐하께서도 분명 이상하다 여기실 텐데 어째서…….”
혼자 중얼거리는 말에 우 미인이 헛바람 소리를 뱉으며 소리 내어 웃었다.
“양 소원 마마가 경사방과 결탁한 것을 폐하께서 모르실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폐하께서는 여지껏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으셨다는 말인가?”
“뒷배가 든든하다는 게 바로 그런 것입니다, 마마.”
“…….”
“허나 한 가지 확실 한 것은 폐하께서도 양 소원 마마에게 특별한 총애를 가지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확신에 찬 눈이 이설을 설득했다. 의문을 가득 품은 짙은 회색빛 눈동자가 조용히 대답을 기다렸다.
“무녀가 점친 길일에는 폐하께서도 양 소원 마마와 잠자리를 갖지 않으신다 합니다.”
“무슨 근거로 그런 소문이 생긴 거지?”
“그 많은 기회가 있었는데도 양 소원 마마께서 수태 한 번 하지 않으신 것부터 다들 이상하다 여겼겠지요. 그러다 초간궁에서 쫓겨난 궁녀 하나가 입을 놀린 모양입니다.”
우 미인이 조곤조곤 이어 가는 말을 듣던 이설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나흘 전 경사방에서 패가 뒤집혔다며 초간궁으로 사라진 우찬은 오늘까지도 보지 못했다. 합궁은 하룻밤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길게는 닷새까지도 이어질 수 있다는 말을, 구석에서 몰래 떠드는 궁녀들을 통해 듣기는 했다. 그냥 제게 화가 나셔서 오지 않는다 생각하는 게 나을 뻔했을 텐데.
사실 어느 쪽이든 이설에게 더 나은 이유는 없었다. 우찬이 제게 화가 나서 비운궁을 찾지 않든, 매 밤을 초간궁에서 보내기 때문에 찾아오지 않든 둘 다 마음은 시렸다.
그런데 정작 우찬은 양 소원을 안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런 것 치고는 저를 보며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태도가 너무 적나라했다. 누군가는 그럴 줄 알았다며 비웃었고, 누군가는 안타까운 듯 혀를 찼다. 그때마다 흡사 황제에게 버림받은 비참한 후궁이 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 너무 속상해하실 것 없습니다.”
긴 침묵을 깨고 우 미인이 대뜸 위로의 말을 건넸다. 우 미인에게 오는 길에 마주쳤던, 이름도 모르고 그저 품계도 받지 않은 저 아래의 후궁이라는 것만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누군가가 제 뒤에서 깔깔거리며 웃던 모습을 생각해 보고 있던 이설이 눈을 꿈뻑 감았다 뜨며 우 미인을 봤다.
“폐하와 양 소원 마마의 합궁은 그저 정치적인 소임입니다. 폐하께서 진정으로 아끼시는 분은 마마 단 한 분뿐이옵니다.”
결국 저를 이렇게 위로하고 싶어서 이 긴 얘기를 꺼낸 것이다.
다들 이런저런 이유들을 하나 이상씩은 갖고 있겠지만 어쨌든 황궁의 거의 모든 후궁들이 저를 곱지 못한 시선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찬이 발도 들이지 말라 엄포를 놓은 탄영당은 사실 요즘 초대받지도 못했다.
그 와중에 우 미인 한 명 만큼은 저를 끔찍이 위해 준다. ‘손아래 막냇동생을 닮으셨습니다.’ 하고 말해 주는 건 아무래도 부담 주지 않으려고 하는 핑계인 것 같다.
“아, 태자 전하도 있으시군요.”
방금 생각났다는 듯 우 미인이 탁자를 탁, 치며 쾌활하게 말했다. 정확히는 쾌활한 척에 가까운 목소리에 억지로 짓는 게 분명한 웃음이었지만 이설은 아무렴 이렇게라도 위로받는 게 좋았다. 제 궁의 사람들은 우찬의 합궁이 이설 앞에서는 절대 꺼내면 안 되는 얘기처럼 쉬쉬하고 이설의 기분을 맞춰 주려 애를 썼다. 하지만 이설 입장에서는 차라리 이렇게 한번 터놓고 얘기를 하니 속이라도 후련했다.
“아무렴 태자 전하와 비교가 되겠는가.”
“하늘이 폐하께 점지해 주신 반려라면 충분하지요.”
순간 미세하게 떨리는 눈동자를 보지 못한 우 미인의 눈을 피해 이설은 찻잔을 감싼 손을 어색하게 마주 잡았다. 손끝이 떨리는 걸 보이지 않으려고 괜히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부산스럽게 굴자 우 미인이 칼 잡은 손이 아직 아프냐며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다 얼버무리며 화제가 바뀌길 바랐지만 이설의 말에 우 미인도 처음에는 어쩔 수 없다며 안쓰럽게 바라보고는 하던 말을 마저 이었다.
“사실 입궁하여 가장 놀랐던 것이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그저 이름인 것을, 다들 어찌나 신성하게 여기던지.”
“자네 부족도 천지명관에 이름을 따로 올리지는 않는가 보군.”
“어디 저희 부족뿐이겠습니까. 열두 이민족 모두가 그럴 테지요. 저도 어릴 때부터 다 미신이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습니다.”
“미신이라기에는 진짜 이름이 새겨지는 사람을 보기도 했을 텐데?”
연국도 이름의 신성함을 크게 떠받드는 풍토는 별로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천명을 미신이라 치부해 버리는 경우는 없었다. 드물기는 해도 실제로 몸의 일부에 타인의 이름이 새겨지는 것을 본다면 미신이라고 생각하는 게 더 어려운 일이었다.
이민족들이 이름을 하찮게 여긴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못 미덥게 여길 줄은 몰랐다.
“억지로 새겼다 여긴 것이지요. 간밤에 자고 일어나니 멀쩡한 손목에 남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걸 곧이곧대로 믿기가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아…….”
“폐하를 보지 않았다면 아마 저도 평생 그리 생각하며 살았을 겁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는데……, 이름을 억지로 새기는 일이 정말 가능한 일인가?”
언젠가 이런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생각났다. 민가에서 성행하는 불법적인 일이라고. 최근에 생긴 문제인 줄 알았는데 오래전부터 암암리에 여기저기서 행해지던 일이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물론이지요. 손목이나 발목, 원하는 곳 어디든 돈만 주면 가능하다 합니다.”
“어디에 가면 받을 수 있는지도 알고 있나?”
“여기저기 없는 곳이 없을 겁니다만 아무래도 규제가 느슨한 편국에 가장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름은 어떤 방법으로 새기는 건가?”
내내 기운 처진 모습으로 앉아 있던 이설이 별안간 눈을 반짝거리며 적극적으로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차분히 하나하나 대답해 주던 우 미인은 이제야 뭔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는지 이설의 눈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의심스러운 눈이 제게 곧게 향하자 이설도 괜히 헛기침을 하 멋쩍게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민가에서 불법으로 이름을 새기는 일 때문에 죽어 나간 사람들이 많다 들었어. 비 승상께서 골머리를 앓고 있다 하기에 도움이 될까 싶어 물어봤네. ……억지로 이름을 새긴다 하니 궁금하기도 하고…….”
제 발 저려 털어놓는 변명에 애꿎은 차란까지 끌어들인 보람이 있다. 우 미인이 이내 납득이 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 또 마마께서 혹시라도 다른 마음을 품고 물으시는 줄 알고…… 송구합니다.”
“……그런 건 아니네.”
“방법은 저도 잘 모릅니다만 시술 중 죽은 사람이 여럿 된다는 얘기는 저도 많이 들었습니다. 몸에 이름을 억지로 새기는 일이니 보통 위험한 일이 아닐 거라 짐작만 할 뿐입니다.”
우 미인의 말대로 시술 중 죽는 사람이 생길 정도라면 그리 간단한 방법은 아닐 것이다. 억지로 상처를 내 봤자 시간이 지나면 아물기 마련이고 원하는 만큼의 선명함을 가지기도 힘들 텐데.
이설에 탁자 위에 놓인 양손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사내 손이 저보다 더 고우면 어쩌냐고 농담을 하던 우 미인의 말처럼 희고 곱다. 누구의 이름이든, 희미한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