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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113)화 (113/300)

달의 황홀경

113화

금국에 나름 오래 지내고 있어도 어딜 가나 듣는 말은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 피부가 곱고 하얗다는 말도 그렇고 머리카락 색깔이 신비롭다는 말도 그렇고 들을 때마다 낯간지러워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좋은 뜻으로 드리는 말씀이니 그리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겸연쩍어 웃기만 하는 이설을 알아챈 우 미인이 부담을 덜어 주며 말했다. 이설은 가슴 아래로 내려온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리며 입술 끝만 삐죽였다. 어렸을 적 이후로 이렇게까지 길게 길러 본 적 없는 머리카락이 너무 거추장스럽다. 길이가 점점 길어질수록 사람들 눈에도 쉽게 잘 띄는 것 같다. 아무래도 우찬은 그 점이 마음에 들어 머리를 자르게 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콜록 콜록.

간간이 터지는 마른기침이 유독 크게 트였는지 우 미인이 한참 동안 기침을 하다 이내 안정을 되찾고 두 잔이나 차를 연달아 마셨다. 힘없는 미소로 사과하는 우 미인에게 이설이야말로 미안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픈 사람에게 괜한 것을 청한 것 같아. 자네 정말 괜찮은가?”

“저는 괜찮으니 심려치 마시옵소서.”

“아니야. 다시 생각해 보니 내가 너무 염치없는 부탁을 한 것 같아. 나야말로 괜찮으니 오늘 내가 했던 말은 그냥 잊어 주게.”

“그럼 폐하와의 약조는 어쩌하시고요.”

우 미인의 말에 이설이 앓는 소리를 내며 입을 꾹 다물었다. 몸도 좋지 않은 우 미인을 보니 맘이 편치 않았지만 황제에게 큰소리 떵떵 쳤던 약조를 생각하면 우 미인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설마하니 양 소원 마마와 함께 가면무라도 추실 생각이십니까?”

허를 찌르는 말이었다. 궁리를 해 봐도 도통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 굴복하며 끝내 ‘그럼 잘 부탁하네’라며 이설이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염치 불고한 부탁인 걸 뻔히 알면서도 쉬이 거두지 못하는 제 신세가 처량했지만 다 제 탓인 것을 어쩌나 싶다.

“제 몸이야 나아지고 있으니 마음 쓰실 것 없습니다. 사실 어디가 아팠던 것도 아니고…….”

“응? 아팠던 게 아니라고?”

작은 소리로 흘리는 말이니 꼭 이설이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냥 못 들은 척 지나치기에는 그 표정이 너무 씁쓸해 보여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급격히 어두워지는 우 미인의 얼굴을 보니 무슨 일이 있기는 있는 듯싶다.

“별건 아닙니다만……. 얼마 전 고향에 있는 오라버니가 크게 다쳐 아직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서신을 받았습니다.”

“오라버니가?”

“소식을 들은 이후로 제 몸 상하는 것도 모르고 이리되었습니다. 끼니만 잘 챙겨 먹는다면 곧 쾌차할 테니 마마께서도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몸에 힘이 없고 낯빛이 좋지 않았던 건 단순히 끼니를 걸렀던 것뿐만 아니라 마음의 근심이 무거웠기 때문인 것 같다. 애써 웃으며 염려하지 말라는 말에도 아직 불안함이 한 짐이었다.

“자네도 걱정이 많겠어.”

“그래도 그제 받은 서신을 보니 치료에 차도가 있는 듯합니다.”

“다행이군. 헌데 오라버니께서는 무슨 일로 그리 크게 다치신 건가?”

순간 흔들리는 우 미인의 눈동자가 갈 길을 잃고 헤매다 이설의 시선을 빗겼다.

“사냥을……, 사냥에 나가셨다가 낙마 하셨다 합니다.”

자리에 몸져누워 있는 오라버니 생각에 감정이 복받치는지 우 미인이 울먹이는 목소리를 억지로 꾹 삼켜 냈다. 가족과 생이별을 하여 타지에 나온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설이라 그 마음이 십분 이해가 됐다.

이설도 우장절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연국 궁들 중 한 곳에 화재가 났다는 서신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한밤중에 인적이 드문 곳에서 발생한 화재라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고향 땅의 좋지 못한 소식을 서신으로만 받아 본다는 사실 자체가 며칠 내내 기분을 울적하게 했다.

“혹시 내가 도울 일이 있다면 뭐든 사양 말고 말하게.”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한껏 우울해진 분위기를 바꿔 보려는지, 우 미인이 지난 서신과 함께 온 것들이라며 커다란 함 하나를 가져왔다. 걷는 것도 휘청휘청 불안한 여인이 제 몸집만 한 함은 번쩍 드는 게 다 신기할 지경이었다.

우 미인은 함 안에 든 약초며, 찻잎이며 제 부족민들이 오악산 가까이에서 구해 온 것들을 바리바리 챙겨 줬다. 청을 하러 오면서도 빈손으로 찾아온 이설이 다 민망해질 정도로 싸 준 보따리가 한 짐이었다.

싸 준 보따리를 주 상궁과 나란히 손에 들고 돌아온 이설은 가져온 것들의 정리를 아이들에게 맡기고 주 상궁을 안으로 불러들였다.

“우 미인의 고향에 사람을 좀 보내고 싶네만.”

“도국의 양화성에 말씀이십니까?”

“도국이라고? 금국이 아니라?”

“일단 영토상으로는 도국 땅이 맞습니다만 북방 경계령에는 저희 금국 병력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살고 있는 도국인들도 거의 없고요. 참고로 양화성 지역 군사 책임자가 양 소원 마마의 부친이신 우장군 원후연입니다.”

듣자 하니 우 미인이 왜 양 소원 앞에서 그리 어깨도 못 펴고 항상 기가 죽어 있었던 건지 알 만도 했다. 단순히 제 행동거지가 누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애를 쓰는 줄 알았는데 이 정도면 제 부족민들 목숨 줄을 양 소원에게 맡겨 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양 소원 말 한마디에 부족의 흥망이 달린 셈이었다.

주 상궁의 말을 듣고 나니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좀 더 빨리 알았더라면 도울 수 있는 다른 방도를 찾아봤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무튼 거기 살고 있는 우 미인의 오라버니가 크게 다쳤다고 하니 약재라도 좀 보내 줄까 싶어. 내가 오늘 우 미인에게 큰 빚을 지지 않았나.”

흔쾌히 제 부탁을 들어준 우 미인에게 은혜를 갚을 게 무엇이 있을까 돌아오는 길에 생각해 봐도 이보다 우 미인에게 필요한 게 없는 것 같다.

군말 없이 알겠다 좋은 약재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대답할 줄 알았던 주 상궁은 자리에 말없이 서 있기만 했다.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 심각해 잠자코 기다리고 있으니 곧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도국 양화성은 사람이 쉽게 드나들기 어려운 지역입니다.”

“어째서 말인가?”

“말씀드렸다시피 군사 경계령인 데다가 이민족들의 지정 거주지역이라 외부인의 출입이 까다롭습니다. 북쪽 산맥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산길이라면 모를까, 도국을 지나는 길로는 사람을 보내기 어려울 겁니다.”

북쪽 산맥에서부터 산길을 따라 내려오는 길이라….

주 상궁의 말을 곱씹으며 이설은 일단 주 상궁을 밖으로 내보냈다. 홀로 남은 침소는 하루 종일 시끌벅적하더니 이제야 고요해졌다. 땅거미가 내려앉은 창밖은 아까보다 한층 더 어둑해졌다. 슬슬 우찬이 올 때가 됐다.

바람은 불지도 않는데 괜히 서늘한 바람 탓을 하며 양팔을 문지르다 자연스럽게 창을 닫았다. 침소를 한 바퀴 돌며 창문을 모두 닫고 나서야 유강을 안으로 불러들였다. 요즘 기초 검술 훈련에 맛을 들인 유강은 해가 질 때쯤에나 녹초가 되어 궁에 돌아왔다.

오늘따라 격한 훈련이라도 했는지 입술가가 터져서 들어온 유강은 어리광을 부려 보려다가 이설의 심각한 얼굴을 보고는 댓 발 튀어나온 입술을 안으로 쏙 넣었다. 그리고는 이설이 급하게 휘갈긴 서신 한 장을 품에 고이 넣고 침소를 나갔다.

유강이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우찬이 찾아왔다. 답답하게 창은 왜 이리 다 닫아 놓은 거냐는 말에 이설은 대꾸 없이 웃으며 다시 온 창을 열었다. 후원으로 향하는 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동시에 나뭇가지 하나가 크게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바람에 흔들릴 만큼 가는 가지도 아니었고, 바람 한 점 없는 날이었다.

하지만 이설은 못 본 척 눈길도 주지 않고 등을 돌려 우찬이 기다리고 있는 침소로 들어왔다.

“오늘 어디 나갔다 들어왔느냐?”

“잠시 볼일이 있어 우 미인 궁에 다녀왔습니다.”

“무슨 볼일?”

“우 미인 몸이 좋지 않다 하여 안부차 들려 봤습니다.”

사람을 붙여 놓았다면 거짓을 고한다는 걸 우찬도 알 테지만 크게 꾸짖지는 않을 것이다. 술김에 떤 허풍을 수습하려 우 미인까지 찾아간 저를 놀리면 놀릴 테지. 설령 운이 좋아 오늘 사람을 따로 붙여 놓지 않아 들은 바가 없다면 이설이 거짓을 고하는 건지도 알지 못할 테니 아무렴 상관은 없었다.

“그래?”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뜨는 모습을 보니 오늘 우찬의 기분이 영 좋지 않은 듯했지만 풀어 줄 방법을 아는 것도 아니라 복잡한 마음에 그냥 예, 하고 대답만 하고 말았다. 우찬은 탁자에 찻잔을 빙그르르 돌리다가 힐끗 이설을 보더니 말이 없었다.

“오늘 태자 전하께서 다녀가셨습니다.”

“태자가?”

“학운관에 가기 전 잠깐 들르신 것뿐이니 전하의 글공부는 너무 걱정 마시옵소서.”

“걱정은 이제 태자가 해야지.”

“예?”

“혼자 한 말이다. 신경 쓰지 말거라.”

이설이 아무리 말주변이 없어도 말을 꺼내면 이런저런 얘기도 먼저 물어봐 주며 담소가 오갔는데 오늘따라 우찬은 말을 아꼈다. 대답을 해도 모두 단답형이다. 이걸 했느냐, 저걸 했느냐, 왜 그랬느냐, 이설이 난처해하면 할수록 더 집요하게 묻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이설이 하는 말만 고개를 끄덕이며 성의 없이 듣는 게 다였다.

“폐하, 존체 강녕하시온 게 맞사옵니까?”

“갑자기 그건 왜 묻는 것이냐?”

“오늘따라 유독 기운도 없어 보이시는 것이, 신첩 염려스러워 여쭤봤습니다.”

우찬이 피식 웃음소리를 내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반질반질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쓸려 넘어갔다.

“그런 것 없다.”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고 우찬이 딱 잘라 대답했다. 그런데 왜 그리 기운이 없으신 건지, 기분이 좋지 않은 건지 궁금했지만 우찬의 기분이 좋지 않은 게 뻔히 보이니 그걸 묻기도 난처했다.

“저녁 수라는 드시고 오시는 길이십니까? 지금 준비하라 이를까요?”

이쯤 시간에 오는 우찬은 늘 비운궁에서 저녁을 함께 먹으니 형식상 물은 것이었다. 밖은 아마 우찬의 수라상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설의 예상과 달리 우찬은 짧게 고개를 저었다.

“수라는 됐다. 오늘은 다른 곳에서 들 테니.”

“태금궁 말씀이십니까?”

우찬이 잠시 뜸을 들였다. 무표정한 얼굴에 담긴 불쾌함이 꼭 저를 향한 것 같아 이설은 오랜만에 황제에게 겁을 먹었다.

“경사방에서 패가 뒤집혔다. 오늘은 초간궁으로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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