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109화
“너를 탓하는 게 아니니 겁먹지 않아도 된다.”
풀어진 우찬의 목소리에 이설이 뻣뻣하게 굳었던 어깨에 힘을 풀었다. 우찬이 찻잔을 밀어 권했지만 이설이 작게 고개를 저어 거절했다. 말을 못 했을 때 생긴 사소한 버릇이 아직도 남아 있었지만 우찬은 그 행동을 지적해 본 적은 딱히 없었다.
“그래서 너는 뭐라 대답했느냐?”
“신첩은 폐하께서 원치 않으시는 이상 황후가 될 수 없다 대답하였습니다.”
망설임 없이 이설이 대답했다. 어차피 본궁으로 돌아가면 두 사람의 담소를 엿들었을 호위군에게 보고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이깟 것으로 거짓을 고했을 것 같다는 의심도 들지 않았다. 이설이 제게 거짓말을 하다니. 이쯤 봐 오니 그게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 알 것 같다.
“그 말은 내가 원한다면 언제든 황후가 되겠다, 이 말인가?”
“폐하께서 명하시면 저는 그리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나는 네 생각을 묻는 것이다.”
“앗, 저는…….”
별로 어려운 것을 물은 것도 아닌데 이설이 당황했다. 평소에 이런 생각을 전혀 해 본 적이 없는 건가. 애초에 제게 이름을 준 정인으로 황궁에 데려온 것인데 아무리 자리에 욕심이 없어도 그렇지 정2품 소의 자리에 군말조차 안 하는 게 이상할 지경이다. 체면이 있어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더라도 저 혼자서는 바랄 법하지도 않은가. 못해도 귀비 정도는 받아야 했다는 억울함을 토로는 못 할망정, 이걸 고민이라고 하고 있다니.
“이게 그리 어려운 질문인지 모르겠는데.”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이라 잘 모르겠습니다.”
“주면 받고 안 주면 그만이다, 뭐 그런 것이냐?”
아닌 건 아니라고 단호한 이설인데 이건 딱 잘라 대답하지를 못한다. 눈을 도르르 굴리다가 우찬과 눈이 마주쳤다. 짧은 탄식이 터졌다.
“폐하께서 다른 목적으로 저를 궁에 데려오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설에게 직접 듣자하니 기분은 찜찜했지만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었다.
“제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도 제 마음을 잘 모르겠습니다.”
제게 솔직하게 대답하는 것은 그것대로 대견한 일이지만 이렇게까지 욕심 없는 속내를 듣는 것이 썩 유쾌하지는 않다.
우찬은 이런 종류의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누구나 욕심이 있다. 청렴과 결백의 표본이라 칭송받는 소운도 사실 차란 하나를 갖지 못해 속이 썩어 들어가고 있다. 아무리 가진 게 많아도, 높은 자리에 올라가도 탐욕은 끝이 없다.
탐욕스러운 인간을 혐오하는 것은 아니다. 갖고 싶은 게 분명한 사람을 다루는 것은 쉽다. 원하는 것만 계속해서 채워 준다면 손 위에서 굴리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다.
“그 자리가 욕심이 난 적도 없고?”
“예. 애초에 제 것이었던 자리도 아니니까요.”
정말로 다루기 힘든 건 이런 유형의 사람이다. 욕심이 없다 말하는데 그 말에 한 치의 의심도 들지 않는다.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너를 황후로 추대하기 위해 황궁에 데려온 것이었다.”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네 자리였다는 소리다.”
“허나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시고 제게 소의 첩지를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럼 여기가 제 자리인 거지요.”
틀린 말을 하는 건 아닌데 묘하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애당초 황후 자리를 약조해 놓고 고작 소의 첩지를 내린 자신을 은근히 탓하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제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똑 부러지게 말하는 태도가 기특하다. 가만 보면 처음 황궁에 왔을 때보다 분위기가 많이 변하긴 했다. 여기저기 눈치를 살피느라 오므라진 어깨나 내리깐 눈은 요즘 보기도 힘들었다. 가끔씩 우찬이 무표정으로 빤히 쳐다볼 때면 흠칫 놀라기도 했지만 그게 별 의미가 없는 행동이라는 걸 알고 나면 그리 쳐다보지 마시라고 볼멘소리를 토하기도 했다.
적당한 때가 오면 이설의 품계를 올릴 생각도 하고 있었다. 이미 세간에 황제의 총비라 소문이 자자한 터라 품계가 이제 와서 이설의 체면에 무슨 도움을 주겠냐만은 그래도 정2품 9빈 자리는 초라하다. 서열상으로는 더 높다 해도 아무렴 양 소원의 품계와 같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황후의 자리는 시기상조다. 뒷일을 계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설을 곁에 두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해서 계획했던 일을 꼬이게 하고 싶지는 않다. 귀찮은 건 딱 질색이다.
“신첩이 틀린 말을 하였습니까?”
“……아니다.”
“폐하 표정이 조금…….”
“네 말이 모두 맞아 내가 할 말이 없어서 그런 거니 신경 쓰지 말거라.”
“예.”
전 같았으면 ‘그래도…….’ 하고 걱정스럽게 쳐다보거나 우찬의 눈치를 슬금슬금 봤을 이설인데 이제는 그러면 그런가 보다, 하고 태평히 어질러진 서책들을 모아 쌓았다. 물끄러미 보고 있으니 ‘재미없는 서책이었습니다.’ 하고 울상을 지었다. 황후에 대한 얘기는 그걸로 끝이었다.
매일같이 보는 데도 만날 때마다 궁금한 것들이 생긴다. 오늘은 찬으로 무얼 먹었는지, 어느 꽃에 물을 주었는지, 누구를 만나 어떤 얘기를 나눴는지, 그림 연습은 잘되어 가는지 모두 궁금하다. 할 일이 많아 요즘은 천자 공부를 게을리 하는 것 같다. 오늘은 천자를 몇 자나 외웠느냐, 하고 물으면 어물쩍 대답을 넘어가는 게 일쑤였다.
“매일 공부는 하고 있습니다만 연국에서 배웠던 것과 모양도 많이 다르고 아예 처음 보는 글자들도 많아서……. 송구합니다.”
하루가 다르게 야무진 구석이 늘어나는 이설이 아쉬워질 때쯤이면 일부러 대답이 뻔히 정해진 것을 묻곤 했다. 어울리지도 않는 변명을 웅얼거리며 기가 죽는 모습을 보면 쓸데없이 웃음이 났다.
“그림을 그리는 것만큼이나 천자 공부에도 재미를 붙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송구합니다.”
이설이 천자 공부를 열심히 하든 말든 사실 우찬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천자를 더 많이 안다고 해서 이설의 황궁 생활이 빛을 발할 것도 아니다. 우찬은 그저 제 앞에서 풀이 죽어 앉아있는 이설의 동그랗게 말린 어깨가 보기 좋았다.
“그토록 열을 다하는 네 그림은 언제쯤에나 볼 수 있느냐?”
“아직 한참은 더 걸릴 것입니다. 그래도 창화군께 잘 배우고 있으니 내년……,”
“요즘 창화군을 매일 만난다지?”
우찬이 미묘하게 날카로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주변의 공기가 갑자기 서늘해진 것 같았지만 이설만은 느끼지 못한 듯 들뜬 목소리에 변화가 없었다.
“예. 조금씩이더라도 그림은 매일 그리는 버릇을 들여야 실력이 느는 것이라 들었습니다.”
“누가 그런 소리를?”
“창화군께서 하셨습니다.”
볼모 인생 말년에 이설 하나 잘 만난 창화군은 요즘 황궁 여기저기 못 다니는 곳이 없게 됐다. 일 년 중 짧은 기간 동안 지정된 처소 밖으로 외출이 허락이 된다고는 하지만 타국의 왕족이 감시 없이 오갈 수 있는 곳은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그런데 그림 실력은 다소 모자라도 의욕만큼은 누구보다 앞서는 이설이 황궁 이곳저곳 경치 좋다 소문난 명소를 찾아다니며 창화군을 끼고 다니고 있다. 덕분에 창화군만 신이 난 셈이다.
사실 두 사람 모두 신이 났다. 불쾌한 건 우찬뿐이었다.
“요즘 매일 창화군을 만나는 것 같던데.”
“예. 소운 님이나 비 승상께서는 거의 찾아오지 않으시고 우 미인도 얼마 전부터 지독한 고뿔에 걸려 만나기 어렵습니다. 창화군이라도 자주 찾아와 말동무가 되어 주니 좋은 것 같습니다.”
제 궁에 말 많은 궁인들이 얼마나 많은데 창화군을 말동무를 삼을 생각을 하는 건지. 것보다 여태껏 참고 있던 우찬이 일부러 창화군의 이름을 꺼냈다는 것에도 이설은 아무런 위기감을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여태껏 비운궁의 문턱을 주기적으로 넘는 외부인은 기껏해야 너덧 명 정도였다. 우찬과 차란, 소운과 태자 그리고 우 미인. 황제의 후궁 된 처지로 서로 친하게 지낸다는 명분이 그럭저럭 납득이 되기는 했다. 듣자하니 우 미인 부족의 거주 지역이 연국과 맞닿아 있어 만났다하면 고향 얘기에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떠든다고 한다.
처지가 같다고 하여 두 사람의 친분이 우찬에게 마냥 아름다워 보일리만은 없었다. 같은 후궁이기 이전에 사내와 여인이었다. 경사방에서 준비한 패 중 우 미인의 것이 뒤집힌 날은 어김없이 우 미인이 고뿔로 앓는 날이었다. 어쩌다 마주쳐도 좋은 내색 한 번을 보인 적이 없는 우 미인이 이설에게만큼은 그리 살갑게 굴 수가 없다. 그 꼴이 점점 거슬리던 차에 창화군이 등장했다.
만나는 이가 사내라면 신경이 덜 쓰이겠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어차피 이설이 자신 외에 누구를 만나든 우찬은 기분이 썩 좋지는 못했을 것이다.
창화군이 사내인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성별을 떠나 이설은 황제의 후궁이었고, 창화군은 그저 외간 사내였다. 우 미인까지는 어떻게 참아 본다지만 창화군까지 참을 필요는 없었다.
“나는 참 너그러운 지아비이다.”
“예?”
이설이 ‘별안간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라는 말을 얼굴로 전하는 대신 물었다. 우찬은 괜스레 피어오르는 짜증을 숨기려고 웃어 보였지만 이미 가라앉은 기분에 나오는 웃음이 좋게 보일 리는 없었다.
“외간 사내가 내 후궁의 대문턱을 드나드는 걸 여태 눈감아 주고 있잖느냐.”
빙 둘러 말해 봐야 이설은 뭐가 뭔지도 모른다. 똑똑한 것 같은데 어딘가 모자라고, 모자라다 싶으면 눈치가 제법이다. 어쨌든 이 정도로 대놓고 말을 해 주면 못 알아들을 천치는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곱씹어 생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설의 얼굴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뭘 잘못했는지 깨달은 표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