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108화
이설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조익이 자리에 앉아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다 이설을 따라 일어났지만 물러날 생각은 없어 보였다.
활짝 열린 창 너머로 나무 한 그루가 있다. 물끄러미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괜히 천장 구석도 한번 흘끔 올려다봤다. 그저 텅 빈 천장이다.
손조익은 여러 감정이 뒤섞인 얼굴이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분개함과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체념과 침착함. 이설이 당장 읽을 수 있는 건 이 정도였다.
“그나저나 변복은 하지 않으셔도 됐을 걸 그랬습니다.”
곱게 손조익을 돌려보낼까 했던 이설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가까이 다가갔다. 키가 우찬만큼은 아니지만 금국 사내들치고도 큰 편이다. 어깨가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 멈춰 서서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손조익의 귓가에 이설이 무척 가까웠다.
“태부를 좇는 감시는 변복으로 어떻게 따돌리셨을지 모르겠지만 저도 감시가 아예 없는 편은 아니라.”
“…….”
“폐하와 천명으로 맺은 정인을 찾아오시는데 너무 안일하셨습니다, 태부.”
내리깐 눈에 슬쩍 웃음을 흘리며 이설이 손조익을 지나쳐 걸어 장지문을 손수 열었다. 뒤돌아보니 손조익이 정승처럼 자리에 서서 이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설은 그 시선에 담긴 감정과 의미를 잘 알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가슴 한편이 후련해지기는 했다.
얼떨떨한 얼굴로 손조익이 방을 나갔다. 문 앞에는 아직 주 상궁이 있었다. 굳은 얼굴에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설이 그 옆을 스쳐 지나가며 나지막이 말했다.
“따라오게.”
*
“얘, 화홍아. 너 꽃신 새로 샀니?”
주 상궁이 시킨 대로 도월소에 물을 퍼다가 대문 앞 흙밭에 고루 잘 뿌리고 돌아가는 길에 연화가 화홍에게 물었다. 종일 보고 있을 적에는 몰랐는데 이제 보니 홍사로 꽃이 촘촘하게 놓인 새 신이다.
치마 자락을 들고 총총 걷던 화홍이 놀라 발을 내려다보고는 부리나케 치마를 내렸다. 새침때기 표정을 짓는 얼굴이 답지 않게 어색했다.
“어? 어……, 이거? 이거, 그, 전부터 있던 꽃신인데.”
거짓말을 하는 데에는 영 소질이 없는 화홍의 부자연스러운 걸음걸이에 단향이 코웃음을 쳤다.
“전부터 있기는 무슨. 너 그거 지난번에 기연 님이랑 장에 나갔다가 사 온 거잖아.”
“뭐? 우리 같은 것들이 녹을 받으면 얼마나 받는다고 꽃신을 사! 철 좀 들어라!”
“연화 너도 참 모자라다, 모자라. 화홍이 쟤가 무슨 돈이 있다고 꽃신을 샀겠니?”
짐짓 뭔가를 다 알고 있는 척 단화가 새초롬한 표정으로 거들먹거렸다. 연화는 그 소리를 듣고 얼마 안 있어 양손에 든 바가지 두 개를 부딪치며 깔깔 웃었다. 화홍은 아무 말 없이 이를 악물고 동이를 번쩍 들었다.
“상궁 마마한테 이르면 너희 둘 다 죽을 줄 알아라!”
그리고는 냅다 대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빈 동이이긴 해도 보통 무거운 게 아닐 텐데 역시 힘이 장사다. 어쩌면 화홍이 기연의 멱을 잡고 당장 이 꽃신을 사 주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위협을 가했을지도 모른다. 화홍은 보기보다 불같은 성미가 있었다.
깔깔 웃는 단향과 연화는 바가지를 챙겨 들고 궁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나저나 좋을 때다. 제 상전의 마음만 꽃밭인 줄 알았더니 여기저기 마음마다 꽃이 안 핀 곳이 없었다. 이러다 정식 궁녀가 되기 전에 다들 궁을 나가 버리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연화는 궁을 나가면 갈 곳이 없었다.
“단향아.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나랑 같이 황궁에서 늙어 죽어야 한다, 알았지?”
별안간 헛소리를 하는 연화에게 단향이 인상을 쓰며 바가지에 남아 있던 물을 연화 얼굴에 흩뿌렸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여기 문이나 열어라.”
“마마는 아직 안에 계신가? 근데 도대체 누구랑 담소 중이신 거야?”
연화가 문을 붙잡고 있는 동안 단향이 바가지를 차곡차곡 정리하며 심드렁히 대답했다.
“몰라. 얼핏 보니 사의시 의원이었던 것 같은데, 처음 보는 얼굴이었어.”
“마마께서 몸이 안 좋으신가. 요즘 상궁 마마도 궁 밖에 있는 약방에 자주 가시지 않아?.”
정리를 마친 단향이 밖으로 나오고 연화가 문고리를 걸어 잠갔다. 괜히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걱정하는 연화와 달리 단향은 별다른 생각이 없는 듯 고개만 갸우뚱했다.
“그런가? 마마를 모시는 동안 지금만큼 건강하셨던 적이 없으신 것 같은데.”
“그렇긴 한데 그래도 주 상궁 마마가 매번 직접 약방에 다녀오시니까.”
단향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주 상궁이 매번 궁밖에 있는 약방까지 다녀오는 걸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거 같다. 항상 찜찜하던 차에 사의시 의원까지 온 걸 보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다.
“재수 없는 걱정 말고 이거나 먹어라.”
단향이 핀잔을 주며 소매 품에서 한지에 싼 당과를 주었다. 금세 입꼬리가 올라간 연화가 막 겉싸개를 벗기던 때였다.
“궁에 사의시 의원이 다녀갔다고?”
“에구, 깜짝이야!”
등 뒤편에서 들리는 음산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연화가 깜짝 놀라며 들고 있던 당과를 떨어뜨렸다. 시커먼 그림자가 두 사람을 삼키기라도 할 것처럼 높이 서 있었다.
“어디 다치기라도 했느냐?”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이 제게 물었지만 제 걱정을 해 주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못지않게 놀란 단향이 머리만 조아리고 있는 동안 연화가 놀란 마음을 진정시켰다.
처음 뵙는 용안도 아닌데 뵐 때마다 이리 무섭고 아름다우시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이설의 아래에서 궁 생활을 하려면 이제 그만 이 용안에 적응을 해야 하는데 그런 날이 올까 싶다.
것보다도 흑의를 입은 황제가 왜 궁 안 뒤편에 있었던 건지 모르겠다. 뒷문은 경비 목적으로 모두 걸어 잠가 놓아서 밖에서는 안으로 걸어 들어올 수 없었다.
“아닙니다. 마마께옵서는 존체 무탈하시옵니다.”
“안에 있느냐?”
“예.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됐다.”
간결한 거절과 함께 황제가 두 사람을 지나쳐 갔다. 황제의 걸음 소리에 단향이 겨우 고개를 들어 올리고 긴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서로 마주 보는 얼굴에 방금 전 일에 대한 당혹감이 같은 표정으로 피어올랐다.
그리고는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넓은 보폭과 빠른 걸음으로 멀어지는 황제를 보고 있자니 그 마음이 얼마나 급하게 이설을 향하고 있는지 새삼 느껴졌다.
*
며칠 내내 정무에 시달리다 보니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 같았다. 사냥은커녕 말조차 타지 못한 게 벌써 두어 달도 훨씬 넘었다. 어깨에 부상은 다 나은 지 오래 건만 아직도 충분한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성화가 시끄러워 제대로 칼이나 활도 잡지 못했다.
윤 내관의 만류를 무시하고 환복한 황제는 오랜만에 대련장을 찾았다. 훈련 중이던 수습 금병들을 부상당했던 한쪽 팔로만 상대해 사기를 꺾는 것도 모자라 대여섯 명을 동시에 상대하며 군의 기강이 해이해졌다 기를 죽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형편없는 신병들의 실력에 저조해진 기분은 마침 근처에 있던 기연과 대련을 하고 난 뒤에야 본래대로 돌아왔다. 제 목검에 제대로 맞은 팔을 붙잡고 터덜터덜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는 마음이 꽤나 유쾌했다.
월등한 실력 차이 탓에 기대한 것만큼 즐겁지 않다는 걸 깨닫고 황제는 미련 없이 대련장을 떠났다. 호위군 몇몇을 불러다 동시에 다 같이 대전이라도 치러 볼까 했지만 자연히 걸어가는 방향이 비은궁이라는 걸 알았을 때 그 일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쫓아오는 궁인들을 모두 물리고 환복한 김에 담을 넘어 비은궁 안으로 들어왔다. 허술한 경비에 혀를 차며 한가롭게 궁을 둘러보다 의원이 다녀갔다는 사실을 알고 급히 이설의 침소로 향했다.
흑의도 모자라 허리춤에 검까지 차고 찾아온 모습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이설을 달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이 모습이 그리 까무러칠 정도로 무서우냐 물으니 대답 없이 우물쭈물 망설이다 눈 아랫부분을 가린 검은 복면을 아래로 쓱 벗겨 냈다. 복면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잊고 있었는데. 이 꼴을 봤다면 이설의 심약한 마음에 놀랄 만도 했겠다 싶다.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갑자기 왜 그런 걸 묻느냐?”
“금군과 대련을 하고 오셨다 하시니 걱정이 되어서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묻는 이설이 어이가 없기도 하고 기분이 좀 나쁘기도 하고. 설마하니 금군과의 대련으로 어딜 다쳤을까 싶어 묻는 것일까 물으려다 관뒀다. 이유야 어찌 됐든 이설이 저를 걱정하는 것은 언제나 마음에 들었다.
“내 걱정은 됐고,”
“…….”
“사의시 의원이 좀 전에 다녀갔다던데. 왜지?”
별안간 미묘하게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보니 아까 본 궁녀들의 말이 맞은 듯싶다. 거짓말을 하려고 머리를 굴리고 있는 건지 퍽 길어지는 침묵을 기다렸다.
“좀 전에 다녀간 이는 사의시 의원이 아닙니다.”
“그럼 누구란 말이냐?”
우찬의 질문에 이설이 일말의 고민도 없이 대답한다.
“태부 손조익이었습니다.”
“…….”
“페하께서도 알고 계실 거라 생각했는데…….”
심상찮게 굳어지는 분위기를 느끼고는 이설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괜히 창밖을 내다보는가 싶더니 짧게 한숨을 토해 내고는 우찬의 얼굴을 살폈다.
우찬은 딱딱해진 표정을 풀 마음도 없이 차게 식은 눈으로 이설을 바라봤다.
“네가 직접 궁으로 불러들였느냐?”
“그런 것은 아니오나…….”
“그럼 너 몰래 네 궁에 누군가가 그자를 불러들였느냐?”
이설이 대답 없이 고개를 숙였다. 복잡해진 심경을 대변하는 얼굴이다.
“솔직히 대답하거라.”
“……제 궁에는 오직 제 사람만 있습니다.”
“…….”
“다만 어리석은 자가 있었을 뿐입니다. 신첩이 엄히 다스릴 테니 염려 마옵소서.”
제 궁인들을 끔찍이 여기는 이설에게 이 일을 캐물어 봤자 당장 원하는 대답을 듣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론 고집스럽게 다물어진 입을 열게 하는 방법은 많았지만 우찬은 먼저 알아야 하는 우선순위가 있었다.
“손조익이 네게 무슨 얘기를 하였느냐.”
“폐하께서 예상하신 그대로입니다. 신첩이 황후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너를 황후로 추대하겠다 말하였느냐?”
“그리 직접적으로 말씀하지는 않았으나 태자 전하의 자리를 보위하기 위해서는 신첩이 황후가 되어야 한다 하였습니다.”
감히 태자를 핑계 삼아 이설의 궁에 찾아와 이런 헛소리를 늘어놓다니. 우찬이 밀려 올라오는 노기를 간신히 참으며 턱에 걸쳐 있던 복면을 거칠게 벗어 옆으로 던졌다. 침착한 티를 내려고 애쓰는 이설도 우찬의 팔이 옆으로 크게 휘둘러질 때는 몸을 움찔 떨었다.
이설의 잘못이 아니다. 괜한 곳에 화풀이를 해서는 안 된다고 속으로 읊조리며, 아닌 척 제 눈치를 살피는 이설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